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이랑

고종석의 언문세설 3 / 디귿

2013. 10. 23. 15:46

타협하지 않는 문장가 고종석 <언문세설> 연재 3화 - ㄷ(디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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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는 내 감옥이다. 오래도록 나는 그 감옥 속을 어슬렁거렸다.
행복한 산책이었다.
이 책은 그 산책의 기록이다."

 

 

은 한글 자모의 셋째 글자다. 이 글자의 이름은 ‘디귿’이다. 북한에서는 ‘디읃’이라고 부른다. 또 ‘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글자가 나타내는 소리는 국제음성문자로는 /t/로 표기되는 치조(잇몸) 파열음이다. 한국어의 다른 무기 파열음들과 마찬가지로, 이 ㄷ 소리는 울림소리 사이에서는 그 자신도 울림소리로 변해 [d]로 실현된다. ‘두둥실’의 첫 번째 ㄷ은 [t]로 실현되지만, 두 번째 ㄷ은 [d]로 실현된다. 비록 한국어 화자의 귀에는 일반적으로 그 두 ㄷ 소리의 차이가 구별되지 않지만. 이 ㄷ 글자의 꼴은 ㄴ에 획을 하나 더 그어서 만들어졌다. 훈민정음의 창제자들이, 이 ㄷ이 나타내는 소리가 ㄴ이 나타내는 소리와, 그 나는 자리하고 입 모양은 같되 더 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어에서 이 ㄷ 소리는 특별한 환경에 놓이면 ㄹ 소리로 변한다. 그런 ㄷ을 포함하는 용언(풀이씨)을 흔히 ‘ㄷ불규칙용언’이라고 하고, ㄷ불규칙용언에서 일정한 조건하에 ㄷ이 ㄹ로 변하는 현상을 ‘ㄷ불규칙활용’이라고 한다. ‘ㄷ벗어난끝바꿈’ 또는 ‘ㄷ변칙활용’이라고도 하는 ㄷ불규칙활용이란 어간이 ㄷ으로 끝나는 용언 가운데 일부가 뒤에 홀소리로 시작되는 씨끝(어미)이나 선어말어미를 만났을 경우에 ㄷ이 ㄹ로 바뀌어 소리 나는 현상이다. ㄷ불규칙활용을 하는 용언이 ㄷ불규칙용언이지만, ㄷ불규칙활용을 하는 형용사는 없으니, 즉 ㄷ불규칙활용을 하는 용언은 모두 동사이니, ㄷ불규칙동사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묻다(질문하다), 걷다(보행하다), 내닫다, 긷다, 눋다, 싣다 같은 동사들이 ㄷ불규칙동사들이다. 이런 동사들의 어간 뒤에 홀소리로 시작되는 어미나 선어말어미가 오면, 예컨대 ‘어/아’가 오면, ‘묻어’ ‘걷어’ ‘내닫아’ ‘긷어’ ‘눋어’ ‘싣어’가 아니라 ‘물어’ ‘걸어’ ‘내달아’ ‘길어’ ‘눌어’ ‘실어’가 된다. 물론 ‘묻다’나 ‘걷다’의 경우에 ‘묻어’ ‘걷어’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의 ‘묻다’는 ‘의문을 제기하다’의 뜻이 아니라 ‘매장하다’의 뜻이고, ‘걷다’는 ‘보행하다’의 뜻이 아니라 ‘말아 올리거나 치우다’의 뜻이다. 즉 이때의 ‘묻다’와 ‘걷다’는 앞에서의 ‘묻다’와 ‘걷다’의 동음이의어다. 그때의 ‘묻다’나 ‘걷다’는 불규칙동사가 아니라 정칙동사다. 그러니까 어간이 ㄷ으로 끝나는 동사라고 해서 모두 ㄷ불규칙동사는 아니다. ‘믿다’ ‘돋다’ ‘굳다’ 같은 동사들도 정칙동사들이다. ‘믿어’ ‘돋아’ ‘굳어’ 따위로 활용하는 것이다.

