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 아우나한테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뭘 말야?
아우나 오빠 이야기요.
아우나는 그 사람이 죽은 줄 알잖아요.
전 아우나가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알아야 한다라--- 그래도 괜찮아?
어머, 제닌. 그럼 곤란해.
내가 분명히, 네 마법을 풀고 싶으면, 아우나의 마음을 가지라고 했잖아.
리하르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페어플레이로 그 녀석을 이길 자신이 있어?
이건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에요.
평생 마법을 못 풀어도 말이지.
큭! 그럼 공주님,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실래요?
--- 공주님은 아우나를 이용하고 계시는 건 아니지요?
아우나의 마음으로, 그에게 복수하려는 건--- 아니지요?
듣기론 공주님도 그 녀석을--- 혹시라도 그러시는 거라면,
저는 절대로 공주님을 도와주시지 않을 거예요.
--- 나는 니가 아우나에게 그에 대해 말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
아우나가 그의 생존에 대해 알게 되는 게 두렵지도 않아.
다만 나는--- 생애 처음 마주한 깊은 절망에 넋이 나가버렸던 그때의 그 소녀를,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아.
아우나가 리하르트의 생존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나는 알 수 없어.
기쁨일지, 배신일지--- 짐작도 할 수 없어.
그러니 도박도 하지 않아.
그래도 제닌, 이건 알아줄래?
나는 진심으로 너와 나오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걸.
번져가는 노란색, 물들어가는 붉은색, 어느새 잊혀질 초록색
그 정원의 한켠에서 저는 제가 알기 전의 주인님을 그려보았습니다.
여전히 말이 없고, 여전히 표정이 없는 무채색의 아가씨.
까만 머리칼이 지금보다 길었었나 봅니다.
그건 아주 예뻤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냥 달콤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알 수 가 없는 이야기.
더 이상은 그려낼 수 없는 한 소녀의 역사.
그 어느 곳에선가 눈을 닫고 그 무엇도 응시하지 않은 채,
넋이 나가있었다고 합니다.
속해있던 한 세계가 멸망했습니다.
그리곤 그 차갑고 큰 성에 홀로 나겨졌을 주인님을 생각하니,
수년 전 엄마를 잃고 울던 제가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분명 서로 다른 아픔이겠지만
아주 다른 이야기는 아닐지 모릅니다.
16년---
우리는 16년의 세월을 건너 불과 몇 개월 전에 처음 만났습니다.
제가 만난 것은 그 시간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살아온 지금의 주인님.
그 시간을 나를 만난다는 설레임에 기다렸던 건 아니더라도---
말 없이 잘 견뎌온 주인님을 만난 건,
제겐 충분히 설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저도 먼저 그에 대해 말해주지는 않을 겁니다.
그에 대해 알게 된 주인님이 미소를 짓든, 화를 내든---
여전히 무표정이든---
저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주인님의 작은 여우로 있으렵니다.
주인님이니까---
내가 나와 아저씨와 제닌의 주인님이니까.
내가 지키는 건 당연해.
주인이 아니라도 당연해.
그것은--- 제가 해드리고 싶었던 말이란 걸---
제가 당신께 들려드려야하는 다짐인 걸--- 알고 계시나요?
나의 아버지는 굉장히 사교적인 분이셨어.
한 지역의 영주라는 위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원래가 사람을 좋아하는 분이셨어.
그래서 식사 시간은 항상 여러 지인들로 북적거렸지.
나는 원래가 이런 성격이라---
대화가 오가고, 관심이 오가고, 식기에 수저가 가볍게 부딪히고, 시선이 부딪히고---
귀찮았을 뿐이야.
싫어한 게 아니야.
싫어한 적 없었어---
나는 우리집이 다시 조용해지는 건--- 바라지 않아---
조용한 건---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아르델의 남부, 비옥한 코프리스의 주인으로 태어난 아우나는
16세의 나이에 그녀가 나면서부터 가졌던 명예와 부, 그리고 가족을 모두 잃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매사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인형 아가씨.
지금 그녀는 릴 아스너로부터 독촉 편지를 받고,
자신이 한 약속을 상기하며,
코프리스의 여주인에게 정중히 부탁을 했다.
