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희미한 꿈을 몇 번이나 꾸었다.
꿈 속의 츠카사는 웃으며--- 아까 그건 농담이라며, 내 머리를 찌른다.
빨리 돌아가자. 같이 돌아가자.
또--- 똑같은 꿈---
언제나 같은 곳에서 눈이 떠진다.
아무튼 잠을 자.
괜찮아. 나, 여기 있을 거니까.
루이 곁에서 잠이 든 츠쿠시.
루이! 고마워. 여러 가지로. 정말이야.
됐어. 벌써 고맙단 말은 여러 번 들었으니까.
응.
루이만이 지니는 독특한 분위기.
부드럽고 자상해.
커피의 김처럼.
아, 참! 오늘 신문에 실렸는데, 츠카사네 집 큰일났나 봐.
큰 거래가 실패로 끝난 거 같다고 써 있어.
이제 됐어. 왠지 지쳤어.
왜 평범하게 사귈 수 없을까? 왜 이렇게 돼버렸을까?
츠카사네 집이 어떻게 됐든, 알 바 아냐.
난--- 평온하길 바라는 평범한 여고생인데---
미안. 내가 웬 푸념이지. 꼴 사납게---
(루이가 키스하며) 가끔 푸념 늘어좋는 게 뭐 어때서?
어디 나갈까? 어렵게 여기 왔으니까.
어어? 지금 뭐지?
루--- 루이. 저기--- 지금.
키스? 그냥 하고 싶어서. 안 돼?
아--- 안 돼! 이상하잖아! 안 돼. 친구끼리는 그런 거 안 한다구.
그리고 나, 루이한테 애완동물이잖아. 키스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해야지.
시즈카는 이미 잊었어.
어쩐지 신경이 쓰여서 어쩔 수가 없었어.
일본에서 소지로랑 아키라와 네가 된통 당할 거라며 웃고 나서는,
자꾸 맘이 걸려서 2시간 후에는 비행기에 올랐지.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그랬을까. 좋아해선가---
그래. 그런가 봐.
으잉? 뭔 소리야, 애가? 다--- 다리가 후들거려---
지금 그 얘긴 고백?
좋아해선가, 라니--- 날 말이야? 농담이 아니고?
루이.
츠카사랑 싸워서 퇴학당할 뻔했을 때, f3과 갈라서면서까지 날 지켜줬어.
시게루 별장에선 손잡아주며 잠들었지.
언제나, 언제나--- 힘들 때 곁에 있어줬어.
공기처럼 자상하게 감싸준다.
안 돼, 루이. 그런 얘기 하지 마.
나, 지쳤으니까--- 농담은 하지 말아. 도망치고 싶어지잖아.
도망쳐. 도망치면 뭐 어때? 하나도 흉할 거 없어.
돌아가자. 일본으로.
몇 번이나 꾸었던 희미한 꿈.
웃는 츠카사.
무엇보다 기다렸던 그 말을, 왜 루이가 하는 거야.
루이--- 아주아주 좋아했어.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사람.
상처받을 때마다 보고 싶고, 그리고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난 치유될 수 있었어.
왜--- 지금?
조금만 전이었다면, 난 츠카사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저--- 아까 얘기 중에--- 시즈카 선배 얘기---
아! 전에 캐나다에서 만났었지? 그때 끝났어.
아마 나, 너무나 아무것도 몰라서,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시즈카한테 애정을 지녔던 거 같아.
자주 감정이 결핍됐다고들 하는데, 동경과 사랑의 구별이 잘 안 가.
네가 열심히 살아가는 걸 보면서, 내 안에서 조금씩 여러가지가 변하기 시작했어.
울고, 웃고, 화내고, 언제나 바쁜 거 같고,
처음엔 귀찮았지만, 없으면 쓸쓸해.
츠카사랑 사귀기 시작하고, 친구 선언을 했을 때,
뭐랄까--- 어딘가에 구멍이 뚫렸어.
등 돌리고 V자를 그리긴 했지만--- 돌아볼 수 없었어.
아마 지금 난--- 그때와 같은 표정일 거야.
평소 말이 없던 루이가 드문드문 나오는 말에는 깊은 무게가 실려서
안타까울 만큼 마음을 울린다.
먼나라의 대도시, 절대적인 위기, 지쳐버린 내 마음을.
아직도 두근거려--- 믿겨지지가 않아.
그런 표정 처음 봤어.
지갑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레스토랑에서 일하게 된 츠쿠시와 루이.
뭐랄까, 어쩐지 여기 와서 처음으로 기분이 상쾌해졌어.
