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서,
애매하게 속여 왔던 문제에
마주서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오고야 말았다고 느꼈다.
일부러 관찰하지 않아도 노부 씨는 알기 쉬운 걸.
네가 알 턱이 있나!
그치만 이해 돼.
이곳의 밤하늘은 위험하니까.
무심코 보고있노라면 손이 닿을 것 같은 게,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네가 잊고 간 라이터를 일본에 두고 온 걸 무척 후회하고 있어.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지만,
손에 닿는 장소가 아니면 역시 불안해.
소중히 여긴다는 건 어려워.
눈을 마주보고 얘기하고 싶다.
가식없이, 누군가와 서로 마주본다는 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눈을 피하면 지는 거지.
난 지고 싶지 않아.
세리자와 레이라.
7박8일의 레코딩 겸 강화합숙은 순조롭게 끝났다.
우리는 오늘부터 소속사의 기숙사인가 뭔가 하는 곳에 처박혀 지낸다.
뭐든 좋아. 안심하고 잘 수 있는 곳이라면.
렌에게 전화해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되는 거지?
어차피 한동안 만날 수도 없고, 어정쩡하게 얽힐 거면 그냥 놔뒀으면 싶지만.
그렇게 말하면 되려나?
왠지 숨이 답답해.
난 딱히 하치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게 아냐.
하치랑 밴드는 아무 관계도 없다구.
난 그 녀석 진작에 포기했으니까, 맘대로 해.
하지만--- 그럼 뭣 때문에 싸우는 거야?
우문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음악을 프로로서 인정받기 위해 싸우고 있는 거야.
하치는 상관 없어.
노부가 누구하고 사귀든 노부의 자유고---
하지만 그럼 나와 하치는
어디에서 어떻게 연결되면 되는 거지?
나는 그 집에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도 더 이상 하치는 없는데.
있잖아, 하치.
발버둥치면 칠수록 가라앉다니
인간은 한심한 생물이지.
난 다시 태어나면 물고기가 좋겠어.
좁은 수조 안에서 렌과 단둘이 헤엄치는---
혹시 내가 지금 죽는다면
렌은 더 이상 함께 죽어주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로 된 거야.
그렇지 않음 안 된다.
그것을 서글프다고 생각하는 내가 틀림없이 이상한 거다.
마치 깊은 해저에서 끌어올려진 것처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야스의 가슴에선 블랙스톤의 달콤한 향이 난다.
난 아무 데도 안 가.
야스가 말했지.
현대인은 다들 많든 적든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
숨막히는 세상이잖니.
넌 남들보다 델리키트한 것뿐이지, 딱히 이상한 건 아냐.
하지만 난,
이런 연약한 자신이 싫다.
이런 나에게 이제 어지간하면 정이 떨어질 텐데---
어째서 이 녀석들은 질리지도 않고 같이 있어 주는 거지?
근성이 있다니까.
바쁘다는 건 핑계였다.
렌도 그건 감지했을 거다.
하지만 렌의 목소리를 들으면 왠지 또 숨이 막힐 것 같아서 두려웠다.
난 바쁘면 바쁠수록 컨디션이 좋았다.
일에 충실하면 기분이 상쾌하고 달리 병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툴렀던 대인관계도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하치를 만나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
타쿠미와 아이 얘기에도 귀를 기울여 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럴 시간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지금
이 거리에 있는 몇 명의 사람이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생각보다 유명해진 것 같아.
역시 렌은 국민적 인기스타야.
자기소개할 수고를 덜었어.
고맙다, 파파라치들.
지금 우연히도
이곳에 있게 한 운명에게
네놈들 모두 감사해라!
있잖아, 하치.
좀 멀긴 하지만, 그곳이 가장 안전한 특등석이야.
네 뱃속의 아이한테도 내 노래가 들릴까?
더 이상 야스한테 보답받을 길 없는 마음을 품게 해서는 안 돼.
내가 렌하고 예전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던 건
야스의 저 끝없는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지.
나는 렌이 없어도 오늘까지 어떻게든 연명해올 수 있었지만,
야스가 없다면 진짜로 끝장이야.
매듭을 짓자.
렌을 만나면 이번에야말로 절대 넘어가선 안 돼.
있잖아, 하치.
그 어떤 역류에도 안간힘으로 버티는 게 인생이라고, 난 생각했지만---
흘러가며 사는 건 그다지 바보 같은 것만은 아냐.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내 꿈은
밴드를 성공시켜서 온 나라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각인시키는 거였다.
설령 단 한 사람에게 불리워질 수 없게 된다 해도.
렌--- 염려하지 않아도
난 너한테서 나나를 뺏을 생각 없어.
그러시겠지. 넌 옛날부터 뭐든 나한테 양보해줬잖아.
남을 얕보다니, 열 받아.
넌 나나가 없으면 결국 이 모양이야! 불안정해서 보고있을 수가 없어!
나나도 마찬가지라구!
역시 그 녀석 뭔가 하고 있구나. 이상하지?
안 해. 하지만 이대로 놔뒀다간 어떻게 될지 몰라.
하치 건으로 알게 됐어.
그 녀석은 친엄마한테 버림받은 게 상당한 트라우마가 된 거야.