 

ㄷ불규칙동사 ‘걷다’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말에 ‘거닐다’가 있다. 그러나 ‘걷다’가 대체로 어떤 목적을 지니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비해, ‘거닐다’는 목적이 없이 한가롭게 한 장소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소풍 나온 사람들이 공원을 거닌다’를 ‘소풍 나온 사람들이 공원을 걷는다’로 바꿀 수는 있다. ‘걷다’도 ‘거닐다’처럼 걷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닐다’는 거니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김 일병은 내무반을 향해 걸었다’를 ‘김 일병은 내무반을 향해 거닐었다’로 바꿀 수는 없다. 바꾸면 어색하다.

 

어간이 ㄷ으로 끝나는 동사로는 이밖에도 ‘뜯다’ ‘받다’ ‘믿다’ ‘돋다’ ‘쏟다’ ‘굳다’ ‘뻗다’ ‘겯다’ ‘듣다’ ‘붇다’ ‘내닫다’ ‘깨닫다’ 따위가 있다. ‘겯다’ ‘듣다’ ‘붇다’ ‘내닫다’ ‘깨닫다’는 ㄷ불규칙동사이고, 나머지는 정칙동사다. ‘서로 어깨를 결어라’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장마가 계속되면서 강물이 크게 불어났다’ ‘돌격 나팔소리가 들리자 나폴레옹의 군대는 적진을 향해 일제히 내달았다’ ‘선과 악의 경계가 늘상 또렷한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에서처럼 ‘겯다’ ‘듣다’ ‘붇다’ ‘내닫다’ ‘깨닫다’의 어간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 ‘결’ ‘들’ ‘불’ ‘내달’ ‘깨달’로 변하는 것이다. 우리말에는 ‘들다’ ‘불다’라는 동사도 있으므로, 아무런 맥락이 주어지지 않은 채 ‘들었다’ ‘불었다’라고 말하면, 그것이 ‘듣다’나 ‘붇다’의 과거형인지 ‘들다’나 ‘불다’의 과거형인지 알 수 없다. ‘내닫다’라는 동사는 “내닫기는 주막집 강아지라”는 속담에도 보인다. 무슨 일이 있기만 하면 금세 나서서 무게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이 ‘주막집 강아지’라는 말은 전직 대통령들의 설전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바 있다.

 

어간이 ㄷ으로 끝나는 형용사로는 ‘곧다’와 ‘굳다’가 있다. ‘굳은 의지’ 할 때의 ‘굳다’는 형용사이지만, ‘땅이 굳었다’ 할 때의 ‘굳다’는 동사다.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에서 ‘굳다’는 형용사일까, 동사일까? 그러니까 그것은 형용사(상태동사) ‘굳다’의 현재 관형형일까, 아니면 동사(동작동사) ‘굳다’의 과거 관형형일까? 조금 혼란스럽다. 일반인들의 언어 감각으로는 형용사인 듯싶다. ‘굳은 땅’의 ‘굳은’은 직관적으로 ‘이미 굳어 있는’이라기보다 ‘단단한’의 의미로 다가오는 듯하다.

 

