만화책이랑

신의 물방울 17

2008. 10. 26. 21:42

적포도주의 병 바닥에는

타닌과 폴리페놀 덩어리인 '침전물'이 서서히 쌓여간다.

침전물은 와인의 쓰고 떫은 맛이 모인 것이므로

침전물이 차츰 쌓임에 따라

윗부분의 맑은 와인은 달고 부드러워진다.

세월과 함께 투명해지는 와인,

인간도 그러했으면--- 하고 생각해 본다.  (아기 타다시 )

 

동감!

 

 

 

응, 여기에 있는 건 사람을 감싸안는 따뜻함이야.

따뜻함은 친밀감으로 이어지는 매력이긴 하지만,

사람은 와인이라는 것에서 때로는 매서움을 원하지 않나?

산을 사랑하는 산악 사진가였던 노보루 씨는, 와인에서도 도전해보고 싶어지는 매서움을 추구했을 것 같아.

'산이 거기에 있으니 오른다'는 말처럼,

매서운 와인이 거기에 있어서 도전하고 싶다.

도전해서 그 와인의 정상에 있는

아직 보지 못한 무언가를 추구했을 것 같아.

 

미야비, 난 있지, 이번엔 죽어도 지기 싫어.

녀석은 와인에 모든 것을 걸고 있어.

목숨마저도.

녀석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줄곧 생각했어.

그리고 이번에 노보루 씨가 사는 모습과 와인의 세계관을 한 장의 사진에 담아내는

그 환상적인 감성을 보면서 결심했어.

 

역시 마터호른에--- 올라가 보자고---.

마지막은 감성의 싸움이 될 거야.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온갖 와인을 다 마셔보고, 경험을 쌓았다는 점에서는

나보다 한참 앞서 가고 있는 잇세의 등 뒤에 바짝 따라붙기 위해서는,

나의 단 하나의 무기인 감성과 상상력을 갈고 닦아, '제 5사도'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 이번엔 나 혼자 갈 거야.

노보루 씨처럼 혼자서 '마의 산'에 도전할 거야.

그리고 그 정상에 올라가야만 답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마터호른에, 올라갈 생각입니다.

 

거기에 와인이 있으니까.

 

난 꼭 올라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게 있거든요.

알지 못하면 찾을 수가 없고,

찾지 못하면 지고 말아요.

 

난 어떤 남자와 대결을 하고 있고, 그를 이기기 위해 어떤 와인을 찾으러 왔어요.

--- 내가 찾는 와인이 무엇인지는 나도 아직 몰라요.

단지--- 그 와인은 어떤 기대를 가슴에 품고 마시더라도,

결코 실망하는 일 없는 고고한 와인이에요.

 

즉, 마터호른 같은 와인이라는 얘긴가?

 

와인에 목숨을 걸었단 말인가?

목숨을 걸었다는 게 옳은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나도 죽고 싶진 않으니까.

하지만 이 승부는 절대 질 수 없어요.

절대.

 

맞았어. DRC의 '핀(고급 브랜디)'이야.

조난을 당했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가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걸 마시면.

와~ 이게 '핀'이구나. 이 녀석한테서는 포도 냄새가 나.

신기한 걸. 증류주는 이렇게 재료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술인가?

 

그게 미스터리지.

이 녀석은 핀치고는 젊은 편인데, 몇 십년쯤 지나면 포도냄새가 더 강해져.

포도로 만든 핀은 포도 냄새가, 사과로 만든 칼바도스는 사고 냄새가 점점 짙어져.

 

빨리 죽어가고 싶다~

 

 

 

혹시 내가 잘못됐을 경우를, 대비해 놔야 하니까요.

 

이 남자, 와인 때문에 그렇게까지?

지독한 녀석이다.

광기인가, 아니면--- 악마 같은 것이 그를 부르고 있는 걸까?

 

기다려라, 마의 산--- 너를 정복하고 반드시 '제 5사도'를 찾아내겠어.

반드시---

  

내 목적은 산기슭에서부터 마터호른에 올라가는 게 아니에요.

