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궁 19

2009. 4. 3. 22:20

너하고 나, 우리 두 사람---

여기서 끝내고 가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거든.

 

지금부터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줘.

너, 우리 이혼에 관여한 바 있어?

 

 

너, 네가 가끔 정말 멍~ 한 표정 짓는 거 모르지?

 

그럴 땐,

정말 너 혼자 세상 끝에 버려진 사람 같아서---

 

너 혼자 있을 때 그러는 건 상관 안 해.

하지만 적어도, 나하고 같이 있을 때나 사람들하고 섞여 있을 땐

그런 표정 짓지 말아줘.

그걸 보고 있는 내 심정은 어떨 것 같니?

영혼 빠진 사람처럼 멍한 눈을 한 너를 보는 내 마음은--- 어떨 것 같아?

 

다가오는 효린에게 멈칫거리는 신.

 

나는,

효린이에게 용기가 필요했을 그 순간에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내 옆에서 날 바라보는 사람을 바로 옆에다 두고

볼 수도,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사람을

죽을 만큼 그리워하는 이런 미친 짓은,

언제쯤 끝날까---

 

어째서 미루의 전화기로

'나야'

그 한 마디만을 툭, 던져놓고 끊어버린 걸까.

그 단 한 마디가,

나야, 라고 나지막이 말하던 네 목소리가

내 안에 갇혀서, 머리에 박혀서, 가슴에 남아서

네가 실수로 했을 수도 있는 그 한 마디에

간절히 매달린 채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데.

사람 가슴을 이렇게나 깊숙이 후벼파 놓고 넌,

무심히 잊어버린 거야---?

 

내 앞에서 그 애 얘기 꺼내지 마.

정말--- 더 이상은 이기적인 널 참아줄 수 없어.

청혼한 여자애 앞에서 무심하게 전부인 얘길 꺼내는 이기적인 널

일방적으로 인내해 줄 수가 없다구---

나도, 더 이상은 못 참아.

이번에 함께 서울 올라가면 곧바로 언론들 불러다 앉혀 공식 결혼 발표해.

그게 1년을 잠자코 기다린 나에 대한 예의야.

 

내 스스로도 내가 얼마나 자기 연민에 빠진 이기주의자인지 잘 알면서

그 이기심 때문에 한 아이를 그토록 힘들게 했으면서도

난--- 내 무신경함으로

또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래, 효린이 말대로 하는 게 옳은 건지도 몰라.

나 자신의 힘만으로 완전히 털어내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렇게 누군가의 손이라도 빌려 털어내는 수밖에.

하지만 역시--- 그 모든 것 이전에

반드시 알아내 해결해야 할 일은 마무리 지어야 한다.

 

만약 신이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거라면---

언젠가 너도 모든 걸 알게 될까?

살면서--- 이렇게 무섭고 두려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

내가 벌인 일들, 내가 한 짓들,

언젠가 내 무릎을 꿇고, 내 목을 꺾을 것을 알면서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죄들.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된다고 해도---

그래서 나에게 돌을 던지고, 손가락질하고, 경멸하고, 비웃어도 상관없지만

너만은--- 너만은 절대로 알게 하고 싶지 않은데---

그래선 안 되는데---

 

율이의 병문안을 온 신이와 마주친 채경.

 

아무렇지 않을지도 몰라.

고통 받은 시간만큼 단단해져서

흘린 눈물만큼 감정이 무뎌져서--- 어쩌면

의연하고 당당하게 널 바라볼 수 있을지도---

 

하지만---

 

언젠가 생각한 적이 있었다.

널 보고도 울지 않으면 그러면 된 거라고.

우연히 널 마주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네 눈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을 수 있게 되면,

내 고통은 다 끝날 거라고.

그때부터 슬픈 주문이 풀려 이 질긴 사랑을 끝낼 수 있을 거라도.

우는 순간 모든 게 무너져 내릴지 몰라.

내가 견뎌왔던 시간들이,

내가 몸부림치며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들이.

그러니 웃자.

내가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강하고 의연해졌는지,

얼마나 행복하고 건강해졌는지를

너에게--- 너에게---

 

미루가--- 나 여기 오는 거 말 안 해줬어?

 

너 온단 얘기 들었으면--- 그랬으면 나---

여기 오지 않았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

 

저를 수도꼭지라 부르셨었죠, 할아버지.

아침부터 울기 시작하면 해질녘까지 멈출 줄을 모른다고요.

결국

울어버렸어요, 저.

엄마 손을 놓치고 놀이공원 한 가운데 떨구어진 아이처럼

서럽게, 서럽게 울어버렸어요.

부끄러움도 창피함도 잊어버리고는,

말없이 날 지켜보는 그 아일 옆에 두고는,

정말로 오랜만에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그 무엇도 의식하지 않은 채로

울고 싶은 만큼, 울 수 있을 만큼, 목 놓아 울어버렸어요.

 

쿡! 안 변했네, 하나도---

궁궐에서 내쳐진 비운의 세자빈쯤 되면

처연하게 눈물로 지새우다가

어느새 철들고 어른스러워지고, 꽤 시크해져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대로여서--- 정말 다행이야---

 

 

 

--- 제발---

우연히라도 다시 만난다면--- 이젠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손내밀면서 악수하자고---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 거 같아.

지금 이 장면은--- 기억에서 지우는 거야, 우리들---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타고, 토악질이 나고, 숨이 턱턱 막혀오던 그 시간---

너와 헤어져 나와 처음 밤을 맞이했던 그날로 다시---

그 아이도--- 힘든 건 마찬가지겠지.

 

네 말이 전부 옳았어, 율아.

진작에 네 말을 들었었더라면---

보지 않는 것, 듣지 않는 것,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게 빨리 잊기 위한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방법이란 걸.

율아.

너한테 그 어떤 희망도 주고 싶진 않지만---

널 이용해 내 고통을 덜어보겠단 생각 따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차라리 이곳을 떠나 살면서 너에게 마음을 열어갈 수 있다면.

그 마음에 조금씩 기댈 수만 있다면---

 

율이의 병실에서 국왕전하가 율이에게 다그치는 말을 듣게 되는 채경.

 

네 짓이냐---?

두 사람--- 그렇게 갈라놓은 거---

모두 네 짓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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