몸 움직이는 거 좋아하니까.
응. 그런 츠쿠시가 좋아.
피곤하지? 아참! 아까 그 매니저가 잘했다고 2달러 팁줬어.
돈 처음 벌어봐. 굉장해.
기념적인 2달러네. 소중히 간직해.
잠깐 있어봐.
(손에 꽃을 들고 오는 루이) 자! 2달러 가지곤 이거밖에 못 사지만--- 선물이야.
츠카사! 난, 이런 일에 울어버리는 여자라는 거--- 알고 있니?
내 가슴 소리는 솔직해.
루이의 그 얼굴을 봤을 때, 어쩔 수 없이 쿵쾅거렸어.
벌써 옛날에 끝난 감정인데---
왠지--- 똑바로 얼굴을 못 보겠어.
(쿡) 척보면 알아.
뭐--- 뭘.
긴장하면 자꾸 떠들어대잖아.
당근 긴장되지.
이렇게 아름다운 남자한테 고백들으면 누구라도---
루이--- 정말 달라졌어.
옛날엔, 서로 하는 말이 언제나 좀 동떨어져서 말이 잘 통하지 않아 답답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루이와 한가로이 공원을 거닐던 츠카사는 뉴욕에 왔을 때, 토마스와 함께 만났던 아저씨를 또 만나게 된다.
누구야?
저번에도 여기서 만났어. 아마도 실업문제로 고민하는 아저씨 같아.
루이의 통역으로---
거래처 사람과 싸워서 잘 안 되나 봐.
옛날부터 알았는데,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관계가 회복이 안 된대.
어른들도 싸우는구나--- 아저씨, 좋은 걸 가르쳐 드릴게요.
'미안해요'와 '고마워요'는 마법의 말이에요.
간단해요. 화해하려면 이 말만 하면 되니까.
그리곤 그 사람을 이해하는 거죠. 그러면 싫어할 수 없게 되요.
게다가 이 마법은 공짜에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아저씨는 츠카사 네 회사와 거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대 회사의 회장이었다.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아저씨를 따라간 곳에서 우연히 츠카사 엄마를 만나게 되는 츠쿠시.
그리고 앞장서는 츠쿠시.
나도 이 사람이 끔찍히 싫어요. 사람으로서 중요한 걸 갖고 있지 않으니까.
아저씨가 화내는 맘 아주 잘 알아요. 도묘지가 따윈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언제나 그 센트럴파크에서 앉아 있던 건, 싸운 걸 후회하기 때문이었죠?
그럼, 화해하면 되잖아요.
이 사람은 마법의 말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기다리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아요.
괜찮아요! 차기 회장이 도묘지 재벌을 말아먹을지도 모르니까.
얼빵한 아들이 뒤를 이을 거거든요.
츠쿠시의 말이 마법을 부린 것일까? 거래 성립!
어디로 가는 거지?
우리나라로, 루이랑 돌아갈 거예요.
그 말을 내뱉자, 무너져 내릴 거 같았다.
그래도 난 똑바로 앞을 향해 걸었어.
앞을 향해 똑바로 걸을 수 있었던 건--- 루이가 있었기 때문이야.
츠쿠시!
응?
츠카사 만나러 갈까? 그 녀석 한 동안 안 돌아올지 몰라.
만약 만난다면 지금밖에 없어.
아니--- 됐어.
보고 싶어.
만나서 묻고 싶어.
왜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날 쳐다봤는지.
왜 쫓아와주지도 않았는지.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아.
그만큼 그 눈빛이 너무 괴로워.
일본으로--- 돌아간다.
츠카사가 없는 그 집으로.
공항에 나타난 츠카사 엄마.
분명히 말하지만 난 배웅하러 온 게 아니야.
정말--- 쓸데없는 짓을 했어--- 너 같은 애한테 지시를 받다니, 도묘지 말년까지 갈 수치야.
이번 일은 뜻밖에도 네 도움을 받았지만, 정말 내 뜻이 아니야.
그리고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비즈니스다.
한 가지 네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말해 봐, 빚지는 건 싫으니까. 어서 얘기해.
내가 원하는 것?
츠카사랑 약속했어요.
그 약속을 지켰으면 해요. 그 말만 하면 알아요.
루이! 자꾸 말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진짜진짜 고마워.
자꾸 말하지 마.
(츠쿠시 이마에 입을 맞추며) 츠쿠시랑 나도 공항이랑 인연이 있나 봐.
내가 침울해 하기도 했고, 네가 침울해 하기도 했고---
시즈카 언니를 쫓아 파리에 갔을 때지.
