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신의 물방울 23

2010. 9. 7. 09:42

나디아, '숲'으로 돌아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넌 와인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런데 아버님은 왜 그렇게 일본을 싫어하죠?

 

호주의 숲을 일본이 파괴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빠는.

아빠 말씀도---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에요.

호주 남부에 있는 태즈메이니아 섬의 숲이 심각하게 벌목되고 있는데,

그 잘라낸 나무가 일본에서 대량으로 소비되는 종이의 원료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세요?

 

이 나라의 자연은 인간에게 친절한 숲보다는

오히려 인간에게 엄격한 황야와 사막을 의미해요.

우리의 조상이 이 땅으로 건너와 시작한 농업의 하나가---

포도 재배였던 것도 그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포도는 척박한 땅에서도 재배할 수 있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척박해야 맛있는 와인을 만들 수 있죠.

 

 

호주의 엄격한 자연 속에서도 오히려 척박한 토지를 좋아하는---

와인용 표도를 재배하기 시작했던 게 아니겠냐는 이야기,

--- 아버지는 그런 신대륙의 웅장하고 엄격하기도 한 자연을,

와인이라는 음료를 통해 과연 어떤 자세로 바라봤던 걸까---

거기에 '제7사도'의 열쇠가 숨어 있을 것 같아.

 

 

벌써 15년이 지났군.

그 중년 남자는 자기가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베낭 하나만 둘러메고 불쑥 나타났지.

처음에는 무슨 꿍꿍이가 있지 않겠냐며, 모두가 경계했어.

--- 3개월이 지나 봄이 찾아오려는 어느 날,

이대로 우리와 함께 마을을 만드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지.

 

그런 제안을 해 준 것은 기쁘게 생각하네, 잭.

하지만 난 한 곳에 머물 수가 없어.

--- 여기에 온 목적은, 자네들이 자연과 공생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내 가슴 속에 항상 웅크리고 있는 죄의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싶어서였네.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마을을 만들어내는 어려운 작업에 스스로 뛰어들어,

동료와 함께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자네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싶었어.

 

도대체 자네는 어떤 사람인가, 칸자키?

 

오만한 나그네지.

와인이라는 끝도 없는 세계를 여행하는 나그네야.

 

그는 스스로를 와인의 전도사라고 말했어.

그것을 위해 에콜로지와 정반대되는 행위도 해왔다고 말이야.

 

말도 안 돼!

와인을 지구의 반대편에서 배로 옮기는 짓을 하면, 얼마나 막대한 에너지가 낭비되는지 아나?

와인은 세계 각지에서 만들잖아?

자기가 사는 나라의 와인을 마시면 돼!

그게 자연스럽게 와인을 즐기는 방법이잖아? 안 그래?

 

응. 하지만 이제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기만 해서는, 살아갈 수가 없어.

자연파괴는 물론이고, 자신을 망치는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 경우도 있지.

와인도 그중 하나네.

와인은 하늘과 땅이 키워내는 신의 은총임과 동시에, 인간의 노력이 만들어낸 마물이기도 하지.

나는 그 어느 한 쪽의 매력에도 저항할 수 없는--- 약한 남자야.

 

--- 뛰어난 와인은 머나먼 지평선을 넘어,

혹은 시간을 거슬러, 사람에게 환상을 보여 주지.

그래서 나도 그것이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여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네.

 

와인이라는 신이기도 하고,

마물이기도 한 음료가 사는, 끝도 없는 세계를---

 

자네는 칸자키의 아들인가?

그렇다면 자네는, 이제부터 절망적으로 높은 벽에 부딪히게 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것을 넘지 못하는 한, 자네가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할 거야.

 

그 정도는 압니다. 저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에요.

전 지금 강적과 싸우고 있어요.

그 녀석은 저보다 몇 배나 더 스케일이 큰 남자죠.

지식은 물론이고 재능도 일반적인 방법으로 겨룬다면 감히 넘볼 수 없는 상대예요.

