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을
내가 잊어버리고 싶어도
결코 잊어버릴 수도,
외면해버릴 수도 없는 아픔을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끌어내어 보듬어준다면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을 지녔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내 마음의 안식처로 삼을 수 있다.
천일야화 5권을 읽으면서 나는 그렇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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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갑자기 궁을 비워도 괜찮을까요?
기분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 건 너잖아. 어차피 지금은 나보다 자파르가 나서는 편이 좋아.
자파르 님--- 신뢰받고 계시는군요.
자파르는 간교한 정치꾼들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마스루르는 적군과 암살자로부터 나를 지켜주지.
그리고 세하라 너는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지켜줬다.
항상 내 옆을 떠나지 않고 나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해줄 수--- 있어?
네.
규레쉬(올리브 기름을 몸에 바르고 상대를 쓰러뜨리는 레슬링의 원조격인 전통 경기로 양쪽 어깨가 땅에 닿으면 지고, 승부가 날 때까지 시간은 무제한이다.) 시합을 핑계로 세하라와 해가 질 때까지 몸을 부대꼈던 샤리야르는 모처럼만에 휴식을 얻은 기분이다. 그러나 돌아선 민심을 마주 대하는 샤리야르는 후회스럽기만 하고---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세하라는--- 위로한다.
한 마디도 부정할 수가 없군---
사람은 변할 수 있었요. 중요한 건 지금부터예요.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제가 믿어요!
아무도 안 믿어도--- 제가 당신을 믿어요.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목욕할 수 있는 하맘(이슬람 식 전통 증기식 목욕탕. 타월로 때를 미는 방식으로 목욕을 한다는 것이 한국과 유사하다.)을 로마 사람이 만든 거 아시죠?
과거 로마인들은 이런 목욕탕을 지성을 나누는 사교의 장소로 이용하곤 했답니다.
흥, 목욕하러 왔으면 때나 밀고 가지, 지성은 무슨--- 잠깐!
너 지금 내가 긴장 풀어진 틈을 타서 은근슬쩍 이야기 시작하려고 했지?
매번 이런 식이잖아!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조곤조곤 썰 풀어서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들어놓고,
결국 다 네 맘대로 사람 조종하듯 주무르는 게 네 특기 아냐?
아무 말 마라---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하지 마라---
(삐쳐서 돌아앉은 세하라)
아, 진짜 신경쓰이게!
나 기분 전환하자고 놀러 와놓고--- 왜 이렇게 못살게 굴어~!
남을 돕는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아지는 건 없어요.
너 진짜 착한 녀석이구나?
걔들이 도와달라고 사정한 것도 아닌데 왜 네가 먼저 나서서 난리야?
샤리야르 님 때문에 시작된 일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신이 초래한 일에 책임을 지세요.
화가 난 샤리야르가 세하라를 벽에 밀어붙이고 목을 쥔다.
마스루르가 샤리야르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젓는다.
쳇! 기어오르면--- 죽여버린다.
믿어주기를 바라시잖아요--- 믿음은 증명하는 겁니다.
당신이 술탄이 되던 그 날에---
사람들은 영웅이 다스리던 나라에 살게 되었다며 기뻐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들을 배신했지요.
이제 그들은 폭군이 다스리는 나라에 살고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고통이 어떤 건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오늘 도와주신 것--- 정말 감사했습니다.
자파르, 너도 들어와라--- 로마산 입욕제라고 해서 사와봤다.
이건 너무 향이 강한 거 아냐?
그나저나 여기는 꽤 오랫동안 안 쓰지 않았나?
(파티마와 함께 유희를 즐기던 미소년들이 샤리야르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그때 그들의 피로 흥건하게 물들어서 암울하게 버려졌던 목욕탕)
샤리야르--- 너--- 괜찮은 거야?
궁중시인 세하라--- 지금 돌아왔습니다.
괜찮아.
궁중시인--- 전에 하려고 했던 그 이야기--- 마저 해봐.
제 얘기는 듣기 싫으시다면서요.
시작한 건 끝내야지--- 난 궁금한 건 못 참는다.
음--- 무슨 얘기냐면요---
다섯 번째 이야기--- [소크라테스 인 러브]
먼 옛날 저 너머 아테네에서는 여러 사람이 함께 목욕할 수 있는 목욕탕과 체력단련장에서
미소년들과 철학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즐기는 유쾌한 현자가 있었지요.
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그의 파이디카(당시 그리스에서는 연상의 남자 에라스테스와 연하의 미소년 파이디카의 원조교제가 흔한 일이었다.) 알키비아데스의 슬픈 사랑이야기.
알키비아데스, 자네는 아름다워.
총명한 머리--- 거기에 원한다면 뭐든 가질 수 있는 재산과, 최고 권력자의 후원도 있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들에 의해 자네를 그르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해.
그래서 당신을 원해요.
만약 나에게 당신의 지혜를 나누어준다면---
나는 당신만을 위한 꽃이 되어 기꺼이 당신 손에 꺾이겠어요.
알키비아데스, 나는 자네의 아름다움에 비할 정도로 지혜롭지 못하다네---
굳이 말하자면 내 외모만큼이나 보잘 것없지.
절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내가 아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고,
누구도 내게 주지 못한 것을 줄 수 있어요!
내가 아는 건 오직 내가 무지하다는 것 뿐이라네---
자네의 값진 선물의 대가로 줄 지혜 따위는 내게 없네.
그렇지만 너를 사랑하는 아테네 시민들의 칭찬이,
너를 망치지 않도록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
소크라테스--- 당신이 영원히 내 곁에서 멀어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자네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자네의 곁을 지키겠네---
알키비아데스는 훗날 그날 밤의 경험을 회상하길---
독사에게 영혼을 물리는 경험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쯤 되는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데--
그 당시 자유 시민들 사이에서는 남성 간의 동성애는 찬미의 대상이었어요.
남녀 간의 성교는 육체의 교접을 통해 육체를 낳는 행위에 불과하지만,
남성 간의 성교는 영혼의 교접을 통해 영혼을 낳는 행위라고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런 문화적 분위기는 여성이 배제된 남성 위주의 문화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되는 현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
음--- 영혼의 교감이라--- 그렇게 좋단 말인가?
어디까지나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니까요.
으음--- 이번 이야기의 교훈, 잘 알았다!
궁금하지 않나? 영혼의 교감?
마, 마스루르 님과 하시죠?
죽을래~ (탕 속으로 세하라를 끌고 들어가는 샤리야르)
이러지 마세요~!
왜 이리 앙탈이야~! 애당초 그런 얘길 꺼낸 목적이 있을 거 아냐?
목적 같은 거 없어요.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다니까요!
5권에 실린 다섯 번째 이야기[소크라테스 인 러브]는 놀라운 이야기였고,
왠지 세하라 자신도 아직 알아채지 못한 세하라의 마음이 전달되는 듯한 소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