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울 정도로 사이가 좋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싸운다는 건 결국,
에고가 충돌한다는 것이고, 본심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지
서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아마도 불가능하겠지만,
주위에 상처주지 않고 살아가도록 노력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괜시리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난 알바를 쉬고, 며칠만에 렌 품속에서 푹 잔 뒤,
묵은 때가 가신 듯, 평온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나는 아마도 내가 노래로 성공하지 않는 한,
트라네스의 렌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지울 순 없겠지.
하지만 만나면 결국은 늘 이렇게 되고 마는 건, 렌은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매우 단순한 사실.
부엌 찬장에 딸기컵은 없었다.
하치가 내 몫까지 가져갔다고 생각하기는 힘들고,
역시 깨져버렸다고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되새겨봐도 참 멍청한 짓을 했다 싶다.
하지만 굵어지는 빗발과 마침 우산을 챙기지 못했다는 초조함이
어서 하치를 만나고 싶다는 내 충동을 부추겼다.
나는 쏟아지는 빗속을 죽어라 헤매느라
하치네 맨션에 도착했을 때는 우산을 썼음에도 흠뻑 젖어있었다.
평소대로 하면 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302호는 렌이랑 같은 호수다.
난 절대 착각하지 않았어.
경계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유를 불문하고 단칼에 자른다.
역시 타쿠미가 고안해냈음직한 방법이군.
302호는 현재 비어 있습니다만---
확실히 그런 소릴 들으면 자기가 착각한 줄 아는 녀석이 꽤 되겠지.
그리고 빈집이라고 여겨지는 방에서 한들한들 살아갈 하치는
마치 자기가 죽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유령과도 같다.
타쿠미와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 여자.
난 도저히 그런 인생이 행복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있잖아, 하치.
정말 그래도 괜찮아?
혹시 신네 집안 사정하고 내 입장이 중복돼?
나도 신에겐 숨길 생각이었거든--- 틀림없이 낳는 걸 반대할 줄 알았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꼭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어째서 네가--- 엄마가 널 낳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는지 들려줬으면 해.
나는 내 아이가--- 절대 그런 생각 안 하게 해주고 싶거든.
내가 하는 얘긴 진짜 신경 쓰지 마.
설령 사정이 같다 해도 사람이 다르면 사태는 달라지는 거니까.
자기 생각대로 해 나가는 수밖에 없잖아?
응--- 미안---
나도 하치의 아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오카자키 신이치의 모친은 자살했습니다. 신을 낳고 바로요.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오리무중입니다.
--- 그것만 알아도 기사감으로는 충분해. 그보다 나나 모친 소식 좀 알아봐 줘.
어느 시대든 서민이 미디어에 요구하는 건 변함없어! 자극적인 화제라구!
헌데 요샌 예술가인양 착각에 빠진 놈들뿐이잖아.
트라네스 같은 우등생 밴드가 군림하는 세상은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단 말야.
타쿠미의 높은 콧대를 꺾어 놓고 싶다니까.
아무튼 내일 벌어질 잔치가 기대되는 군.
다들 눈이 번쩍 뜨일 걸. 느낌이 좋아.
그날 나는 날이 저물도록 맨션 앞에서 하치가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다.
내일 알바 끝나고 다시 오면 돼.
스튜디오에 가기 전에 시간도 좀 있고,
야스한테라도 전화번호를 물어보면 이렇게 어긋나는 건 피할 수 있어.
이대로 평생 못 만나는 것도 아니잖아.
내일이 있으니까.
신!
노부는 잘 지내---?
기타만 쳐대고 있어. 시끄러워서 나까지 못 잔다니까.
날이 새기를 간절히 고대한다.
내일은 맑았으면 좋겠다.

인기밴드 트랩네스트의 기타리스트, 렌의 열애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상대 여성은 전 밴드 동료이자 곧 가이아 레코드에서 메이저 데뷔를 하는
블랙스톤즈의 보컬리스트! 나나!
두터운 구름이 물러가고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그날부터
우리가 서있던 곳은 스테이지가 아니라 링 위였다.
환성과 욕지거리가 지금도 귓가에 남아 울린다.
당시 내 방에는 TV도 전화도 없었다.
덕분에 혼자 뒤처졌다.
불쾌하기 그지없다.
그런 거 거짓말이야!
일일이 떠들어대지 마! 진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무래도 상관없다니---? 너무해!
시끄럽댔지? 관계자 외는 빠져!
부탁이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구!
쓸데없는 짓이 아냐! 타쿠미는 진짜 사람이 이상해!
그렇게 생각한다면 억지로 결혼하는 거 관두지 그래?
아버지가 이상하면 자식도 제대로 된 인간으로 기를 수 없어. 내가 좋은 예야.
아버지가 있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니까.