그런데도 전 다양한 사람과 운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막상막하에 가까운 대결을 펼쳐 왔어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게 통하지 않을 겁니다.

 

자네가 무얼 찾으러 여기에 왔는지, 듣지 않아도 난 알아.

자네 아버지가 무얼 찾으러 왔는지도, 난 어렴풋이 알았지.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오래된 쉬라즈 밭이었어.

이 바로사밸리의 근방에는 100년이 넘은 고목으로 이루어진 포도밭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는 방치한 상태나 다름없는 밭도 있었지---

그가 마을을 떠나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바로사 밸리를 둘러봤을 때였어.

 

왜 그러나, 칸자키?

이 황폐한 포도밭이 마음에 걸리나?

 

물감과 캔버스는 여기에 있어.

나머지는--- 사람만 있으면 돼.

호주의 와인에는, 아직까지 예술가가 거의 없네.

하지만 머지 않은 미래에 이 근사한 물감과 캔버스로---

역사에 남을 명작을 그려낼 자가 반드시 나타날 거야.

그 그림이 어떤 것일지 지금으로서는 알 방도가 없지만.

 

 

녀석은 다른 와인을 들고 올 거야.

'제 7사도'는 그런 와인이야. 틀림없어.

 

잇세는 미국에 갔던 모양이에요.

칸자키 시즈쿠는 호주에 다녀온 것 같고요.

 

호오--- 크게 갈렸군.

 

그 얘기를 들으니, 그 사람이 제7사도에 담은 메시지를 알겠더군요.

승부는 처음부터 결정나 있었어요.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약간 화가 나는 이야기지만요.

 

 

 

'제7사도'는 이제까지 찾은 여섯 병의 와인과는 전혀 달라.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이 될 테지.

 

잇세가 찾아온 '제7사도'

'시네 콰 논 2003년산 디 이너그럴 일레븐 컨페션즈 시라'

 

매년 에티켓은 물론이고 병의 디자인까지 바꾸고, 와인의 테마 역시 예술처럼 달라지죠.

같은 와인을 두번 다시 만들지 않는다는 천재 양조가.

맨프레드 크랭클이 만드는 궁극의 아메리칸 컬트 와인!

 

이 와인은 성난 자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려놓습니다.

이 와인은 슬퍼하는 자를 보듬어 줍니다.

이 와인은 우쭐거리는 자에게 상냥하게 충고해줍니다.

이 와인은 고뇌하는 자에게 밝은 길을 보여줍니다.

나도 그 무리의 한 명입니다.

겨우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보십시오.

오만하고 젊은 탓에 길을 잃은 자들이 여기에 모입니다.

한 명의 천재가 그린 꿈을, 기약없는 미래의 완성을 향하여---

각자의 작은 역할을 수행하며 쌓아올리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이 와인은 혼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거대한 꿈을 향해 모인 젊은 힘.

고독한 사자가 처음으로 알게 되는, 무리를 짓는 것의 의미.

함께 걸어가는 '동료'입니다.

 

아버지--- 당신은 이 제7사도의 승부를 통해,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겁니까---

가르쳐 줘. 이 황홀한 향기 너머에 펼쳐지는--- 아버지도 보았을 심상풍경을---

 

왜 그러나, 시즈쿠?

그 와인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보였나?

 

아니오.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아니에요!

여기는 캄보디아의 유적 앙코르와트예요!

 

이 와인에는 사람의 힘을 훨씬 넘어선 테루아르가 있어요.

이 와인 앞에서--- 인간은 따스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해요.

그냥 기도할 뿐이지

--- 이 와인을 낳은 것은 100년이 넘는 고목의 포도인 게 분명해.

그렇다면 그다지 역사가 길지 않은 것 같은 이 와인의 생산자는,

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고목의 포도로 와인을 만들 수 있었을까?

 

'글레처 아몬 라 쉬라즈 2003'

 

아득한 옛날부터 있어 왔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감동을 안겨주지 못했던 포도밭.