공주님, 인어의 눈물 좀 구해다주세요.
아우나는 '인어의 눈물'이 뭔지 알아?
보석이야.
액체 아니었어요?
그 안에 들어 있었어.
그저 육안으론 안 보였을 뿐이지.
가루로 만들면, 무색무취의 약으로도 쓸 수 있는 희귀한 보석이지.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져도 될까?
공주에게서 인어의 눈물을 빼앗는 나오.
한 마디 더 하자면,
난 이걸 아우나에게도 줄 생각이 없어.
그리고 사라지는 나오.
코프리스 성의 집사 제닌은 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건지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갑자기 나오와 공주가 싸우더니, 지금은 주인님이 울고 있다.
사무엘, 코프리스 양(아우나)을 성으로 데리고 오너라.
미움받는 것은 싫다.
특이 이 사람(릴 아스너)에게는.
거리의 여자가 될 뻔한 나를 딸로 삼아주었다.
몇 년 뒤엔 귀여운 동생도 생겼다.
이 녀석(제닌)은 진짜다.
1살 차이지만 누나 노릇이 즐거웠다.
진짜 아들.
누나 노릇을 하다가 자연스레 좋아하게 되었다.
핏줄.
이기지 못해도 괜찮아.
귀여우니까.
좋아하니까.
사랑받고 싶으니까.
버림받는 것은 두렵다.
좋은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내겐 좋은 사람이야.
주인님은 궁금해.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떠나갔듯이
여우도 언젠간 웃으며 떠나갈 거야?
아우나를 초대한 제닌의 아버지 릴 아스너가 나오 레플리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음--- 이건 아르델의 수도가 지금과 달리 아노하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3-400년은 족히 된 이야기지요.
아르델의 대마법사, 시오딘에겐 인형같은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건지, 그렇게 길러진 건지
마음이라든가, 감정이라는 것이 없어보이던 사내였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는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전사였으며,
스승만큼 뛰어난 마법사였기에 사람들은 냉혹한 그에게,
빙안의 마법사라는 별칭을 붙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봄이 오면 겨울의 흔적은 사라지고,
얼음도 눈물을 배워,
이전의 그라면 했을 리 없는 금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진노한 그이 스승, 시오딘이 그에게 먹인 것이 바로 인어의 눈물.
형벌의 이름은 영생.
--- 그래서 그는 인어의 눈물을 다시 얻어---
무얼--- 하려고 하는 걸까요?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게 아닐까요?
흙이라든가--- 먼지라든가---
제 마법은 언제쯤 풀리는 걸까요?
주인님--- 어디선가 휑한 바람소리가 들려요.
주인님에게 있어, 제가 그저 작은 여우일 뿐이라도---
지금은 괜찮아요.
지금은 주인님을 위로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조금만 더 넒은 품으로 주인님을 안아드릴 수 있다면,
더 따뜻했겠지만---
지금은 이대로도 괜찮아요.
제닌--- 우리 나오 아저씨를 찾으러 가자.
나오 아저씨를 데리러 가자.
여우는 궁금해요.
주인님은 그(아우나가 사랑했던 오빠 대니, 밀리엄,
아우나는 아버지의 죽음이 오빠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를 알고서도 연거푸 총성을 울렸던 건가요?
하지만 주인님의 그 노여움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박혀버렸어요.
그를 빗겨간 총알만이 주인님의 진심을 알고 있을까요?
주인님---
앞으로 그에게 총을 겨누지 말아요.
어차피 맞지도 않잖아요.
제닌 아스너,
나오 레플리카가 가진 인어의 눈물을 뺏어라.
그가 살기를 바란다면.
이미 알 거라 생각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을 생각이지.
그러니 그게 싫다면, 뺏어.
이슈타르 최고의 도둑인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묻습니다.
제닌, 니가 원하는 건 무엇이니?
그리고--- 나오 형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내가 오랜 세월 찾으며 기다렸던 것.
니가 그걸 지금 내 눈앞에서 없애버린다면
난 아마 너무 화가 나서 널 죽여버릴지도 몰라.
그럼, 죽어.
죽는 게 소원이면 지금 여기서 죽어버리라고! 죽어!
