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어서

앉아 있는 악마 / 김민경

2011. 12. 13. 09:15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앉았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세우고 깍지를 꼈다.

악마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걸까?

나처럼.

탄탄한 근육을 가진 악마,

하지만 깍지 낀 손가락은 힘이 없어 보이고,

어깨와 등은 구부정하다.

목도 길게 빼고 있다.

누가 가서 일으켜 세워 주지 않으면

악마는 계속 저렇게 앉아만 있을 것 같다.

악마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갈 길을 몰라 하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저렇게 앉아 있나,

나처럼....

 

 

'악마'라는 러시아 장시가 있어.

레르몬토프라는 작가가 쓴건데,

낙원에서 쫓겨난 악마가 주인공이야.

브루벨은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해.

악마는 선과 악이 대립하는,

모순이 가득 찬 세상과 불화하는 자를 상징하지.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집이 되었지만...

빈집.

빈집.

'빈집'이란 말만큼 공허하고 슬프고

그러면서도 가슴 깊이 번지듯 울리는 말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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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편 길을 거닐었다.

늘 가던 길에서

단지 건넜을... 뿐인데...

세상에나... 달랐다.

그곳에는

내가

마음주지 못했던 세계가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시간에도

잠잠히 눌러앉아

이야기를 만들어간 공간들.

오늘은

그들의 수다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멈춰버린 빈집 하나.

어느 누군가의 소설이 담겨있을

빈집을 보면서

마음 한가득

애잔함만... 그득하게

 

...쓸쓸하다, 빈집.

지원이가 다시 지켜낼 집이

빈집의 무게로 다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