그것을 한 인간이 발견하고, 그 안에 숨은 위대함에 탄복하면서 격투,

공생이라는 형태로 한 잔의 와인으로 승화시켰어.

 

그것은 그야말로 100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졌다가 발견되어,

그 위대함을 알리게 되었던 캄보디아의 사원 건축, 앙코르와트.

 

이 와인이 의미하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발견'이야.

 

잇세, 자네한테 묻겠네.

미국으로 간 이유가 뭔가?

 

제7사도는 인간의 목적의식이 만들어내는 와인.

테루아르에 순응하며 하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만들어가는

프랑스의 와인과 구분되는 와인이라 생각해서, 신대륙으로 범위를 좁히는 것까지는 쉬웠습니다.

 

하지만 이 '시네 콰 논'에 들어간 시라는 호주에서는 쉬라즈라 불리는 포도품종으로,

양적으로나 질족으로 중심이라 말해도 좋을 품종이지만,

제가 넓은 신대륙 중에서 호주가 아니라,

보르도 계열의 품종이 높은 평가를 받는 미국을 선택한 이유는,

호주에는 가우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인류가 만들어낸, 위대한 예술의 하나입니다.

---와인세계도 똑같습니다.

투자대상이 되어 어마어마한 자격에 거래되던 일부 컬트와인이 바로 그것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이 '시네 콰 논'은 같은 컬트 와인이라도, 전혀 다른 발상에서 탄생했어요.

네, 물질문명에 대한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아몬 라'는 어려움이란 걸 모르고 너무 순탄하게 만들어졌어요.

그래요, 방금 시즈쿠가 표현한--- 발견이라는 단어가 이 와인에는 어울립니다.

 

훌륭하군, 잇세! 유타카의 의중을 완벽하게 간파했어.

시즈쿠, 모르겠나?

이 두 병의 와인은--- 지금의 너희 두 사람이야.

 

현재의 잇세는 무언가를 넘어섰어.

그 답이 바로 '시네 콰 논'이야.

칸자키 유타카의 아들로서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의지해 싸워온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경험할 수 없는 무언가를 녀석은---

 

사도 찾기 승부를 포기할 생각이에요.

--- 내가 추구하는 것은 잇세와의 대결이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승부이자 대화예요!

--- 아버지는 다 알고 있을 지도 몰라.

아버지는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아마 그렇게 될 거야.

왜냐하면 토미네 잇세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 당신이니까!

 

 

 

시즈쿠를 찾아온 잇세의 어머니.

 

혹시 시즈쿠 씨, 이 승부는 자신을 지게 하기 위해

아버지가 꾸며 놓은 잘 만든 레이스가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하지 않았어요?

--- 평생 후회할 거예요,

이 소중한 승부를 아버지에 대한 시시한 반발실 때문에 포기해 버리면.

 

--- 당신은 토미네 잇세와 마지막까지 싸워야 해요.

그리고 잇세도 당신과 마지막까지 싸워야만 하고요.

그렇지 않으면 12사도의 정점에 선 '신의 물방울'을 절대 알아낼 수 없어요.

그런 싸움을 칸자키 유타카는 당신들 두 사람에게--- 부과하고 있는 거예요.

 

즉, 시즈쿠 씨가 싸움을 포기한 시점에서 '신의 물방울'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고,

두 사람은 칸자키 유타카를 뛰어넘지 못한 채 패배자가 될 거예요.

--- 아버님이 정교한 레이스를 꾸며놨다고 생각하는 건, 아마 그쪽의 곡해일 거예요.

시즈쿠 씨가 미숙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좀더 성장하도록 해요.

 

그리고 지금부터는 어드바이스.

확실하게 오해를 풀고 싶어서 가르쳐주는 거예요.

위대한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가고 싶다면,

아버지의 원점이 무엇인가, 그걸 생각하며 족적을 따라가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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