왜--- 왜 아직 살아있는 거야!
아우나가 서럽게 말한다.
--- 조금만 살다가--- 우리랑 같이 죽어요---
아니--- 조금만 먼저--- 조금만 일찍 우리보다 먼저 가세요.
그럼 나랑 제닌이 아저씨는 양지 바른 곳에 묻고,
슬퍼하다가 생각나면 또 찾아가서 꽃을 두고 울게요.
어느 날엔가 꽃도 시들고, 더 이상 찾아오는 이 없는 그런 날이 오겠지요.
세상 누구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날이 와도
아저씨 혼자 남아있지 않아도 될 거예요.
나도 없고 아저씨도 없고 제닌도 없는 그런 날이 와서
같은 별, 같은 땅 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삶을 살아가도
추억하는 이 없어 슬퍼하는 이 남아있지 않으니,
그 또한 자유.
그 자유를 아저씨에게서 뺏지 않을 테니
부디---
사는 동안--- 조금만 더 길게---
우리랑 살아요---
아저씨도 우리랑 사는 게 싫지는 않죠?
이것은 여우와 내가 만난 지 약 16시간이 경과하던
그 순간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다.
그날 오전, 나는 벨로트 공주로부터 여우라고 주장하는 생물을 얻어왔다.
지가 여우라고 하니 여우인지 아는 이 요상한 생물체는
하루종일 틈만 나면 도망질이다.
한 마디로 말해, 내가 잠을 잘 수가 없다.
셰익스피어.
그날 난 세익스피어를 읽다 잠들었다.
그날, 그 순간,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그 순간 나는 잠을 자고 있었다.
꿈.
몇 번이고 꾸는 문이 열리는 꿈.
문틈 사이로 내가 그를 본다.
몇 달 전 왕궁 근처의 기숙학교로 갔던 그가 방학도 아닌데 돌아와 있다.
옅은 금발. 단정한 목선,
비라도 맞은 건지 흠뻑 젖은채.
그날 그는 거기 있어선 안 되었다.
아득한 옛날, 전장에서 공을 세웠다던 창이 바닥에 서 있었다.
그때 그 창은 거기 있어선 안 되었다.
거기 있어선 안 되는 것들이 모여 만든
있어선 안 되는 광경.
말했듯이 이것은 꿈이다.
나는 그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나 자신이 누구에게 총을 맞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죄의 이름은 들었으되, 쉬이 이해가 되질 않았고,
공주에게 물었으나 그녀는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대답을 한 후 공주는 잠시 먼 곳을 멍하닌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공주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듣지 못한 대답은 묻어둔 채 그저 여우를 얻어 돌아왔을 따름이다.
악몽이라 해서 일어나지 않았던 일은 아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그 모습으로 돌아가셨고,
집은 비고 남은 것은 나 하나.
그것이 현실.
꿈은 몇 번이고 깨어나면 된다.
그게 바로 살아남은 자의 특권.
단지 그뿐인 꿈 이야기.
생각해보면--- 어느 날 타의에 의해 이곳에 불시착했을 뿐.
용무가 없는 곳이니 날아가 버리는 게 당연지사.
여우는 언제나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아무런 연고도 없고,
나는 그의 마법을 풀어줄 수도 없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그를 쫓는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해줄 것도 없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날 여우가 날아왔다.
그리고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저 만났을 뿐이다.
그날, 여우가 말했다.
날 믿어, 주인님.
지금 이렇게 주인님이랑 있는 것도 다 내 의지고, 내 선택이니까.
주인님은 날 믿는 수밖에 없어.
믿는다.
녀석과 내가 신뢰를 쌓은 사이는 아니더라도
지금은 그게 가장 편한 방법일지도 몰라.
배신당한다 해도 상처받지 않을 듯한
신뢰보단 기대 없음에 가까운--- 타인.
만났다는 것만으로 이야기는 시작하지 않는다.
헤어짐을 알아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함께한 시간이 쌓이는 만큼 추억이 쌓이고 의미가 깊어진다.
허락한 적도 없는데 어느 새 내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16의 여름, 나는 너를 만났고,
16의 가을, 나는 너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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