받침소리 ㄷ은 그 다음에 연구개음 ㄱ(ㄲ, ㅋ)이나 양순음 ㅂ(ㅃ, ㅍ)으로 시작되는 말이 오면 그 ㄱ(ㄲ, ㅋ)이나 ㅂ(ㅃ, ㅍ)에 이끌려 ㄱ이나 ㅂ 소리로 발음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걷기’를 [걱기]처럼 발음한다거나 ‘듣보다’를 [듭보다]처럼 발음하는 경우가 그렇다. 정서법상으로 ㄷ 받침을 가지고 있는 말들이 아니더라도, 음절 끝에서 ㄷ 소리로 변하는 받침을 가지고 있는 말들의 경우에는 이와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예컨대 ‘벗기다’는 /벋기다/를 거쳐서 [벅기다]처럼 소리 나고, ‘빛깔’은 /빋깔/을 거쳐 [빅깔]처럼 소리 나고, ‘낱개’는 /낟개/를 거쳐 [낙개]처럼 소리 난다. 또 ‘밑바닥’은 /믿바닥/을 거쳐 [밉바닥]처럼 소리 나고, ‘꽃피다’는 /꼳피다/를 거쳐 [꼽피다]처럼 발음된다. 그러나 이렇게 받침소리 ㄷ이 뒤에 오는 연구개음이나 양순음에 동화돼 ㄱ이나 ㅂ으로 변동하는 현상은 필연적이 아니라 임의적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소리 날 수도 있고, 소리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발음을 명료하게 해야 하는 자리에서라면 이런 소리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가까운 사이에 마음을 풀어놓고 말할 때 이런 음운 규칙이 개입한다. 그것은 일본어에서 본질적으로 /ts/에 가까운 소쿠옹(促音: っ)이 뒤에 오는 자음에 따라 [k]나 [p]나 [s]등으로 꼭 동화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ㄷ과 관련된 필연적인 규칙도 물론 있다. 예컨대 받침소리 ㄷ이 ㄴ이나 ㅁ 같은 콧소리 앞에 오면 그 콧소리에 동화돼 필연적으로 콧소리 ㄴ으로 변한다. 그래서 ‘묻는다’ ‘내닫는다’ ‘걷는다’ ‘뜯는다’ ‘받는다’ ‘듣는다’ ‘뻗는다’ ‘깨닫는다’는 각각 [문는다] [내단는다] [건는다] [뜯는다] [반는다] [든는다] [뻔는다] [깨단는다]로 소리 난다. ‘맏며느리’도 [만며느리]로 소리 난다.

 

현대 한국어에서 이 ㄷ 소리는 조사, 어미, 접미사 등 종속적 관계를 지닌 말들이 ㅣ 모음으로 시작할 경우에 그 앞에서 ㅈ으로 변한다. 그래서 ‘굳이’는 [구지]로 소리 나고, ‘해돋이’는 [해도지]로 소리 나며, ‘가을걷이’는 [가을거지]로 소리 나고, ‘등받이’는 [등바지]로 소리 난다. 파열음 ㄷ이 파찰음 ㅈ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른바 구개음화다. 이것은 형태소의 경계에서 특별한 조건 아래 ㄷ이 ㅈ으로 변하는 현대 한국어의 공시적(共時的) 음운 규칙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한 형태소 안에서도 시간의 추이에 따라 ㄷ이 ㅈ으로 변한 통시적(通時的) 현상이 있었다. 예컨대 ‘뎌’는 ‘저’로 변했고, ‘뎌러ᄒ다’는 ‘저러하다’로 변했고, ‘덥시’는 ‘접시’로 변했고, ‘둏다’는 ‘좋다’로 변했고, ‘디니다’는 ‘지니다’로 변했고, ‘디다’는 ‘지다’로 변했다. 현대어에서 ㅣ 모음이나 ㅣ 선행모음 앞에서 ㄷ 소리가 드문 데 비해 중세어에서는 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어에서 ㅣ 모음 앞의 ㄷ을 포함하고 있는 말로는 마디, 바디, 진디, 잔디, 반디, 오디, 분디, 아디, 관디[冠帶], 산디[山臺], 어디, 더디, 본디, 내딛다, 디디다, 무디다, 견디다, 엎디다, 더디다 따위가 있을 뿐이다. 이 ㄷ이 구개음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단어들이 ㄷ 뒤에 본디 지니고 있던 모음이 ㅣ 모음이 아니었던 덕이다. 그 모음이 ㅣ 모음으로 변했을 때는 이미 한국어의 음운사에서 ㅣ 모음 뒤의 ㄷ에서 ㅈ으로의 구개음화 물결이 끝난 뒤여서, ㄷ 소리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는 한국어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형태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문어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문장이 이 ‘다’로 끝난다. 위의 문장들이, 그리고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문장도, ‘다’로 끝난다. 그렇다. 이 ‘다’는, 우선 받침 없는 체언에 붙어 사물을 지정하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형 서술격조사다. ‘저기 서 있는 사람이 우리 누나다’ ‘아인슈타인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다’ ‘너는 바보다’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사회다’ 같은 문장에서 이런 용법으로 쓰이는 ‘다’가 보인다. 체언이 받침으로 끝날 경우에 이 ‘다’는 ‘이다’로 변한다. ‘저기 있는 사람이 우리 형님이다’ ‘백석은 위대한 시인이다’ ‘네가 우리 대장이다’ ‘피노체트 정권은 독재정권이다’ 같은 문장에서처럼.

