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불꽃이 만났습니다.
연... 연우라고 하옵니다. 연기 연에, 비 우를 쓰옵니다.
혹여 보슬비란 뜻이냐?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해를 품은 달...
무슨 말씀이온지...
왕은 해, 왕비는 곧 달이라 하오.
이것은 백산호를 입에 문 봉황이 적산호를 가슴에 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소.
백산호는 하얀 달, 적산호는 붉은 해를 뜻하오.
내 마음은 이미 연우낭자를 왕비로 삼았으니 그에 대한 정표로 이 봉잠을 보내는 것이오.
연우 낭자가 나를 믿고 내일부터 시작되는 세자빈 간택에 최선을 다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소.
그렇게 나에게로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소.
그리고 이런 나를 평생 옆에서 보필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담았소.
해와 달이 함께 떴습니다.
너에게로 흐르는 내 마음이 보이느냐?
달 여울에 어른거려 보이지 않사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냐, 아니면 아니 보겠다는 말이냐?
너를..., 안으면 아니 되는 것이냐?
남겨두고 가시는 걸음이 무거우실까 저어되어 옷고름을 여미겠나이다.
남겨두고 가지 않을 것이다. 너를 데려갈 것이다.
....
세상 인연이 어찌 좋은 인연만 있다 하더이까.
찰나에 불과한 인연에 이름을 명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거두어 주시옵소서.
무어라 하는 것이 좋을까...
이어져서는 아니 되는 인연이옵니다.
찰나의 인연이어야 하옵니다.
네가 달을 닮았느냐, 달이 너를 닮았느냐... 내 너를 월이라 이르겠노라.
... 나는 우리 인연의 시작이라 하였다. 그러니 그냥 갈 수는 없다.
너에게 정표를 받아가고 싶느니.
소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상감마마께옵서 이름으로 하사하신 저 달이 전부이옵니다.
그러면 정표로 그대의 전부인 저 하늘의 달을 받아 가겠노라.
너에게 받아가는 저 달에,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묶어두겠노라.
무엇을 보시옵니까?
그리움... 그 가엾은 댕기를 풀어주지 못했어.
그런 채로 보내고 말았어. 그런데 살아 있는 너조차 이대로...
나란 놈은 과거에도, 지금도 아무것도 못 한다. 그런데도 임금이란다.
해가 달에게 속삭입니다.
산 그림자는 밀어도 나가지 않고 달빛은 쓸어도 다시 생긴다 하더니, 너도 그랬다.
네 달빛은 아무리 내 마음, 내 머리에서 쓸어내려 하여도 쓸려지지 않았다.
넌 아니었느냐?
네 향기 때문이냐? 내가 예전부터 가슴 설레어 하는 난향 때문이냐?
그것도 아니면 네게서 받아온 저 달이 널 잊지 못하게 언제나 비추었기 때문이냐?
바람은 너의 사연을 알고 같이 울어주는데 나만 너의 사연을 모르는구나.
지금은 네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만 닦아주지만 나중엔 너의 마음에 흘러내린 눈물도 닦을 수 있게 해다오.
... 넌 무엇이냐? 어찌하여 너는 매번 나를 자극하느냐? 나를 미치게 만들려는 수작이냐?
너와 단 둘만 있고 싶어 도망왔더니 너는 왜, 왜... 나의 가엾은 연우 낭자를 데리고 오느냐.
그 사람을 왜 자꾸만...
월에게서는 왜 하필 연우 낭자의 향이 나는 것이냐?
정말 낯이 익어.
어디서 너같이 어여쁜 것을 보았겠는가마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낯설지가 않았느니.
혹여 너의 전생은 나와 인연이 있었던 것이냐?
해가 비를 안아줍니다.
나와 같은 이 마음을 아는 월이라면 전생은 딱 하나밖에 없소.
그것은 연우 낭자요.
... 아니라 하지 마시오. 연우 낭자면 연우 낭자라 하고, 아니라 하여도 연우 낭자라 하시오!
난 하고픈 말이 너무나 많았소. 그 말을 하지 못한 심장이 망가져 버리고 만 것이니, 들어주시오.
연우 낭자가 아니어도 연우 낭자가 되어 들어주시오.
세상 가득 설렘으로만 가득 채워 놓고는 한 순간에 빼앗아 가 버려 원망하였소.
세상을 떠나고도 내 마음에선 떠나지 않아서 원망하였소.
이젠 볼 수 없는데, 보고픈 마음은 더하여졌기에 원망하였소.
짝 잃은 쌍봉잠 한 짝을 쓸모없어지게 하여 원망하였소.
난 말이오. 세자 때 꿈이 있었소.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왕과 가장 멋진 사내가 되는 거였소.
그래서 연우 낭자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왕비와 여인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소.
달빛이 대신하여 상감마마의 곁에 누워 있었기에, 달빛을 투기하느라 슬플 겨를이 없었사옵니다.
그대는 이런 식으로 꾸짖는구려.
그래를 알아보지 못하고 월이라 이름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더 잘 깨닫게 되었소.
어찌 한 여인에게 두 번씩이나 반한단 말이오.
우리가 죽게 되어 훗날 디 태어난다 해도 난 그대를 알아 볼 수 있소.
다시 태어난 월을 알아보고 사랑했던 것처럼 또다시 사랑할 것이오.
나의 아픔 또한 어디 연우 낭자의 아픔에 비하겠소.
달이 남겨준 내 그림자를 보시오.
모든 이의 죄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를 않소.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내일을 기다리고, 또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내일을 기다리오.
그대와 함께할 날은 머지않은 미래의 한곳에 박혀 있는데,
하룻밤 자고 일어나 오늘은 어이하여 그 미래에서 더욱 멀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소.
