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산 보르도의 가격이 치솟아 2004년산의 배나 된다.
위대한 해인 것은 사실이나--- 이들 와인을 마시려면 2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그때쯤 이 세상이나 나 자신이 어떻게 돼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런 생각이 들자 적당한 가격의 백빈티지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병당 10만 엔이 넘는 1급 샤토의 2005년산보다,
병당 1만 엔쯤 하는 오래된 3급 샤토의 와인이
현재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 분명하다. (아기 타다시)
훌륭해요. 당신은 꼭 좋은 소믈리에가 될 겁니다.
유능한 사람이군. 내 사무실의 스태프로 스카우트하고 싶을 정도야.
와인에 대한 이 사람의 식견과 높은 이상이란---.
보통 사람 같으면 오래된 유명 샤토라는 이유만으로
비싼 값에 레스토랑에 내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할 텐데,
이 사람은 퀄리티가 따라주지 않으면 그걸 용납하지 않아.
이런 고집스러움은 와인에 인생 전체를 건 사람만이 가진 긍지겠지.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꼭 정확히 맞혀야 하는 건 아니죠.
당신은 아주 좋은 장점을 갖고 있어요.
미야비 씨, 난 당신의 능력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당신 같은 인재를 깊이 알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이번 작업은 의미가 있어요.
당신이 내 스태프가 되어 준다면, 임시직이 아니라 정규직과 함께
그에 상응하는 자리를 약속하겠어요.
와인은 훌륭한 것을 한 병이라도 많이 마셔 보는 게 중요해요.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절대 열 수 없는 문이 있거든요.
문?
그래요.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는 무리를 해서 근사한 와인을 한 병 마셔 보는 게 좋아요.
예를 들어 한 달이 30일이면, 29일은 데일리 와인으로 참고,
하루만 고급 음식과 와인을 즐기는 날로 정해두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최고의 와인을 마시다보면,
문 너머에 펼쳐지는 미지의 광경이 보이기도 하니까요.
미지의 광경---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미지의 광경에 취해 걸어가다 보면---
또 다른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요.
와인의 매력은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신비로운 미궁 같은 심오함에 있죠.
내 손을 잡아요. 내가 안내해 줄 테니---
변했군.
처음 만났을 무렵의 당신이라면 '예'가 아니라 '응'이라고 대답했겠지.
야생블루베리 같은 사람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이 잼 같아.
잼?
응, 이 잼도 야생 블루베리로 만들었지만,
이렇게 좋은 호텔의 아침 식사에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맛으로 다듬어져 있지.
싫--- 어요?
아니, 난 당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
야생 블루베리로는 이런 세련된 장소의 식탁에 올라올 수 없거든.
기껏해야 테이블 장식품밖에 될 수 없지.
하지만 아사마 산에 열린 똑같은 블루베리로 만든 거라도, 이 잼은 정말 고상해.
야생의 맛으로 가득한 복잡함과 깊이를 동시에 갖고 있어.
난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랐어.
당신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어. 난 당신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것이, 완전한 미학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야.
알지? 나에겐 당신이--- 당신에겐 내가 필요해.
와인에 목숨을 건 남자.
목숨을 건 와인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손을 내민다.
적극적으로 내민 손안으로 움켜쥔다.
와인을 위한--- 와인에 의한--- 와인의 잇세
로랑 : 시즈쿠 씨.
시즈쿠 : 응?
저--- 어떤 사람이었나요? 칸자키 유타카 선생님은---
글쎄---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어. 어린애였던 나에겐 너무 난해했지.
비유한다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실 시기가 다가오지 않는,
그레이트 빈티지의 위대한 보르도 와인처럼 말이야.
하지만 아버님을 존경했군요? 그러니까 위대한 와인에 비유할 수 있는 거예요.
하하--- 그건 그래. 근데 철없을 때는 엄청 반항했어. 고집불통에 답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내내 아버지에게 반발하며 성인이 됐기 때문에, 이 나이가 되도록 와인을 마시지 않았어.
결국 아버지와 함께 와인 잔을 기울인 적도 한 번 없었지.
그랬군요---
당신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야?
아빠는 사막과 함께 살다가 사막에 묻히듯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일본인인데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전 세계를 여행하다가 마지막으로 타클라마칸에 정착했는데 나한테 많은 것을 가르쳐 줬어요.
요새는 그 가르침을 와인이라는 술 속에서 하나하나 발견하게 되는 게 너무나 즐거워요.
그리고 나를 와인으로 이끌어준 잇세에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시즈쿠 씨의 어머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었고--- 실제로도 상처를 받았지.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어.
나랑 같네. 부모님이 안 계시구나. 근데 이상해. 당신은 조금도 쓸쓸해 보이지 않거든요.
