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그 남자! 그 여자 6 / 아리마의 고뇌

2008. 10. 23. 10:04

문을 잠그고, 미닫이문도 닫고,

여름 한낮에도 창을 꽉 닫고 커튼을 내린다.

이런 때는 반드시 만신창이가 된다.

나는 아직 두 살이나 세 살.

몸을 지키는 법을 모른다.

자신이 놓여있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도 몰랐다.

아이에게 있어서 집은 세계.

부모는 신.

그래서 참았다.

 

잊고 있던 게 아냐.

너무 아파서, 묻어두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지금은 안다.

애정이 결핍된 인간이 있다는 걸.

생모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사랑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배설했을 뿐인--- 그 정도의 목숨.

 

모든 것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젠 거짓말로 속일 수 없어.

그것이 정말 두려웠다.

 

생모한테 얼마나 구타당했었는지.

그래도 생모의 비위를 맞추면서 사랑받으려고 애썼어.

비참하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멈춰지질 않아.

 

들을게.

여태 몰랐던 만큼

모두 들을 테니까, 얘기 좀 해!

 

만나고 싶지 않아.

 

전신에서 푸른 불꽃을 흩뿌리며--- 모르는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공부 따윈 아무래도 좋아--- 아리마를 되찾을 때까진.

 

이제 와서.

 

이제 와서라도 알았잖아. 그러니까 얘기하고 싶어.

 

아리마의 마음을 듣고 싶단 말야--- 진짜 아리마를 알고 싶어.

 

가을이 되자--- 생모의 폭력은 더욱 심해졌다.

나에겐 완전히 흥미를 잃고

남은 것은 그저 증오 뿐이었다.

 

 

 

비켜.

 

못 비켜.

여기서 물러나면 우리 관계는 부서지고 말아.

그래도 좋다면 날 밀쳐버리고 나가.

 

밀쳐 버리고서라도 나갈 걸 그랬다.

진정한 나를 드러냈다간--- 너를 갈기갈기 찢고 말아.

마음에 고인 잔혹한 상념이.

단 한 사람--- 내가 마음을 허락하고 만

너인 까닭에.

 

아리마는 아사바한테 뭐든 얘기하는구나.

 

나는 그 기분을 이해해줄 수는 있지만, 녀석을 변화시킬 힘은 없어.

하지만 넌 '이대로는 안 돼'라고 하면서,

아리마를 억지로 이끌어낼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고마워.

하지만--- 아리마를 어둠에서 구해내는 건

간단하지가 않아.

 

이제부터는 내가 아리마를 지켜줘야 해.

 

속이는 남자.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는 남자.

모든 은총을 타고났으면서--- 혼자 살아가는 남자.

만나기 시작한 무렵엔 그토록 가깝게 느껴졌는데.

어째서 지금 이렇게 다른 거지?

그리하여 비로소 알게 됐다.

우리의 연애는

2년 전

이미 끝나 있었다는 걸.

 

속이려 해도 난 아리마를 알아.

허세를 떨고 있지만 내면은 엉망진창이잖아.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는 살갑게 대하고,

기분 나빠.

나를 멀리하려는 것도,

이렇게 파고들까 봐 두려웠던 거야.

한때는 마음을 허락하고,

자신을 알려버린 상대니까.

아리마가 너무 멀어.

 

나는 아리마를 너무 믿었고--- 아리마는 나를 믿지 않았다.

2년 만에 듣는 아리마의 말은--- 내겐 너무 멀어서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없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암담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

역시 그녀가 제일 강하다.

한번 거짓을 눈치채고 난 뒤,

변명은 통용되지 않는다.

알고 있었어.

 

 

 

지금 곁에 있지 않으면 언제 있으라구?

 

멋대로 좋아하게 만들고--- 억지로 마음을 팽개치고,

가엾은 유키노--- 이런 나를 좋아하게 되다니---

 

그렇게 해서 마주보는 것으로부터 도망쳐온 거야.

어째서 이렇게 돼버린 거지?

 

무엇인가--- 어딘가에서 막히고 일그러져서--- 점점 미쳐간다

 

아리마가 자해를 했다.

 

이 정도로 바보일 줄은 몰랐어!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난 이미 안 된다는 걸 어제 알았겠지?

넌 훌륭한 사람이니까--- 더 좋은 사람을 골라.

 

유키노가 아리마를 친다.

 

겨우 한 번 실패한 것 가지고--- 같은 상처를 입어야 날 믿겠어?

 

그렇게 해서 너는 가뿐하게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와--- 마음을 들춰버린다.

허세를, 의지를, 위선을.

무서워서--- 그것이 견딜 수 없이 무서워.

하지만 매혹된다.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건---사랑하는 마음을 계속 유린당하는 것.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았기에--- 마음 깊은 이 어둠 속에 숨겨버렸던 거야---

 

뭔가 해결된 것도 아닌데---

어린 내가 걸어놓은 주문에서 해방되어

나는

마음을 손에 넣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저 내가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랬다.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사랑할 수 있게 된 지금이라면 안다.

두 번 다시 이런 과오는 범하지 않겠다.

기필코 다시 일어서고 말겠어.

 

이상하다.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되자마자

자신이 이토록 타인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난,

비로소 뼈저리게 아리마를 이해하게 됐어.

나에게 상처주지 않으려고 늘 희생했지.

그러니까 난 상처받거나 하지 않아.

아리마 얘기를 들으면서--- 계속 두근거렸단 말야.

오랫동안 깨닫지 못해서--- 미안해.

지켜줘서 고마워.

좋아해.

 

뜨거워지면서--- 풀려간다.

 

나는 꽤나 꼴사납게 울고 말았지만--- 그래도 좋다.

유키노는 상냥했고---

가슴이 맑아졌으니까.

한때는

이제 틀렸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유키노가 기적의 한판승을 따내,

우리는 지금까지 이상으로 사이가 좋아졌다.

 

그녀가 문을 열어 주었다.

드디어 갈 수 있어.

너의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