그래, 그때는 너한테 기댔었지. 지금은 나한테 기대.
그래. 시즈카를 쫓아 프랑스로 떠나는 루이를 배웅하면서, 난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
이 사람의 웃는 얼굴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고 싶었어.
그만큼 보물처럼 귀한 거라서.
그런 루이가, 날 위해서 웃는 얼굴을 보이며, 자길 기대라고 말한다.
츠카사가 나타났다.
너희들 뭐하는 거야?
츠카사! 이제 츠쿠시를 데리고 돌아갈 거야.
공항에 있으면 그 정돈 알아. 그 전에 말야. 루이! 너, 무슨 꿍꿍이야?
난--- 츠쿠시가 좋아.
계속 숨기려고 했었어, 넌 내 친구니까. 둘이 잘 되면 된 거라고 생각했지.
(루이를 치는 츠카사, 받아 치는 루이)
뭘 하느냐고? 그건 내가 할 소리야! 그러는 넌, 뭘하고 있는 거야!
이런 곳에 츠쿠시를 내버려두곤, 애인 행세야? 네가 지켜주는 방식은 그래?
그렇다면 내가 널 잘못 봤어. 쓰레기 같은 자식.
츠카사! 널 만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었어.
굳고 굳은 결심을 하고 여기까지 와서, 차가운 눈으로 내쫓았어도,
그래도, 여전히 좋아해.
지금은 그냥, 슬플 뿐.
츠카사 눈을 보면, 우린 같은 생각을 한다는 걸 아니까.
츠쿠시! 남고 싶다면 남아. 네가 결정해.
츠카사! 약속 꼭 지켜. 반드시 지켜야 돼. 알았지?
나, 기다릴 테니까.
지킬게. 반드시.
됐어! 그럼, 갈게.
아마도--- 딱히 누군가의 잘못은 아니야.
마녀조차도 필사적으로 살고 있어.
살아가면서 한 가지쯤 도저히 잘 안 풀리는 일도 있는 거야.
그 단 한 가지가,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었을 뿐---
약속한 날이 찾아올 때--- 모든 게 끝난다.
돌아왔어.
아무 것도 없는, 원래 우리 집으로.
자, 기운내야지!
루이! 분명히 얘기하는데, 난--- 츠카사가 좋아.
알아.
왜 갑자기---
난, 사귀든 안 사귀든 상관없어. 이상할진 모르지만.
이상해.
아! 그거야. 그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우연히 만났을 때와 변한 게 없어.
엷은 갈색유리 같은 눈동자.
난, 다시 한 번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츠쿠시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
헤어졌어.
그렇게 정한 건--- 츠카사와 나.
줄곧 츠카사를 좋아하면서도, 모르는 척한 건
이런 결말에 도달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야.
묻어두자.
보석상자처럼, 즐거웠던 추억만 가득 모아서.
츠쿠시, 난 츠쿠시 얘기 잘 모르겠어.
왜 무너지면 안 되는 건데? 사랑이란 그런 거잖아.
이해를 못하는 건, 시게루가 우리 같은 사람이기 떄문이야.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 우리보단 츠쿠시한테 훨씬 많아. 어쩐지 둘 다 안됐어.
사랑하기 때문에 무너지는 게 두려운 거야. 난 최고의 배려라고 봐.
소지로, 어째 겪어본 말투 같아---
무슨--- 난--- 세계 제일의 바람둥이가 목표라구.
마음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한다.
미쳐버린 내 안의 축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게 느껴져.
뉴욕에서부터 계속 내 자신에게 묻는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난 츠카사를 좋아하는 일이 없었을까?
아니, 대답은---
아무리 많은 인파 속에 묻혀 있어도, 난 츠카사를 찾아낼 수 있어.
마치--- 자석이 서로 끌리듯이.
주위 소리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잘 지냈어?
아! 응. 보다시피 왕튼튼이야.
여전해 알바하는구나. 학교에서 알바다닐 때, 여길 지나다녔지.
낮에 귀국해서 지키고 있었어.
네 하루를--- 오늘 내게 줘.
냄비전골을 기억하고 돌아와준 츠카사.
얄궂어. 이렇게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둘이서 걸을 수 있다니.
츠카사, 왜 이렇게 돼버렸을까.
있지, 우리의 지금 이 기분이 언젠가 사라져버릴까?
그래도 서로 물어보진 않는 거지.
최고의 하루가 될 테니까.
맛있어!
야호, 그러고 보니, 너한테 맛있다는 얘기 처음 듣잖아!