어머니가 계시고, 의좋은 여동생도 있는 잇세가 오히려 늘 외로워 보여.
미야비 : 시즈쿠 씨는 좋겠어요.
어릴 때부터 이런 걸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굉장한 미각과 후각을 갖게 됐겠죠?
시즈쿠 : 음~ 내가 아버지가 길러낸 블루베리라면,
그 사람은 아사마 산에 열린 야생 블루베리 같아---
그 사람이면--- 로랑 씨?
응. 타클라마칸 사막이라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자랐는데, 놀라운 후각과 미각,
거기다 감성까지 갖추고 있어. 잇세가 비장의 카드로 키워내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어쩌면 시즈쿠 씨는 로랑 씨와도 어딘가에서 승부를 벌이게 되나?
뭐?
잇세 씨의 스태프면 시즈쿠 씨와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인 거잖아요.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 나도 혼자가 아닌걸.
나한테는 미야비랑 쵸스케 선배가 있어.
나, 나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걸요.
왜 도움이 안 돼? 잇세가 진지한 표정으로 칭찬까지 했는데.
난 아직 미야비의 풍부한 지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응? 미야비만 믿어.
그, 그래요. 응, 얼마든지 기대요.
잇세 : 시시한 것이면 시시하다는 말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게 와인입니다.
그렇다고 맛만 훌륭하다고 해서 무작정 비싼 값을 매겨
일반 고객에게 내놓을 수 없는 게 또 와인이지요.
로베르 : 자, 이제부터 잇세 팀과 시즈쿠 팀이 각각 추려낸 와인을 마셔보고---
감성에 따른 '가치 있는 와인' 판별을 하는 거야.
시즈쿠 : 뭐, 여기엔 나와 로랑 씨가 완벽하다고 생각한 와인만 내놨으니,
그걸 믿어달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지.
잇세 :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도 나와 미야비 씨가 철저히 검증한 와인만을 내놨다고 말하고 싶군.
양쪽이 우연히 일치하긴 했지만 --- 시즈쿠, 난 이 와인들을 테이스팅만으로 전부 구분해낼 자신이 있소. 자네는 와인의 레벨과 이미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나처럼 와인의 시장 가격까지 테이스팅으로 알아낼 수는 없을 거야.
시즈쿠 : 응, 못해. 하지만 난 수천 종류의 와인을 향기만 맡아보고, 모든 와인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당신은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군?
로베르 : 건방진 것들! 풋내기들이 뉘 앞에서 잘난 척이야? 난 마셔 보지 않고도 이렇게 색깔을 보고 향기를 맡아 볼 뿐인데도, 모든 와인의 이름에서 빈티지는 물론이고, 그 본질까지 훤히 알아. 어떻게 그럴 수 있는 지 가르쳐 주랴? 그건 말이지---
내가 여기 놓인 와인들을, 전부 몇 번씩 마셔 봤기 때문이야.
와인이란 술은 그런 거야--- 마시지 않고서 논하지 말란 말이지.
로베르 선생님, 감개무량합니다.
두 사람이 적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며,
와인잔을 기울이는 날이 오다니.
이것 또한 와인이 보여 준--- 한때의 짧은 몽환인 게지.
내일이 오면 저 형제는 또다시 불꽃을 튀기며 험난한 길을 걸어가야 해.
그게 숙명이야.
아름다운 은백의 신이여--- 나에게 지극한 기쁨을--- 제 5사도.
나는 지금 고고한 정상에 서 있다.
이 맑고 차가운 대기.
지금 내 머리 위에는 하늘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눈 아래 봉우리
모든 것이 넙죽 엎드린 듯 가로누워 있고,
바위 표면에 달라붙은 은백색 눈은,
비단드레스를 휘감은 것처럼 매끄럽게 빛나고 있다.
어디지? 아버지는 어디에 있을까?
문득 눈물이 북받친다.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나는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지난 여정을 되돌아보았다.
매 순간 고단한 길이었지만 가슴 벅찬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 마물에 홀린 듯한 집념에 떠밀려,
나는 정상을 향했다.
마물?
후지산은 영봉이라고 해서 위대한 거장들도 인생을 마감할 날이 다가오면
무슨 이유인지 후지산을 모티브로 그림을 그린다고 들었어.
아버지도 자신이 떠날 날이 머지 않았음을 느꼈을 때 후지산을 마음에 뒀고,
그것을 와인에서 찾았던 걸까?
아침 햇살에 물들기 시작한 고봉을 올려보며,
첫걸음을 내딛었다.
도전하는 자를 시험하는 듯한 고요함.
거인은 그저 내려다볼 뿐이다.
나는 '돈키호테'처럼 그에게 도전한다.
조급해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한 발 한 발에 온 힘을 실어 정상으로 향한다.
그러자 산은 어떠한가.