마터호른이라는 마물과 대치하며 극복했을 때,

얻게 되는 영감입니다.

 

별다른 위험 없이--- 라--- 너무 쉬운걸---

과연 이런 식으로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어.

나머지는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천명이 내게 무엇을 보여 줄지--- 그것에 맡겨 보자---

 

여기서 물러난다는 건 말도 안 돼요.

올라갈 방법이 없을까요?

 

뭐지?

가슴 속에 블리저드가 세차게 불어대는 듯한 이 느낌---

잇세.

가자. 어서---

 

함께 해 주세요. 여기까지 왔잖아요.

돌아가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바보 같으니!! 환각에 사로잡혀서 그만---

이런 데서, 죽을 순 없어!!

나에겐 해야 할 일이 있어!

지면 안 되는 상대가 있어!

난 여기서 이렇게--- 지지 않아!

마물을 이기고

이 손에--- '사도'를!

 

 

 

진짜 아름다운 산이야.

파란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로켓 같아.

 

그래, 재미있는 표현이다만, 넌 시각적인 것에만 사로잡혀 있어.

이 산은 보다 복잡하단다.

 

무슨 뜻이에요?

 

이렇게 올려다보기만 해서는 알 수 없는 것도 있거든.

아니. 근사한 것일수록 멀찍이 떨어져 보기만 해서는 그 본질을 알 수가 없어.

도전하지 않는 한 말이다.

와인도 그런 것이야---

 

어린 시절, 마터호른을 보면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도전이라---

 

왜 그러나, 시즈쿠?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나와 경쟁하는 녀석을 잠시 생각했어요---

녀석도 틀림없이 이 마터호른에 오름으로써 와인을 찾으려 할 게 분명해요.

그렇다면 지금쯤

이 산 어딘가를 오르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녀석은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녀석은 와인에 목숨을 걸었어요.

설령 어떤 위험이 닥쳐도,

아니, 오히려 위험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상에 올라가려 할 거예요.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녀석은 올라갈 거예요.

그런 녀석이에요.

 

그나저나 자넨 참 이상한 녀석이군.

승부에서 꼭 이기고 싶다면 라이벌이 기권하기를 바라기 마련이잖아.

그런데 자네 표정은 마치 가족의 안부를 염려하는 사람 같았어.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녀석이 잘못되는 바람에 승부가 거기서 끝나 버리면,

그래서 내가 이긴다면

그건 이기는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영원히 이길 수 없게 돼요.

안 그래요, 앤디?

 

와인이에요.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방금 와인 냄새를 맡았어요!

 

이봐, 여기가 어딘지 알고 하는 소리야? 정상까지 불과 몇 십m 남지 않은 지점이야.

이런 곳에서 와인을 마시는 바보가 있을 것 같아?

 

있어요.

딱 한 명.

 

축하하네, 시즈쿠.

여기가 마터호른 정상이야.

 

아무리 높은 이상을 품고

아무리 큰 기대를 가슴에 안았다 해도,

그 와인에는 결코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마터호른, 마의 산이여.

너는

날 실망시키지 않았어.

내가 품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

결코.

 

죽음을 이겨내고 뭔가를 얻었을 잇세가 묻는다.

 

오히려 산을 두려워했어요.

하지만 그 공포를 이겨냄으로써, 중요한 것을 얻었어요.

당신은 사람을 성장시켜 주는 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공부? 아니면 경험?

 

아뇨, 만남--- 그리고 시련입니다.

 

나는 지금 고고한 정상에 서 있다.

--- 아아, 산이여, 너는 마물인가, 아니면 신인가---?

 

아무리 높은 이상을 품고

아무리 큰 기대를 가슴에 안았다 해도,

그 와인에는 결코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럼, 시작할까? 누가 먼저 하겠나?

 

제가 할게요. 괜찮겠지, 잇세?

 

얼마든지.

 

이것이 내가 찾아낸, '제 5사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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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이번에는 잇세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마물을 마주한 잇세의 시련이 선택한 와인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