 

실은 체언이 받침 없이 끝나더라도 ‘이다’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럴 때는 문어성이 더 또렷해진다. ‘저기 서 있는 사람이 우리 누나이다’

‘아인슈타인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이다’ ‘너는 바보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사회이다’에서처럼. 그러니, ‘다’는 ‘이다’가 줄어든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든 ‘이다’든 학교 문법에서는 그것을 서술격조사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조사라면 아무튼 특이한 조사다. 조사에 서술의 힘이 있다니, 참.

 

이 조사 ‘다’와 본질적으로는 똑같되, 학교 문법에서는 범주를 구별해 ‘어미’라고 가르치는 ‘다’가 있다. 이 ‘다’는 용언의 어간에 붙어서 기본형을 나타내는 어미다. 이 ‘다’는 ‘오다’ ‘가다’ ‘자다’ ‘막다’ ‘먹다’ ‘서다’ ‘앉다’ ‘울다’ ‘일하다’ ‘공부하다’에서처럼 동사 어간에 붙기도 하고, ‘좋다’ ‘나쁘다’ ‘싫다’ ‘옳다’ ‘그르다’ ‘아름답다’ ‘깨끗하다’ ‘청명하다’에서처럼 형용사 어간에 붙기도 한다. 우리말에서 형용사의 기본형은 현재형과 일치하므로 형용사의 어간에 붙는 ‘다’는 현재형 종결어미이기도 하다. ‘좋다’ ‘나쁘다’ ‘싫다’ ‘옳다’ ‘그르다’ ‘아름답다’ ‘깨끗하다’ ‘청명하다’는 기본형인 동시에 현재형이다. 물론 동사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오다’ ‘가다’ ‘자다’ ‘일하다’는 기본형일 뿐 현재형이 아니다. 이 동사들의 현재형은 ‘온다’ ‘간다’ ‘잔다’ ‘일한다’이다. 그러니까 동사의 어간에 붙어서 현재형을 만드는 종결어미는 우리가 ㄴ 항목에서 살핀 ‘ㄴ다’다. 여기서 ㄴ을 선어말어미로 분리해낼 수도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다’는 아무런 시제도 표시하고 있지 않다. 형용사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에서 ‘다’가 표시하는 것은 서술 종결이지 현재 시제는 아니다. ‘좋다’ ‘나쁘다’ ‘옳다’ ‘아름답다’에서 현재 시제를 표시하는 것은 제로 형태다. ‘좋-’ ‘나쁘-’ ‘옳-’ ‘아름답-’ 자체가 현재형인 것이다. 그것들이 과거 시제가 되면 ‘좋았다’ ‘나빴다’ ‘옳았다’ ‘아름다웠다’에서처럼 과거 시제 표지 ‘-았/었-’이 들어간다. 동사 ‘온다’ ‘간다’ ‘잔다’ ‘일한다’에서도 그것이 현재(또는 현실이나 구체)라고 표시하는 것은 ‘ㄴ’이지 ‘다’는 아니다. ‘막았다’ ‘먹었다’ ‘왔다’ ‘갔다’ ‘잤다’ ‘일했다’(‘일하였다’)에서 과거를 표시하는 것이 ‘-었/았/였/ㅆ-’이지 ‘다’가 아니듯. 아무튼 이 ‘ㄴ다’ 역시 결국은 ‘다’로 끝난다. 그러니 우리말에선 형용사든 동사든 그 기본형 어미나 서술 종결형 어미는 ‘다’인 것이다.

