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의 여름, 담배를 세븐스타로 바꿨다.
렌이 피웠기 때문에.
같은 수만큼 피어싱을 늘리고,
같은 세트의 부츠로 걷고,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은 꿈을 꾸었다.
헌데, 렌은 나를 두고 가 버렸다.
나는 마음 어딘가에서--- 그것을 용서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의지박약이군.
벌써 다섯 대째다.
세 달만에 좌절인가.
하지만 마음을 진정시켜야 하는 걸.
진정하자.
하치가 어떤 결단을 내리든, 다정하게 지켜보기로 결심했잖아.
우리 결혼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새로운 룸메이트를 찾지 않을래?
그게 뭐야.
어째서 거기까지 얘기가 비약된 거지?
난 아이가 생겼다는 것조차 듣지 못했었는데.
그럼 노부는 어떻게 되는 건데?
왜 입다물고 있는 거야?
영문을 모르겠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
거짓말쟁이--- 배신자--- 최소한 자기 입으로 말하라구!
쾅! 식탁을 내리치자,
하치가 세트로 골라서 소중하게 여기던 딸기컵이
스르륵 내려져 깨져버린다.
잡으려고 애썼는데---
세트가 아니면 슬픈 걸, 이라고 하치가 말했었다.
나머지를 들어서 깨어진 컵 위로 슬그머니 놓았다.
다행이다--- 깨끗하게 포개져서--- 이젠 슬프지 않아.
있잖아, 하치.
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엔 내 그릇은 작고, 싸구려컵 같았어.
하지만 모든 것을 잃는 외로움에 비하면,
금이 가서 아픈 게 훨씬 나아.
내가 약했을 뿐, 네 탓이 아니야.
딸기컵은
100엔 숍에서 아직도 평범하게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분을 사지 않은 채, 소중히 간직했던 하치의 심정을 생각하면
기억나지 않는 왼쪽 뺨의 상처가 너무나 아프다.
오늘밤은 집에 돌아가서, 하치한테 사과하자.
컵은 아마 깨졌을 거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가십을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생각하자마자
렌에게 간 내 자신도 수수께끼지만,
눈을 뜬 곳이 야스 방이 아니라 안심했다.
더 이상 야스에게 기대서는 안 돼.
야스는 내 것이 아니니까.
나, 결혼할 건데, 상관없지?
결혼?!
아우성거리며 떠들어대는 트라네스 멤버와 스탭들.
나오키 : 사랑이 없어도 좋아?
타쿠미 : 사랑같은 건 나중에 생겨.
인간은 어차피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하니까.
자신의 욕망을 보다 많이 채워주는 상대를 사랑하게 되는 거지.
디렉터 : 그거, 어떤 의미론 진리군. 결혼시켜주라구.
나쁜 남자와 골수팬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한 걸.
미안해, 야스--- 갑자기 전화해서--- 달리--- 기댈 사람이 떠오르지 않아서---
나--- 레코딩을 팽개치고 와버렸어--- 타쿠미가--- 결혼한다는 말을 해서---
도저히 노래부를 마음이 안 생겨--- 그런데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모르겠어---
어딜 가든 사람들한테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무서워---
레코딩--- 도망쳐 나온 걸 알면--- 틀림없이 다들 기막혀 할 거야---
스태프들한테도--- 팬들한테도--- 레이라는 이제 끝났다며 버림받을 거야---
하지만 노래할 수가 없는 걸--- 어떡해--- 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데---
렌 : 그렇게 일이 중요하면 레코딩 전에 공주님을 동요시키는 소린 말아야지.
프로근성을 시험하는 것치곤 너무 심하잖아.
타쿠미 : 무슨 소리야.
렌 : 시치미 떼지 마. 레이라는 너한테 반했다구.
타쿠미 : 대놓고 말하지 마. 여태 모른 척 해온 내 노력이 물거품 되잖아.
렌 : 영주님의 총애를 받으면 공주는 노래하는 거 아니겠어?
타쿠미 : 이상한 얘기군. 어째서 성이 커질수록 궁핍해지는 거지?
어느 샌가 귀여운 여동생을 높은 탑 꼭대기에 가둬두고 말았어.
사랑해주지도 못하면서. 내 삶의 최악의 죄다.
하지만 녀석은 노래하는 재주밖에 없어.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이젠 나도 돌이킬 수가 없어.
하다 못해 탑을 기어올라가서라도 안아줄 왕자님이 있으면 좋을 텐데.
결혼한대.
기가 막히지 않아?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미안해, 노부---
어제 나나의 태도로 이미--- 끝났다고는 생각했었어.
그 녀석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타쿠미한테 반했던 거야.
하지만--- 어쨌든 난 당사자인데--- 어째서 제3자가 된 거지?
