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DVD / 천계영 작가 코멘터리

2008. 5. 3. 10:54

마흔 조각의 작가 코멘터리를 모두 새겨두고 보면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디비디]는 결코 쉽게 쓰여진 작품이 아니라, 작가 코멘터리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양이 너무 많아서 죄다 적어내는 것은 힘들어서 꼭 읽어볼만한 것들로 추려보았다.

 

DVD라는 제목

[디비디]라는 제목은 '땀, 비누, 디디(Ddam, Venu, DD)' 세 주인공의 이니셜을 가지고 만들었다.

하지만 영화를 담는 매체로서의 DVD를 의미하기도 한다.

DVD의 매력 중 하나는 감독 코멘터리나 제작 과정을 담은 부록이 있다는 사실인데,

감독 코멘터리를 통해 관객은 자신과 감독의 작품에 대한 해석상의 일치와 차이를 경험함으로써 영화를 감상하는 자의 창작자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 의도로 사실 [디비디]라는 만화를 진짜 DVD 매체에 담으려고도 했었다.

페이지마다 작가의 코멘터리를 직접 음성으로 넣고,

제작과정(사실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도 영상으로 따로 보여주면서

[디비디]라는 만화제목과 DVD라는 매체가 만나 하나의 작품을 이루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만화계의 사정이나 여러가지 여건상 이 꿈을 이루기는 힘이 들었다.

그래서 아쉬운대로 이렇게 책 속에 작가 코멘터리 부분만을 따로 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실행되었다면 상당히 의미있는 작업이었을 것 같다. 언젠가 다시 시도를 해보면 좋을 듯.)

 

환상과 현실의 경계

[디비디]는 수많은 환상과 현실이 만나고 오버랩되는 만화이다.

그것은 스토리뿐만 아니라 캐릭터를 디자인하거나 단행본 표지를 그릴 때도 일관성있게 지켜지는 원칙이길 바랐다.

그래서 데뷔 이후 처음으로 현실 속 인물을 모델로 캐릭터를 만들어 보았다.

알려진대로 Sex Pistols라는 밴드 멤버들의 일부 이미지를 비누와 디디에게 적용시켰는데,

이 역시 환상과 현실을 뒤섞는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단행본 표지 그림을 신문지 위에 그리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신문지는 현실이고, 그 위에 그려진 캐릭터는 환상이다.

부분이나 전체 그 어디를 보아도 항상 환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만화를 만들고 싶었다.

 

톡,톡,톡 세 번 두드리기

'오즈의 마법사'의 여주인공 도로시는 자신의 고향인 캔자스로 돌아가기 위해 은구두(영화에서는 빨간 루비구두)를 '탁탁탁 세 번 두드리기'와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머리 속에서 하나의 기호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 같다.

작가는 땀이가 만들었던 환상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즉, 온 곳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손가락으로 탁탁탁 세 번 두드리는 동작을 사용했다.

물론 다른 신화나 동화에서도 세 번 두드리는 행위로 중요한 장치를 작동시키기도 하지만,

작가에게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역시 '오즈의 마법사'였다.

 

젖소

많은 동물이 등장하는 만화 [디비디].

그 중에서도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동물은 누가 뭐래도 젖소이다.

이는 젖소가 [디비디]의 주제에 걸맞는 영적인 동물이라서라기 보다는, 작가가 그냥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Pink Floyd의 앨범 'Atom Heart Mother'의 자켓과 음악에서 매우 강한 인상을 받은 이후로 젖소는 작가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동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젖소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고양이 '용근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용근이를 키우면서 그 무늬를 가진 동물들- 젖소, 판다, 범고래, 펭귄 등- 에게 더욱 큰 애정을 갖게 되었고, 그 무늬를 모티브로 해서 용근이를 위한 탄생설화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탄생설화는 결국 [디비디]에서 젖소와 범고래 사이에서 판다가 태어난다는 이야기로 새롭게 구성된다.

(개인적으로 제일 그럴 듯하고 재미있었던 이야기였다.)

 

땀이의 부츠

항상 부츠를 신고 다니는 땀이는 동화 '장화 신은 고양이'가 모델이다.

땀이의 약간 치켜올라간 눈도 조금은 고양이 같은 느낌을 주려고 디자인했다.

고양이가 장화를 신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냥 고양이일 뿐이지만,

장화를 신음으로써 이야기 속의 주인공(환상)이 될 수 있었다.

보통의 신발보다 더 무겁고, 신체를 최대한 많이 가리는 형태로서의 땀이의 부츠는,

감추어진 존재나 풀리지 않은 문제를 상징한다.

그래서 후에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고, 자유를 얻은 땀이가 인도로 떠날 때에는

무거운 부츠를 벗고 가벼운 샌들을 신게 되는데,

그 샌들은 바로 땀이가 이 세계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

비누로부터 주어진다.

