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어서

와인 한 잔의 진실 / 무라카미 류

2009. 1. 14. 21:59

오퍼스 원

 

하와이에는 문화가 없어, 하고 당신은 말했어요.

그리고, 그건 나쁜 게 아냐, 라고 덧붙였죠.

하와이에는 조화만 있지 대립과 충돌이 없어.

역사적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점일 수도 있지.

요컨대 하와이는 훌라춤과 카누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훌륭해.

 

빌라의 열쇠와 유나이티드 항공권을 내게 건네주며 당신을 말했어요.

하와이라도 가서 잠시 휴양하고 와!

휴양? 왜 당신은 나에게 휴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내가 당신과의 관계에 지쳤다고 하는 의미였을까요.

아니면 나의 병이 전보다 더 진행되고 있다고 멋대로 판단해서일까요.

 

상처 입은 나를 위해 당신이 마우이의 빌라를 준비해 준 것보다

식기선반 안의 와인 쪽이 더 기뻤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와인밖에 마시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제법 센 알코올을 마셨지만 지금은 전혀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요.

센 알코올은 몸을 안쪽에서부터 억지로 바꿔가는 것 같아서 싫답니다.

목과 위가 뜨거워져 그곳만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느낌이 지금은 왠지 무섭습니다.

물론 목이나 위가 뜨거워지는 게 무서운 게 아닙니다.

언젠가부터 나 자신이 아닌 듯이 느껴지는 부위가 몸 속에 생겨나는 것이 싫어진 겁니다.

그래서 당신도 잘 알듯이 와인을 좋아하게 되었죠.

와인은 절대 목과 위를 뜨겝게 흐트러놓지 않거든요.

꽃이 핀 고원의 얕은 여울처럼 몸속에 한쪽으로 녹아들 뿐이죠.

 

나는 오늘 새 친구가 생긴 것을 기념하여 오퍼스 원을 따기로 했습니다.

 

와인글라스에 오퍼스 원을 따릅니다.

서서히 경련이 잦아드는 새의 심장이 떠오릅니다.

저녁놀이 모든 풍경을 녹이고 오퍼스 원이 나의 몸을 안쪽에서부터 녹여갑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샤토 마르고

 

파리에는 레스토랑 알랑 듀커스가 있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누구였을까,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

당신은 누구였을까,

당신의 고백대로 작가였을까, 나의 애인이었을까,

아니면 이름 모를 어느 바에서 우연히 합석했던

스쳐가는 사람이었을까.

 

샤토 마르고의 향기는 어떤 와인과도 닮지 않았습니다.

불룩한 글라스를 들자 향기의 입자가 몸에 녹아들어 뭔가 영상으로 떠오르다가 부서지고,

다시 떠오르다 부서지는 일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뭔가를 떠올릴 것도 같았습니다.

 

원래 향기 자체가 에로틱합니다.

향기는 음악과 달리 영상을 불러 일으키지 않고 직접 내장에 작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알랑 듀커스에서 샤토 마르고의 향기를 맡았을 때,

영상이 되기 직전의 신호 같은 뭔가가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잔거품을 닮았습니다.

욕조 속에서 일기 시작한 잔거품은 점점 커지고 어떤 형태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품은 반드시 터져 없어집니다.

거품이 형태를 만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샤토 마르고의 향기가 불러 일으킨 뭔가는

영상이 되기 직전의 그런 잔거품 같은 것이었습니다.

 

 

 

라 타슈

 

라 타슈야, 하는 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렸다.

라 탸슈는 복잡한 향기와 혀의 감촉과 맛을 가지고 있었다.

향기에 취해 있으면 혀의 감촉에 배신당하고,

혀의 감촉에 취해 있으면 맛에 배신당하고,

맛에 취해 있으면 다시 향기가 다른 쾌락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대성당 미사에 모인 천 명의 성직자 가운데 살인청부업자가 한 명 있어서

위안을 받으면서도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불안 같은 느낌.

라 타슈는 그런 복잡함과 착란을 상징하는 와인이었다.

 

이런 와인은 남기면 벌 받아,

그 사람이 그남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로스 바스코스

 

그 무용수가 쿠바의 전통춤이 몸에 맞지 않아 매일 울면서 레슨을 받으러 다니자,

노인은 여자를 위로하기 위해 매일 로스 바스코스라는 백포도주를 함께 마셔 주었다는 것이다.

무용수가 좋아한 것은 루아르의 백포도주였지만, 프랑스 와인은 아바나에 없었다.

 

노인은 아바나의 상점에 있는 와인 가운데서 젊은 여자 무용수가 가장 좋아할 만한 것을 골랐는데,

그게 바로 로스 바스코스였다.

그건 투명감이 있고, 강하며, 어딘가 슬픈 와인이라고 노인은 내게 말했었다.

 

로스 바스코스는 그 무용수를 닮았어,

쏙 들어간 가는 허리의 오목한 선과 등에서 쭉 뻗어내려 작고 예쁜 곡선을 그리는 엉덩이,

그것들은 로스 바스코스의 맛과 비슷했지, 라고 노인은 로스 바스코스를 기억했다.

 

노인은 와인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다.

18세기 중엽 스페인에서 이주한 바스크 사람들에 의해 로스 바스코스의 기반이 다져졌으며,

로스 바스코스라는 말은 바스크 사람들이란 뜻이라는 것을.

 

로스 바스코스는 투명감이 있지만, 강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슬프기도 하다.

그 맛은 그 무용수의 몸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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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어려웠다.

'잃어버린 자아찾기'가 일관된 주제라고 했던가.

인물들의 자아찾기가 생소해서, 잘 모르겠다.

와인이 응석부리는 인물들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있다.

그들을 품에 안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눈물을 흘린다.

특정 와인과 인물들의 잃어버린 자아 사이에 맺어진 친밀감이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지만,

와인에 대한 기억이 그들과 함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와인은 위로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