녀석한테 있어서 난--- 그렇게 미덥지 못한 존재였던 건가?
난 널 만날 때까진 사람들이 진짜 싫었어!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지만,
널 만나고 비로소 이 놈의 세상도 쓸만한 거라고 생각했단 말야!
넌--- 미덥지 못한 게 아냐--- 노부.
여자한테 채인 정도로 기죽으면 안 돼---
렌보다 훨씬 연약한 노부의 어깨는 떨리지 않았다.
가슴을 빌려주겠다던 내가 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노부에게 빚이 산더미만큼 있으니까.
역시 하치와는 화해할 수는 없어.
딸기컵은 렌한테 가져가자.
혼죠 렌과 오사키 나나의 연고지를 죄다 뒤지고 와.
블래스트의 메이저 데뷔를 가이아가 망설이는 것 같은데,
이런 재미난 배틀은 또 없지.
내가 거나한 잔치를 벌여서
단숨에 트라네스와 똑같은 무대에 세워주마.
고마워 해라, 오사키 나나.
운명적인 시합의 개막이다.
있잖아, 하치.
내가 트라네스에 적대심을 가졌던 건,
여자로서라기보다 보컬리스트로서 렌의 마음을 빼앗은 레이라가 부러웠기 때문이야.
렌을 뒤돌아보게 하고 싶었던 것뿐, 적으로 돌리고 싶었던 건아냐.
하지만 너를 빼앗긴 그날부터, 완승을 거두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돼버렸어.
어떻게 해서든--- 되찾고 싶었어.
휴대폰 따윌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멋대로 무단외박을 하고 있는 건 자신이면서
메시지 한 통 보내지 않는 하치가
점점 제멋대로인 여자라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다.
그저 통신수단일 뿐인 기계한테
사람의 인연을 시험받고 싶진 않은데.
새로운 메시지가 없습니다.
벌써 9일이나 집에 돌아가지 않았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돌아가기 힘들어지는데.
하치는 그 방에서 혼자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하치가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건 명백했다.
그 자기중심적인 남자가 성실하게 연락을 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고.
하지만 동정은 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하치가 선택한 인생이다.
나는 하치가,
외로움이 쌓여서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야스 : 전 음악을 마음이 담기지 않은 비즈니스로 다룰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 밴드엔 나나나 신처럼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자란 녀석들도 있구요.
녀석들한테 세상은 결국 돈과 욕심뿐이라는 관념 따윈 갖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점점 그걸 알게될 기회는 늘어갈 테니까,
적어도 카와노 씨처럼 진심으로 저희 밴드한테 애정을 쏟아주는 사람이
후원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카와노 : 자네가 품고 있는 짐이 무겁겠지. 반 나눠주게.
짊어질 수 있는 대로 짊어지려고 하지 마.
양손 가득 들고 있으면 중요한 순간에 움직일 수 없게 되니까.
야스 : 그 말대로군요.
채워지지 않은 달.
나는 렌과 있어도 저런 느낌이다.
아무리 서로 깊이 사랑해도.
틀림없이 그 누구도 나를 채워줄 순 없어.
하지만 무대에 서있는 동안만은 완전체가 될 수 있지.
지켜야만 해.
자신의 꿈만은.
그 어떤 걸 희생해서라도.
있잖아, 하치.
그 무렵 사랑에만 빠져있던 너도,
어쩌면 나와 마찬가지로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에 목말라 했던 걸까?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없던 네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아.
네가 지킨 새 생명은 지금도 너를 채워주고 있니?
조용하다.
없는 건가?
아니, 이젠 모르겠다.
(식탁 위에 놓여있는 편지) 나나에게
뭐야, 이건---
무슨 흉내야?
그 텅 빈 방을 봤을 때,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혼자만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젠 지긋지긋해.
이런 생각을 반복하면서까지
어째서 인간은 누군가를 갈구하는 것일까?
나나에게.
내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해.
나나는 이제 나를 용서해주지 않겠지만
나나와 살았던 반 년 동안의 일은
난 평생 절대 잊을 수 없을 거야.
이대로 나나를 만날 수 없게 되는 건
견딜 수 없이 쓸쓸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최소한 하루라도 빨리 메이저로 데뷔하고
TV에 잔뜩 나와서 열심히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줘.
내가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있어도
나에게 있어서 영웅은 나나 뿐이야.
나나만큼 멋진 사람은 또 없으니까.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계속.
나나--- 뭘 그렇게 슬퍼해.
이건 이별 편지가 아니라 열렬한 러브레터잖아.
만나러 가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어째서 내가 만나러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웃겨!
영웅은 그런 거야.
있잖아, 하치.
사람은 아무리 반복해서 서로 상처를 입어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헛된 게 아니지?
그때 네가 준 러브레터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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