시시각각 표정을 바꾸며---
때로는 미소짓고, 때로는 평온함을 보여 주며, 또 때로는---
사나운 영혼을 가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상과 희망,
그리고 영혼이 갈구하는 대로 바위에 달라붙어 미끄러운 눈을 힘껏 밟으며,
오로지 높은 곳을 향해 간다.
아냐--- 후지산이 아냐. 후지산은 올려다보는 곳이기에 영봉인 거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영혼은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치고,
우뚝 솟은 정상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나를 비웃 듯,
산은 거대하고 그러면서 아름답게 침묵하고 있다.
비단 베일을 덮어쓴 듯한 정상은--- 이따금 시야에 나타났다가는 다시 사라지고,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면, 신기루처럼 다시 멀어진다.
아아, 산이여.
너는 마물인가, 아니면 신인가---?!
엄청난 박력이야!
이렇게 위대하고 사람을 끌어당겼다가, 또 떼밀어버리는 와인이 대체 뭘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내 손은 정상을 움켜잡고 있었다.
도달한 것이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 형언할 수 없는 투명함.
풍요로움도 차가움도 이 세상의 복잡함도 혹은 우아함도,
정상에 서서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기쁨.
나는 그것을 가슴 가득 들이마시고, 산을 뒤로 했다.
멀리 높은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곳까지 와서, 나는 돌아보았다.
고고한 정상은 다시금 신비에 싸여,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언젠가 또다시 와라--- 그때는 꼭 가르쳐 줄 테니."
나는 분명 들었다.
그것은 환상이었을까?
그 모든 광경은 몽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언젠가 다시 저 고고한 산을 오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그 고고한 와인을 마실 때에, 나는 이 한마디를 하고 싶다.
아무리 높은 이상을 품고, 아무리 큰 기대를 가슴에 안았다 해도,
그 와인에는 결코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참--- 멋지다.
산에 오르내림이 큰 인생의 한가닥임을--- 너무 멋진 표현이다.
후지산이 보이는 이 별장에서 유언장을 공개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 나름대로 생각한 게 있었어.
녀석, 여기서 그걸 꺼낼 작정인가? 라고---
헌데 녀석이 풀어내는 말의 마법에 귀기울이고 있으니, 나조차 압도되는군.
역시 녀석은 괴물이야. 칸자키 유타카라는 남자는 말이지.
시즈쿠, 잇세.
진심으로 '제5사도'를 찾을 생각이라면, 각오해 둬.
목숨을 걸 각오를.
재미있군---
내 마음속에 어떤 망설임이 있든, 처음부터 난 와인에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어.
망설이고 있어, 나.
뭐? 잇세가 망설이다니? 도대체 뭘?
'제5사도'의 내용에 나오는 산은--- 마터호른이야.
알프스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 수많은 등산가의 목숨을 빼앗은 마의 산.
'제5사도'를 찾아내 그 맛을 표현하려면, 마터호른에 올라가야 하나 고민 중이야.
--- 그렇게 위험한 산에 등산가도 아닌 잇세가 올라간다는 게 말이 돼?
위험해서 망설이는 게 아니야, 난 와인에 목숨을 내놨어.
하지만 단순히 오르기만 해서는 찾아낼 수 없겠지.
만약 고생해서 마터호른까지 올라갔는데, 칸자키 유타카가 말한 와인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쩌면 난 영원히 '제5사도'를 찾지 못할지도 몰라.
잇세--- 왜 그래? 이렇게 불안해하는 잇세를 보긴 처음이야.
나도 내 평생 이렇게 불안감을 느끼는 건 처음이야.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아.
어쩌면 나는 내가 모르는 과거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내 기억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무언가'에 답이 있다고 한다면---
'12사도'를 둘러싼 싸움에선 절대 물러날 수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대체 잇세를 억누르는 트라우마가 무엇이기에--- 잇세를 끝모를 불안 속으로 내모는 것일까.
잇세의 절망스런 몸짓과 자존감이 안타깝다.
어? 알아낸 거예요? 유언장에 적힌 산이 어딘지?
응, 느낌이 딱 왔어. 마지막 말을 듣고.
'아무리 높은 이상을 품고, 아무리 큰 기대를 안고 올랐다 해도,
그 산에는 결코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 최초로 그 산의 등정에 성공한 영국인 등산가, 에드워드 휨퍼가 한 말이야.
그 산은---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있고---
알프스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고고한 산, 마터호른이야.
아버지는 '사도'를 고를 때 한 가지 룰 같은 것을 정해 놓은 것 같아.
와인은 마셔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마시지 않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이번에는 끝까지 같이 갈 수 없을지도 몰라.
나도 잘 모르지만 그런 예감이 들어.
유타카 선생님--- 잘 모르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당신은 두 아들을 어디까지 몰아붙여야 만족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