그래? 난, 맛없는 걸 맛있다고는 못해.
지켜주고 싶었는데--- 지켜주지 못했어. 미안해.
됐어. 그만, 말하지 마. 제발 그만해.
눈물이--- 쏟아질 거 같으니까---
이제 내일 보자는 말은 없어.
우린 내일부터는 따로따로---
그때, 갑자기 들이닥친 남자들에게 납치되는 츠카사와 츠쿠시.
슬픈 이별을 맞을 거였는데--- 왜 또---바다 위지?
그러니까--- 몇 시간 전까진, 집에서 전골요리를 하고,
내일 뉴욕으로 돌아간다고 츠카사가 얘기하고---
1분 1초가 소중한 시간이었는데--- 근데--- 어떻게 망망대해에 있는 거야?
우리 배 아냐.
그럼, 누구 배야?
몰라. 조종실에도 아무도 없어. 자동 조종으로 고정시켜놨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배가 어디론가 가고 있고, 거기 도착하기 전까진 안 멈춰.
언제 어디에 닿을지 모르는 바다 위.
게다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츠카사와 나 외에는.
아무튼 어떻게 해볼 수 없다면, 하는 수 없어.
신나게 지내볼 테야.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달은 순간--- 왜 이렇게 멋지게 느껴지는 거야.
(츠카사를 보며) 두근!
왜 두근거리는 거야! 바보같이.
조만간 어딘가에 배가 닿으면 이제 두번 다시 못 볼지도 모른는데.
예전에도 배 위에서 단 둘이 있었던 때가 있었지.
그때는 츠카사에 대한 내 감정을 몰랐고,
어디부터가 바다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알 수 없는 밤바다가 삼켜버릴 거 같아서,
그냥 무서웠어.
어쩌지? 속이 이상해. 배가 흔들려서.
츠쿠시를 안고 화장실로 가는 츠카사.
츠카사--- 언제나 그래.
훤히 보이는 거친 자상함이--- 내 맘을 아프게 해.
츠쿠시! 늦었지만 말 나온 김에 하는 얘긴데---
네가 뉴욕에 왔을 때, 정말 너무너무 기뻤어.
그런 식으로 돌려 보내서, 어떤 일이 있었던지 간에 죽고 싶을 만큼, 후회했어.
네가 루이에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해.
그 녀석한테 맞아보긴 처음이었어.
그런 루이, 본 적이 없어.
아마--- 나보다 널 행복하게 해줄 거야.
이대로 됐어.
이대로 끝내버리면 돼.
아무 말 않고, 묻어버리면 돼.
말할 거까진 없어.
츠카사! 너! 네가 날 행복하게 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이런 얘기 할 거까진 없어.
그런데, 뭐? 딴 남자한테 맡기겠다고? 이 얼간아!
내가 남자가 어떻게 해줘야만 행복해지는 여자로 보여?
사람 우습게 보는 거야?
하지만, 바다를 뒤집어놓는 폭풍이 날 움직이게 해.
왜냐면, 지금까지 난, 폭풍 속에서 살아왔으니까.
네가 좋아한다고 했잖아! 이 팔푼아!
말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
말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하지만 말해버린 건, 이제 돌이킬 수 없어.
츠카사! 아무 말도 안 해.
아무래도 이미 츠카사의 마음은 정해진 거 같아.
이제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아마 나보다 널 행복하게 해줄 거야.'
그 말 땜에 충격 받아서 생각 않고 말해버렸어!
그건 츠카사가 우리의 사랑을 포기한다는 말.
한 쪽의 감정이 식으면 사랑은 이뤄지지 않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어떻게 해야 사랑을 잊을 수 있는지 떠오르질 않아.
어쩐지 엄청나게 의외야.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츠카사가 든든하게 의지가 될 줄이야.
아무것도 못하는 도련님인 줄만 알았는데.
누가 대체 무엇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을까?
전혀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의 끝과도 같은 저녁노을을 보고 있으니,
난 보통 여자고, 츠카사는 보통 남자.
이런 시계도 없는 곳에서 멍하니 있으니까, 세상 일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어.
나도 똑같은 생각했어. 정말 그래.
세계가 여기밖에 없고, 마치 우리 단 둘뿐인 거 같아.
키스--- 하는 줄 알았어.
아니, 그게 아냐. 내가 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머리카락이나, 어깨나 손, 만져보고 싶어.
츠카사! 손 좀 줘볼래? (츠카사 손을 얼굴에 대고 어루만지는 츠쿠시)
평소 제정신이었을 때라면, 생각할 수 없는 행동.