 

 

 

 

한국어의 특색은 서술어가 문장 맨 끝에 온다는 것이고, 그 서술어가 동사든 형용사든 그것들의 문어체 종결어미가 ‘다’이니, 한국어 문장이 대체로 ‘다’로 끝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어를 너무 밋밋하게 만든다. 문체를 중시하는 작가라면 ‘-네’ ‘-군’ ‘-어’ ‘-거든’ 등 구어체 종결어미를 다양하게 실험하는 한편, 문장의 끝머리에 서술어 이외의 성분을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한국어에 변화를 줄 수 있다. ‘그렇다’를 ‘그러네’ ‘그렇군’ ‘그래’ ‘그렇거든’ 등으로 바꾼다든지, ‘대한민국은 자유로운 사회다’를 ‘자유로운 사회다, 대한민국은’으로 바꾼다든지 해서 말이다.

 

ㄷ을 연이어 쓴 ㄸ은 ㄷ보다 센 소리를 나타낸다. 이 글자의 이름은 ‘쌍디귿’이다. 북한에서는 ‘된디읃’이라고 부른다. 국제음성문자로는 /t’/로 표기한다. ㄸ으로 시작하는 말들은 죄다 고유어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한자음에는 ㄸ으로 시작하는 것이 없다. 뚜껑, 딸, 딸기, 따뜻하다, 똬리, 땅, 뚝배기, 뜀뛰기, 띠앗머리, 떡갈나무, 뜨내기, 뜸, 뜨개질, 땔감, 땅울림, 따로국밥, 뛰다, 따르다, 뜯다, 뜰, 뜻, 띠다, 땋다, 딸깍발이, 땀땀이, 땃두릅, 땅콩, 띠, 땡볕, 떠꺼머리, 떡국, 뙈기, 또랑또랑, 뗏장, 또렷또렷, 때때옷, 따오기 같은 아름다운 우리말들이 사전의 ㄸ부(部)를 채우고 있다. 부뚜, 부뚜막, 따따부따, 이따 같은 말에도 ㄸ이 있다. ‘부뚜’는 곡식의 쭉정이를 날리는 데 쓰는 돗자리다. 풍석(風席)이라고도 한다. ‘띠’라는 말의 여러 의미 가운데 하나는 태어난 해를 12지(支)의 동물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쥐띠, 소띠, 범띠, 토끼띠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남의 딸을 높여 말할 때는 ‘따님’ ‘영애’라고 말하고, 자기 딸을 낮춰 말할 때는 ‘딸년’ ‘딸자식’ ‘딸아이’ ‘여식’ ‘여아’라고 한다.

 

‘뚜껑’과 ‘덮개’는 비슷한 말이지만, 뚜껑은 안에 빈 공간을 지닌 그릇의 입구 부분을 덮는 물건을 지칭하는 반면에, 덮개는 안에 빈 공간이 있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어떤 물체의 윗부분 전체를 덮는 물건을 총칭한다. 그래서 솥뚜껑은 있지만 솥덮개는 없고, 자동차 덮개, 이불 덮개는 있지만 자동차 뚜껑, 이불 뚜껑은 없다.