넌, 나나 타쿠미하고는 달라.
도리 같은 거 따지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대로 해. 이랬다간 조만간 오래 못 간다.
계속 함께 있을 수 없다면 끝내는 편이 나아.
렌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하겠지.
각오는 했지만 두렵다.
나나---
뭐야! 빨리 말해! 숨막혀 죽겠어!
결혼하자.
나는 어렸을 때
나 자신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여겼었다.
그래서 열여섯 되던 겨울,
렌과 맺어졌을 때는
기가 막히게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이, 현실감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건,
기적이다.
운명의 상대다, 라고 생각했다.
나나--- 결혼--- 해 줄래?
무리야.
해주지 않음 나 죽는다.
죽어, 맘대로---
죽을 땐 길동무로 삼을 거야.
그럼--- 죽여---
가사상태가 되어 같이 천국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나나.
렌이 허세부리긴 해도 여전히 어린애니까,
조금은 다정하게 해줘.
부탁한다.
그런 건가?
야스가 자애로운 건 딱히 득도를 해서도,
나를 여동생처럼 여겨서도 아니다.
내가 다른 것도 아닌 렌의 여자이기 때문이야.
어째서 이렇게 알기 쉬운 상관도를 깨닫지 못했던 걸까?
야스가 갈곳 없는 신세인 나를 지켜주는 건, 꼼짝달싹 못하는 렌을 위해서다.
야스는 나보다 렌과의 인연이 훨씬 깊어.
렌이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으니까.
같은 고아원에서.
단 하나 의지할 구석이 사라지고, 어쩔 수 없이 렌에게 빠져가는 나의 괴로움 따윈,
누구도 구원해주질 않아.
렌 외에는 구원해줄 수 없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가.
있잖아, 하치.
너랑 타쿠미를 만나게 한 일을 그 무렵 나는 마음 깊이 후회했지만
만약 네가 지금 그 남자 곁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거라면
조금은 나도 구원받을 수 있어.
단 하나의 희망이야.
타쿠미한테 여자가 몇 명 있다고 해도 놀랄 건 없지만,
상대가 레이라라면 집에서 된장국 끓여좋고 기다리고 있을 하치가 너무 가엾다.
안 돼.
또 가슴 깊숙이 딱지가 벗겨진다.
이렇게 타쿠미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볼 때마다 깨닫게 돼.
하치가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가슴 졸였을 때,
심하게 몰아붙인 한심한 나 자신을.
모조리 다 때려부수고 싶어!
트라네스 놈들의 시치미뗀 얼굴도, 사회자들의 판에 박힌 미소도, 준비된 지장없는 질문도,
전부 원숭이 놀음이다. 전부 코메디야. 짜증나는 방송!
하지만 나도,
매스컴이 만들어낸 블래스트의 나나를 연기하고 있기에 돈을 벌 수 있는 거지.
내 인생은 어차피 처음부터 3류 드라마다.
어두운 과거는 아무렇게나 각색해서 맘대로 퍼뜨려도 좋아.
하지만 밝은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는, 나 자신이 써야만 해.
결혼같은 형식적인 발상은 지금까지 우리 사이에 없었지만,
지금 서로의 입장을 지키며 같이 있고 싶다면 그게 최선책일지도 몰라.
결혼은 아마 렌 나름대로 생각해낸 결론이겠지.
우리는 사실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세상에 공표하고, 그 증거로 결혼한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이대로 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는 건 이젠 참을 수 없어.
타쿠미, 네가 하치코한테 사준 반지 말야, 어디의 어떤 거냐?
있잖아, 하치.
취향이 전혀 다른 우리가
같은 보석을 몸에 지니는 날이 오다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변덕쟁이인 네가
이 전통 브랜드의 고풍스러운 반지만은
지금도 소중히 간직해줬으면 좋겠다.
가이아에서 들어온 계약금과 사무실에서 매달 받을 수 있는 월급과,
앞으로 들어올 예정인 CD인세.
우리는 더 이상 초라한 아마추어 밴드가 아니다.
하치와 아이, 둘쯤은 여유롭게 부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어쩔 거야, 노부 씨? 불꽃놀이 갈 거야?
응.
하치를 빼앗아올 거구나!
아니--- 그치만--- 그건 만나본 뒤에 결정할 문제잖아?
행복해보이면 그걸로 됐어. 남의 행복을 빼앗으면서까지 찾아오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쓸쓸해하는 것 같으면, 역시 그냥 놔둘 순 없겠지. 천성이 그런 걸.
정말--- 미안---
이젠 됐어. 나도 나쁜 짓 많이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의 어리광은, 뭐 하나 대단할 것도 없었는데 말야.
넌 열받겠지만, 난 역시 너랑 얘기하고 있으면 즐거워. 만나서 기뻤어.
그러니까 이젠 안 만나. 전과자는 자중해야지.
원시인가?
멀어질수록 잘 보이는데, 가까이 가면 놓쳐버리거든.
다들 그럴지도---
있잖아, 하치.
사람은 잃어버리고 나서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고 하지만,
진정한 의미로 깨닫는 건 언제나 다시 마주쳤을 때였던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