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나나 14

2008. 6. 17. 08:41

 

싱글 데일리차트는 매일 빼놓지 않고 휴대폰으로 체크했다.

타쿠미의 예상대로 블래스트는 멋지게 1위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좋아할 수만은 없는 나는,

역시 트라네스 리더의 여자구나 싶었다.

 

있잖아, 나나.

내가 블래스트의 활약을 마음으로부터 기뻐할 수 없었던 건,

나나가 모르는 사람처럼 돼버릴까봐 두려워서였어.

그런 만큼 더욱 타쿠미한테 집착했지.

나는 늘 그걸 되풀이해서 조금도 진보하지 못했어.

 

있지, 스미카. 이젠 날 꼬시지 말아 줄래?

어째서 이 업계는 유혹이 많은 거야? 다들 어떻게 됐다니까.

어떻게 된 건 타쿠미지. 진심으로 일반인하고 결혼할 셈이야?

완전 진심. 난 사랑에 눈떴거든.

 

설령 사랑받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사랑하고 싶어.

누군가를 마음 속으로부터 그저 순수하게.

가장 심플한 일인데

어째서 그게 이토록 어려운 걸까?

 

타쿠미는 가능한한 매일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일을 핑계로 돌아오지 않는 날도 종종 있었다.

대부분은 정말로 일 때문이겠지만 이따금 뭔지 모를 거짓 냄새가 났다.

백 보 양보해서 타쿠미에게 백 명의 여자가 있대도 상관없다.

내가 그 중 첫 번째면 돼.

1위 자리를 유지하고 말겠어.

기필코.

 

블래스트의 데뷔 싱글은 차트 첫등장 1위를 기록적인 매수로 획득하고,

트라네스는 부동의 왕좌를 내줬다.

하지만 타쿠미는 그런 일엔 미동도 않는 것처럼, 큰 일이 끝난 듯 평소와 달리 온화했다.

싫어, 간만에 타쿠미가 한가하게 집에 있어서 행복한데.

미안--- 아무데도 데려가 주지 못해서.

이 집에 있는 게 제일 맘 편해. 그런 집으로 만들고 싶어.

11월 10일. 우리의 결혼기념일이 될 뻔했던 날.

일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있을 텐데,

타쿠미는 시로카네 집에 있어줬고, 그 마음씀씀이가 기뻤다.

 

드라이브라도 갈까? 어디 가고 싶어?

바다.

여기까지 오니까 엄청 좋아하네.

근데 어디까지 가는 거야?

세상 끝까지.

레이라--- 다 왔어.

슬슬 첫눈이 올 때쯤 됐다 싶었어. 내가 죽으면 유골은 이 바다에 뿌려 주라.

아, 그거 좋겠다. 나도 그럴래!

빠른 놈이 이기는 건가? 제일 오래 살 것 같은 놈한테 부탁해 봐.

그럼 타쿠미네. 죽여도 안 죽을 것 같아.

--- 나두 렌 집에서 잘래.

그런 짓 하면 엄마가 운다.

사모님이 있는데 덮칠 셈이야?

아직 결혼 안 했어.

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런가? 난 결혼의 의미도 잘 모르겠는데. 뭘 위한 제도야?

그럼 왜 프로포즈했어?

그것밖에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선가?

무슨 방법? 벌레 퇴치?

대머리 퇴치! 나나의 마음 속에서 야스를 몰아낼 방법.

어린애 같지. 고작 종이 한 장짜리 계약으로 무슨 효력이 있다는 거야.

그딴 걸로 맺어진다는 게, 더 허무해진다.

사실 난 나나가 노래하는 것도 그만뒀으며 좋겠어.

그리고 계속 내 곁에서 나만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요즘 나, 진짜로 나나를 죽이고 싶어져.

그러면 영원히 나나가 나만의 것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진짜 위험하네.

누가 날 죽여 줘---

 

있잖아, 나나.

나나의 마지막 말이 지금도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고가.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었지?

"바다가 보고싶다."

 

1년의 반은 눈에 파묻혀 있는 듯한 곳이야.

TV일기예보의 눈사람 마크를 보면서 전에 나나가 얘기했던 먼 북쪽 마을을 떠올렸다.

언젠가 나도 그 설경을 볼 수 있을까?

그곳은 타쿠미가 태어나 자란 마을이기도 하다.

 

인생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남들은 잘도 이야기하지만,

인간은 쌓아올린 과거를 토대로 살아가는 거라, 그렇게 간단히는 안 되지.

토대를 무너뜨리는 게 다시 시작하는 건 아니라고 봐.

힘껏 쌓아 올려가면 언젠가 이상적인 모양이 되려나?

 

타쿠미는 어째서 아무렇지도 않게 노부 얘기를 하는 거지?

노부는 둘째쳐도, 같이 있는 우리는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없던 일로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사실은 사실대로 받아들여.

오호~ 그렇구나. 뭔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줄곧 생각했었는데, 그런 점이 이상했던 거구나.

타쿠미가 남들보다 냉정한 느낌이 드는 것도 틀림없이 그 때문이야.

하지만 역시 사실은 차가운 게 아냐.

타쿠미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 줬어.

타쿠미가 있으면 마음이 든든해지는 건, 사정을 봐주지 않고 판단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쿠미가 하는 말엔 흔들림이 없다.

타쿠미는 틀림없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

사람의 감정은 쉽게 흔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허상이며,

그곳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그렇지만 달은 기우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늘 형상을 바꾸지 않고 그곳에 존재한다는 걸

잊지 마.

 

11월 11일 일요일.

신혼부부가 될 뻔한 나와 타쿠미는

이렇게 된 바엔 진짜 신혼부부놀이를 하자며 웃으면서 마주앉아 아침식사를 했다.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오믈렛 위에 케첩으로 그린 그림을 보고 타쿠미는 반드시 토를 단다.

그게 재미있어서 나는 매일 아침 솜씨를 발휘한다.

그런 소소한 일들이 행복했다.

타쿠미가 넥타이색을 고민하고, 내가 골라준 것을 매 준다.

그것만으로도 떨어져 있는 시간이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혼인신고를 하든, 안 하든, 이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타쿠미는 일을 핑계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카사카에 있는 맨션을 처분할 마음은 없나 보다.

하지만 나도 707호실은 포기할 수 없으니까.

왠지 여러 의미로 피차 마찬가지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결국 나만 홀로 남겨져 버렸다.

그래도 난,

그토록 좋아하는 하이힐을 못 신어도,

그토록 좋아하는 블래스트가 멀어져도,

지키고 싶은 게 있어.

남을 부러워하는 건 이제 그만 두자.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모두 다르니까.

 

있잖아, 나나.

나나가 지금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건 뭐야?

붉은 재킷도, 피스톨즈 CD도, 빈티지 기타도, 전부 두고 나가서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야스 말야.

어렸을 때부터 내가 원하는 건 뭐든 양보해줬는데,

너만은 양보하질 않았어.

전에도, 후에도 너뿐이야.

널 상당히 좋아했었나 봐.

이제야 알겠어.

있잖아, 렌.

나랑 렌은 동지야.

나도 소중한 것을 모두 버리고 상경해서 트라네스에 걸었어.

그걸 떠올리게 해줘서 다행이야.

열심히 하자.

 

레이라와 렌이 마주보고 말한다.

불안하다, 렌이.

그래서 레이라의 각오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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