나나! 너, 타쿠미라는 게 설마 트라네스의 타쿠미니?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거짓말! 솔직히 말해! 어째서 나한테까지 숨긴 거니?
쥰--- 나--- 아이 때문에 억지로 결혼하는 거 아냐---
왜 울어? 그야 나두 알지.
사실은 나--- 타쿠미 좋아해---
안다니까--- 다행이다. 깨달아줘서.
왜---? 나는 노부를 좋아했을 텐데---
기분 탓이야.
넌 너한테 잘해주는 남자라면 아무라도 좋았잖아.
이래가지곤 난 평생 행복해질 수 없잖아!
나나가 스스로 기사감 판 거 아냐?
트라네스의 인기에 편승한 이름 알리기!!
나나를 구하러 온 야스가 눈을 부릅뜬다.
남의 정원 망칠 시간 있거든, 네 놈들 꽃이나 피우라구.
입에 발린 소리하지 마.
두 번 다시 우리 보컬리스트한테 접근하지 마라.
최악이군.
렌의 여자로 이름이 팔리는 건 죽어도 싫어.
젠장, 더럽게 끈질기네.
친한 척 불러대지 말라구!
이젠 끝장이다.
네놈들 덕분에 모두 박살났어!
나나!
멍청아! 웬 폼을 잡고 난리야! 네 놈 입장을 생각하라구. 이 대머리!
아니--- 사무실에선 잡일밖에 안 하고, 그만둬도 곤란한 사람 아무도 없어.
곤란한 건 너잖아! 폭행사건을 일으키면 아무데서도 안 써 줘! 인생 막 살래?
괜찮아. 이걸로 거리낌없이 모험을 할 수 있으니까.
이 녀석은 바보다.
우리 멤버는 바보들뿐이야.
노부는 부모한테 의절당하고, 여자한테 버림받아도, 기타만 붙잡고 늘어지고.
신은 이대로 뒀다간 파멸의 길로 내달릴 거고.
내가 노래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어.
렌 씨, 여자친구 분, 도와주지 않아도 정말 괜찮으세요?
공교롭게도 내 여자는 프라이드가 높아서 말야.
아마 내가 사람들 앞에서 감싸면 감쌀수록 비참한 기분이 들 걸.
--- 난 장난으로 음악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구.
지금의 트라네스는 타쿠미만의 성이 아냐.
프로덕션이랑 레코드회사랑 여러 기업을 아우른 일대 프로젝트다.
나 혼자 멋대로 할 순 없어.
밴드라는 건, 말하자면 운명공동체야.
내가 지금 지켜야만 하는 건,
옛날에 버리고 온 동료가 아니라구.
바보 같아.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렌은 나를 잘 알고 있고,
나도 렌의 입장은 안다.
소란 피우지 않을 거야.
하지만 지금, 어떻게든 말하지 않고는 전할 수 없는 생각이 있는데---
하치코, 두고 봐.
네 소원은 꼭 이뤄줄 테니까.
그날부터 내가
몇 번이나 두들겨 맞아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언제나 네가 지켜봐 주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닥 눈썹을 찌푸릴 만큼 엄숙한 상황도 심각한 뉴스도 아니다.
평화로운 아침에 난입한 라이브 영상과 몹시도 짙은 화장을 한 보컬리스트의 추문.
임팩트는 충분.
승산은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축제는 시작됐습니다.
이제 와서 물러설 순 없어요.
그런데 노부는?
방에 틀어박혀 있어요.
도련님은 나약해서 곤란하다니까.
틀림없이 이 세상의 어두침침한 길을 지나지 않고, 햇살 좋은 장소에서 자랐기 때문이야.
오호라~ 그래서 옛날부터 노부 주위엔 늘 사람들이 모여 들었던 거구나.
양지에서 햇볕을 쬐고 싶은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거야.
이런 식으로 데뷔 결정이 나봤자 하나도 안 기쁜데, 나나는 잘도 할 마음이 들었군, 그래.
긍지는 어따 둔 거야?
녀석은 지금까지도 유쾌하지 못한 일이 많은 인생이었던 것 같고,
아무튼 성공해서 세상을 놀라게 해주고 싶은 거겠지.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게 나나의 긍지다.
야스!
뭐, 여러모로 납득이 안 되는 일도 있겠지만--- 적당히 하고 눈을 떠.
세상엔 반드시 정의가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지고 싶지 않으면 강해져라. 좀 더 약아져.
그게 싫거든 테라시마 여관으로 돌아가.
TV를 켰더니 오후 와이드쇼에서 렌이 보도진에 둘러싸여 있었다.
국제공항 로비를 아무 말 없이 잰걸음으로 걷는 렌을 보고,
또다시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렌이 어디로 가려는지 모른다.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 창고거리에서 다시 함께 살자고 얘기했던 일이
보컬리스트로서 성공하는 것보다
왠지 가망이 없는 꿈같은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드디어 우리의 꿈을 이룬다.