그때 난, 이 이상한 여행의 의미가 점점 이해되기 시작했어.
배는 없어지고,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랬군. 무인도가 아니었어.
드디어 여기로 데려온 자를 만날 수 있겠군, 그래.
가자. 정체를 알아내서 끝장을 내주마.
너무 무서워! 분명히 보였던 사람 그림자.
분명히 있어야 할 곳에서 사라진 배.
듣고 싶었다.
어째서 이 손을 놓게 됐을까?
'뭐하러 왔어? 넌 돌아가.'
손을 내민 지금의 츠카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어---
츠카사! 왜 내가 뉴욕에 갔을 때 쫓아냈었어?
마녀가 조건을 내걸었지. 그 자리에서 널 쫓아내면 2년 동안 자유롭게 해준다고.
지금 시작해보면 그럴 리가 없는데 말야.
너나 네 친구한테나 일절 손대지 않겠다고 해서, 그럼 내가 달라지면 되겠다 싶었는데,
너랑 루이가 일본으로 돌아간다고 들었을 때는, 다리가 내달리고 있었어.
확 열받아서 루이랑 치고 받고, 루이 얘긴 정말 옳은 말이었어.
진짜 꼴 사나웠어, 나,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아.
그랬었구나, 그때. 그런 이유가 있었어.
그 사실을 들어버린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어떡하지?
마음을 정할, 생각할 틈조차 없을 정도로---
츠카사! 가지 마.
뉴욕으로 가지 마. 가버리면 싫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여기서 돌아가지 않아도 좋아.
이제 헤어지는 건 싫어!
이 기묘한 작은 여행의 의미를--- 이제 깨달았어.
내게--- 이 손 외에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
다시 츠카사의 품 안.
왜--- 이 장소는 이렇게 내 몸과 꼭 들어맞을까.
이것이 아마도--- 사랑의 힘이겠지.
밤의 어둠도, 아까 그 사람 그림자조차도, 이제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무엇이 내게 소중한지, 이 여행이 가르쳐줬어.
이 소중한 가르침을 준 주모자는 누굴까---
나야. 내가 그랬어.
우리 경호원들인데, 좀 거칠게 하도록 부탁했어. 안 그랬음 츠카사를 당해내지 못 했을 테니까.
시게루? 너, 사람 갖고 노냐?
갖고 논 거 아냐! 장난친 거 아니라구!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냥 뭐하고 있는 거야?
집이 어쩌구, 그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서로 사랑하잖아!
나라면 그딴 거 아무래도 좋아. 보고 있으면 짜증이 나!
고마워.
끝나버릴 뻔했던, 약속의 날.
아마 난, 그대로 츠카사를 돌려보냈겠지.
가지 마.
그 말은 나 혼자선 할 수 없었어.
보이지 않지만, 형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커다란 힘이 지탱해줘서,
할 말을 할 수 있었어. 뒷일은 상관 안 해.
츠카사가 정한 일이니까.
아, 참. 루이한테도 오자고 했는데, 싫댔어.
그래--- 루이, 나 안심하고 있어. 루이가 여기 없어서---
시게루, 미안해.
아직 츠카사를 좋아한다는 게, 마음이 아플 정도로 느껴져.
자기 마음을 누르고,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한다.
뺏으려하는 것보다, 훨씬 강해.
시게루도, 유키도, 그런 강인함이 지금 내게 있을까?
(츠쿠시도 루이를 위해서 그런 적이 있었지)
시게루! Thanks. 나--- 결심했어.
뉴욕엔 안 갈 거야. 도묘지 가를 나올 테니까. 의절하겠다구.
말해 두지만 츠쿠시, 너만을 위해서는 아냐.
이건 날 위해서이기도 해.
한편, 츠카사의 납치 사건이 일본 언론에 쫙 퍼지면서, 시게루 일행을 맞이하는 엄청난 사람들.
그런데 혼란을 틈타서 도묘지가에 원한을 품었던 남자가 칼로 츠카사를 찌르고,
큰 부상을 입게 된 츠카사는 혼수상태에 빠져 일어나질 못한다.
시게루! 이제 울지 마. 네 잘못 아냐.
츠카사는 괜찮을 거야. 죽여도 죽지 않으니까.
루이--- 피가 엄청 쏟아졌어--- 난 놀라서---
츠카사가 죽는구나 싶어서--- 루이---
바보같이. 불길한 소리 마.
왜--- 언제나--- 그 손을 잡으려는 찰나에--- 잡지 못하는 걸까---
진심으로 손을 내밀었을 때는--- 언제나--- 내 두 손을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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