 

‘뚜껑’과 ‘덮개’ 얘기를 하다 보니 동사 ‘닫다’로 생각이 내닫는다. ‘빨리 가다, 달리다’의 뜻인 ㄹ불규칙동사 ‘닫다’(‘내닫는다’의 ‘닫다’) 말고, ‘열다’의 반의어인 정칙동사 ‘닫다’ 말이다. ‘달아나다’는 ㄹ불규칙동사 ‘닫다’에서 파생한 말이고, ‘닫아걸다’는 정칙동사 ‘닫다’에서 파생한 말이다. 그 정칙동사 ‘닫다’의 ㄷ 받침은 폐쇄성의 상징이다. ‘열다’의 ㄹ 받침이 개방성의 상징이듯이.
ㄷ은 한글 자모의 세 번째 글자다. 셋은 완성의 숫자다. 셋 이상은 ‘다’다. ‘몽땅’ ‘모두’의 의미인 ‘다’ 말이다. ‘셋’은 ‘다’다. ㄷ은 ‘다’다. 그리고 ‘多’다. ㄷ은 모든 것이다. 특히 성스러운 모든 것이다.

 

숫자 ‘셋’에 대한 명상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된 것이다. 삼위일체를 원리로 내세우는 정통 기독교는 물론이고, 피타고라스 학파나 플라톤 철학에서도 이 숫자는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다. 사실, 사람들이 ‘셋’이라는 숫자를 성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별난 일은 아니다. 숫자 ‘셋’은 공간(3차원)과 시간(과거, 현재, 미래)과 행위(시작, 중간, 끝)와 가족(아버지, 어머니, 자식)과 논리(정-반-합, 대전제-소전제-결론)와 개인사(태어남, 삶, 죽음)와 세계사(창조, 세계, 종말)의 구조를 이루는 숫자다. 그러니까, 거의 모든 종교에서 ‘셋’과 관련된 상징 개념들이 발견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힌두교의 브라마와 비쉬누와 시바,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와 이시스와 호루스, 그노시스 학파의 정신과 말씀과 지혜, 기독교도의 성부와 성자와 성신…… ‘셋’은 흔히 둘의 연장으로 이해된다. 가족은 부부의 연장이다. 3차원은 평평한 세계, 즉 2차원의 개념 뒤에 온다. 현재는 오직 과거와 미래(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에 의해서만 정의된다.

 

사람들이 분열과 이원성과 마니교적 양분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숫자 ‘셋’을 통해서다. 숫자 ‘셋’은 대립되는 한 쌍에 새로운 차원을 보탠다. 선과 악이라는 본원적 대립을 선도 악도 아닌 참은 간단히 초월하면서 참과 거짓이라는 새로운 대립을 창출해낸다. 참과 거짓 사이의 대립을 참도 거짓도 아닌 미는 간단히 초월하며 미와 추라는 새로운 대립을 창출해낸다. ㄱ과 ㄴ 사이의 대립을 ㄱ도 ㄴ도 아닌 ㄷ은 간단히 초월하며 ㄷ과 ㄹ이라는 새로운 대립을 창출해낸다. 그 ㄷ과 ㄹ의 대립은 닫힘과 열림의 대립이다.

 

 

 

‘셋’은 또 위험한 양분 상태를 초월하거나 또는 그 양극단에 균형을 잡아주는 파열의 숫자다. 그 덕분에 숫자 ‘셋’은 모든 성스러운 것을 자동적으로 구현하는 판박이 숫자가 되었다. 그것은 신의 숫자이고, 사제의 숫자이며, 희생의 숫자이고, 헌주(獻奏)의 숫자이다. 그것은 너무나 보편화돼서 동화에는 흔히 곰 세 마리나 화살 세 개가 나오고, 노래에는 흔히 북 세 개와 어린이 셋이 나온다. 그래서 결국 숫자 ‘셋’은 종교적·신화적·민중적 전통을 상기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의무적 참조항이 되었다. ㄷ은 신의 글자이자, 성스러움의 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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