하지만 추구하는 이상과 밀려오는 현실은 언제나 서로 대립해서,
좀처럼 원만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사람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언인가를 지불해야 하는 시스템에 얽혀있는 것 같다.
얼핏 깨닫긴 했지만, 영휴(달이 차기도 하고 이지러지기도 하는 일)의 루프는 숙명인 건가.
노부오--- 진짜 미안하다, 폐만 끼쳐서.
나랑 얽히지 않았으면, 넌 훨씬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괜찮아,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난 틀림없이 '나나'라는 이름의 여자한테 놀아나는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는 거야.
그럼 다음에 등장하는 여자 이름도 '나나'겠네.
그건 참아주라---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말야.
내 이야기 속에선 역시나 하치를 도저히 지울 수가 없어.
내 이야기 속에서도 전혀 지워질 것 같진 않아.
하지만 하치 이야기 속에서 난 이미 사라졌겠지.
아직 희망은 있어.
내 작전에 협력하면 돼. 하치코 되찾아오기 대작전!
내 작전은 간단하다.
하치에게 더더욱 달콤한 꿈을 꾸게 해 주는 것.
하치 이야기 속에서 우리 블래스트가 계속 멋지게 등장하면 되는 거다.
그렇게 되면 조만간 반드시 돌아와.
혹독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돌파해가는 그 냉혹한 인간이,
응석꾸러기인 하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리가 없어.
'하치 이야기'의 히어로는 나다.
있잖아, 하치.
난 더 이상 네 이야기의 히어로는 될 수 없지만,
지금도 내 이야기 속 히로인의 이름은 나나---
너무도 귀여운 너야.
나나 : 한방에 일본 제일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제대로 잘 여유도 없을 만큼 분주해진 나날 속에서---
나는 자신이 세운 작전의 과오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하치에게 얼른 내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에만 몰두해서
하치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이 얘기나 타쿠미 얘기 같은 건 솔직히 듣고싶지도 않았고.
단순한 질투이지만.
야스 씨는 밴드를 향한 꿈을 버릴 수가 없었던 거예요.
기자를 때린 건, 멤버를 너무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구요.
사람들이 뭐라든 레이라 씨 애인은 멋진 분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된 거야? 렌! 야스의 꿈은 밴드가 아니라, 변호사 아니었어?
거짓말이랑 숨기는 것 투성이야---
옛날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구---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밴드가 소중했다면--- 그건 나랑 헤어지기 위한 구실이었던 거야?
아니--- 녀석이 그렇게까지 한 건 밴드 때문이 아냐.
위험한 걸.
난 더 이상 나나를 위해 그 정도로 필사적이 될 수는 없어.
어째서일까? 좋아하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난 언제부터 이렇게 냉정한 인간이 돼버린 거지?
그건 냉정한 거하고는 달아, 렌--- 사람은 살아가는 만큼, 중요한 짐이 늘어가는 거야.
생각한 대로 움직일 수 없게 돼 가는 거라구.
그렇기 때문에 그걸 함께 보듬고 갈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해져 가는 거라구.
렌은 그녀와 그런 식으로는 될 수 없어?
야스는 나한테 홀딱 반했잖아?!
그렇군. 이렇게까지 까발려지니까 어이가 없네. 좀 지나쳤나.
그래, 이 대머리야. 대체 무슨 꿍꿍이야.
별로 꿍꿍이 같은 거 없으니까, 넌 신경 쓰지 말고 노래나 해.
그런데, 야스.
난 고향에서 렌과 헤어진 후, 이 2년 반 동안
렌과의 인연보다, 야스와의 인연이 더 강해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렌과 있어도 어딘가 허전하고 이젠 옛날처럼 하나가 될 수가 없어.
어째서일까?
렌을 좋아하는 마음은 줄곧 변함이 없는데.
있잖아, 하치.
깨알 같은 별들이 번져서 오늘밤도 하늘이 몹시 빛나.
나는 지금도 반짝이는 것을 보면
렌을 떠올려.
확실히 야쿠자같은 사람인데? 나쁜 길로 빠졌으면 틀림없이 천하를 가졌을 걸.
그럼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나님이 음악적 재능을 주셨나보다.
하지만 연예계는 보기엔 화려해도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 많을 거야.
쉴 수 있는 가정을 만들어 주는 게 네 임무니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렴.
하치의 어머니는 참 다정하고 긍정적이구나!
(타쿠미가 하치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면서)
나한텐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우선순위가 있어.
첫 번째는 일.
그게 내 뇌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다른 건 다 건성이야.
하지만 여자는 두 번째로 소중하겠지.
그게 없으면 휴식을 취할 수 없으니까.
그다지 잘 돌봐주진 못 하겠지만, 고생은 안 시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