(복선을 찾아내는 즐거움)

 

부엉이

부엉이는 땀이에게 '환상이 아니길 바라는 것일수록 환상이다'라는 결정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이런 중요한 말은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 부엉이를 등장시키게 되었다. 부엉이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수호동물이기도 하고, 작가가 어렸을 때 TV에서 재미있게 보았던 어린이 인형극 '부리부리 박사'의 박사님이기도 한다.

(나도 재미있게 보았는데---)

 

세끝말 무지개 아파트

세끝말은 '세상의 끝 마을'이고,

거기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길목이 되는 아파트가 있다면,

그 이름은 당연히 '무지개 아파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지개라는 것은 두 개의 다른 세계를 잇는 다리로 자주 상징되곤 한다.

유명한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주제곡 'Over the Rainbow'의 가사는 그 상징을 매우 직접적으로 노래했다.

 

무지개

비누는 이전에 한 여자애를 무지개 너머로 떠나보낸 이후, 자신도 그 아이를 따라 무지개 너머로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생일선물로 인공 무지개를 만들 수 있는 분무기를 받고 싶어한다. 그것은 땀이도 언젠가 그 아이처럼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표현이기도 하고, 땀이가 떠나면 자신도 따라서 가고 싶다는 의지이기도 한다.

(무지개는 환상적인 소재의 시작점에 있다.)

 

누구나 환상을 본다

땀이가 가끔 '이상한 꿈'을 꾼다고 고백할 때,

비누와 디디는 그 '이상한 꿈'이 사실은 '환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닥을 뚫고 꽃들이 솟아오르던 모습도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못 본척하고는 그냥 이렇게 대답한다.

'누구나 그래---'.

누구나 환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작가의 믿음이기도 하고,

그 믿음이 있었기에 [디비디]라는 만화를 이렇게 만들 수 있었다.

 

DD라는 이름

디디의 본명은 조삼식.

하지만 왜 삼식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디디라는 예명을 사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만화 속에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DD는 Diddy를 같은 발음의 알파벳으로 쓴 것인데, Diddy는 미국의 유명한 래퍼 Puff Daddy의 애칭이다. 따라서 DD라는 이름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 Diddy가 있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뿌리에서 Daddy(아빠)를 찾을 수 있다. 작가는 디디가 사실은 자신의 아빠를 매우 그리워하고 있음을 이름 속에도 암호처럼 숨겨두고 싶었다.

(그렇게 깊은 뜻이^^)

 

비너스가 남자였다면

원래 이 장면은 훨씬 인상적이고 아름답게 묘사가 되었어야 하는데,

당시 컨디션 난조로 제대로 표현하지를 못했다.

작가로서 [디비디]에서 가장 아쉬운 장면이기도 한다.

'비너스가 남자라면 그 이름은 분명히 비누였을 거야'라는 이 대사는

연재 시작 전부터 정해져 있었고,

그래서 굳이 비누의 영문 이름을 Vinu나 Veenu가 아닌 Venu로 적어온 것이다. 

Venu에 s만 더하면 Venus가 되니까.

그리고 Binu나 Beenu로 적지 않은 것은

주인공들의 이름을 이용해서 DVD라는 제목을 꼭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 인도인가?

만약 지구상에서 한 나라를 콕 찍어 그 나라에 환상들이 산다고 우긴다면,

어느 나라가 제일 그럴 듯할까?

그 답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인도였다.

때마침 인도 관광청에서 벌이고 있는 캠페인에서도 인도는 '환상의 나라'였다.

현실에서 말하는 '환상의 나라'란 '환상적인 나라'를 의미하겠지만,

작가는 그것을 '환상이 사는 나라'로 해석했다.

[디비디]의 인도는 보통의 방법으로는 갈 수 없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 현실의 인도에 도착하게 된다.

환상이 사는 인도에 가기 위해선 전철이나 버스를 타야 한다.

가는 길에 '날려버린 문서들'이나 '사라진 양말 한짝들'이 사는 나라도 거치게 되는데,

이것들은 현실과 환상의 중간쯤 되는 존재들이다.

한때는 현실이었지만, 사라져버리고 없는 지금,

그것들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은 증거가 없는 것은 믿지 않으므로,

현실과 환상 사이를 떠돌게 된다.

 

샌들 앞굽

땀이가 인도로 떠날 때 신고 갈 샌들은 이 만화에서 의미상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신발디자인에 대해 많은 고심을 했다. 자료를 찾던 중 발견한 것이 소의 발처럼 앞이 둘로 살짝 갈라진 특이한 디자인의 샌들이다. 이 샌들은 이 만화 전반에 걸친 인도로의 지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에 참으로 적합해 보였다.

(꼼꼼한 작가의 태도를 칭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