1년 안에 주어진 달이 같고, 한 달 안에 주어진 날이 같고, 한날에 주어진 시간이 같다는
옛 성현들의 말이 이제야 다 거짓임을 알겠사옵니다.
임과 보냈던 한날과 임을 기다리는 이 한날은 분명 같은 한날인데,
지금의 한날은 임 함께 있던 몇 날을 이어 붙인 듯
소녀에게도 참으로 길기만 하옵니다.
강녕전에 앉아 교태전을 보고자 하나 담이 높아 보이질 않소.
이곳의 달은 떴는데 그곳의 달도 떴는지 궁금하오.
이곳의 달은 떴으나 교태전을 보고 있질 않사옵니다.
아마도 그곳의 임을 훔쳐보고 있나 보옵니다.
해가 구름을 바라봅니다.
운아, 내 비록 너에게 높은 품계를 내리지는 못하나 가장 아끼고 있다.
그러니 아프지 마라. 설혹 그것이 마음이라 하더라도.
운아, 나는 남녀 간에만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벗 간에도, 그리고 군신 간에도 운명이 있지.
널 처음 만났던 날, 벗으로 신하로 운명을 느꼈다.
너는 무슨 연유로 왕의 측근 무사를 운검이라 하는지 아느냐?
환웅이 하늘에서 조선 땅으로 내려 오실 때 풍백, 우사, 운사 등을 거느리고 오셨지.
하지만 풍백과 우사는 먼저 하늘로 돌아가고, 마지막까지 조선 따에 남아 환웅을 지킨 신하가 바로 운사.
그렇기에 왕을 보필하는 것은 대대로 구름이 아니겠느냐?
나의 구름은 너 뿐이다.
구름이 달빛 곁을 맴돕니다.
소녀가 어리석게도 몰랐사옵니다.
푸른 하늘 위를 떠가는 맑은 구름도 마음이 있었음을...
구름 속으로 흘러든 것은 달이었사옵니다.
이제 달은 가고 없으니 구름 속에 있어야 할 것도 없사옵니다.
애당초 구름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은 비겠지만,
이 구름은 비를 가진 것은 아니었기에...
참으로 강하신 분이시옵니다.
연모의 저 아래에서 휘어지고 꺾이는 이가 그리도 많건만...
원하신다면 원망이라도 받겠사옵니다.
단지 지금 제가 원망스러운 것이 있다면,
처음 운우를 읊은 자, 그 자가 원망스러울 뿐이옵니다.
구름과 비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데...
양명의 넋이 안타깝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제나 상감마마의 것이지.
그리움조차 그렇지.
나 또한 같은 그리움을 품었다.
배는 다르나 한 아비 아래에 태어났음에도
어찌 세상의 모든 것은 상감마마만의 것인가?
어찌하여
작은 비의 한줄기조차
내게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인가?
꽃과 불꽃은 같은 운명인가요.
금세 시드는 꽃은 싫어요.
아바마마께 제 봉작명의 꽃 화를 불 화로 바꿔달라 청을 드린 적 있었사오데,
공주의 봉작명에 그런 글자를 쓸 수 없다며 안 된다 하시었어요.
칫! 불과 불꽃, 더 없는 궁합인데.
불꽃도 꽃이옵니다.
그러니 저도 공주와 같은 꽃이옵니다.
용서하지 않을 거라 하시었잖아요. 죄를... 용서할 수 없을 거라...
죄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도 거두지 않을 것이옵니다.
불꽃과 눈이 만나 아스라이 스러져갑니다.
(눈이 불꽃을 향해 가면 어찌 되간대?)
가지 마라. 왜 불꽃이 뜨거운 걸 몰라?
불꽃이 뜨거운 걸 모르는 바보도 있답니까?
녹아질까 두려워 가까이 갈 수조차 없는 눈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를 뿐이죠.
설! 설이라 하였습니다.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제가 그 아이의 이름을 설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처음 우리 집으로 왔을 때 그 아이의 이름은 아마도 이년 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부르기 민망한 그 이름을 우리 연우의 옆에 둘 수 없었기에
설이란 이름으로 바꾸라 하고, 노비 문서의 이름도 바꾸어 주었습니다.
설이라고 하였느냐?
여인은 검을 쥐면 그 운명이 슬퍼진다 하였다.
그러니 장난으로라도 검을 쥐지는 마라.
비록 짧았던 삶이었지만...
쇤네는 검을 쥔 지금이 가장 행복하옵니다.
(비인가 여겼더니 눈이었구나. 불꽃을 가슴에 품고 가니 비처럼 내리지.)
작은 불꽃이라도 타올라야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힐 수 있는데,
세상에는 타오르지 못하는 불꽃도 있사옵니다.
우리 연우의 손을 잡았을 때 예전과 변함없이 여전히 고와서 마음이 덜 아팠었다.
그 아이의 손이 그리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너의 손이 거칠어졌기 때문임을 내 이제야 알 것 같구나.
... 난 네게 미안하기만 하구나.
애석하게도 사내의 마음 또한 하나뿐이라...
하나 있던 마음이 부서져 없어졌기에,
더 이상 남은 마음도 없어서.
눈은 구름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구름은 달을 가리는 것일 뿐, 품는 것이 아니옵니다.
구름은 달을 가릴 뿐이지만, 비는 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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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파스텔톤 밑그림에
뜨거운 붓을 잡는다.
맑은 수채화빛 문체로
고운 글을 담아서
고이고이 마음을 채운다.
가슴이 뭉근하게 일렁인다.
해.품.달
너를 연모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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