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가을이면 쓸쓸하다.
계절감이 주는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한 해가 마무리로 접어드는 길목에 서서
괜히 안타까워지면서
부족한 내 자신이 드러나보이기 때문이다.
나이살은 찌는데
나는 여전히 멈춤이다.
그다지 채워져 있지 않은 내 모습에 내 스스로 어깃장을 놓고 있는 것이다.
붉게, 노랗게 치장한 단풍들을 이쁘다며 바라보다가도
그냥 아무 느낌이 없어져버리는 무심함이 감싸는 계절이다.
지난 해에는
비디오나 드라마를 보면서 지나치거나
꽃이름 알아내는 기쁨으로 보냈던 것 같은데
올 가을은 만화 보느라고 바쁘다.
살림살이는 적당히 내팽개치고 만화를 대여했다.
초중딩 애들이 서성대는 곁에서 나도 함께 서성댔다.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 빌려다가 딸이랑 같이 보았다.
적당한 로맨스가 흐르는 시대물을 좋아해서
한승원의 [프린세스]와 김강원의 [여왕의 기사], 황미리의 [왕가의 후예]
그리고 일본 만화 시노하라 치에의 [하늘은 붉은 강가]를 우선 보았다.
완결이 안된 작품은 기다리기가 답답해서 잘 보지 않는다.
[하늘은 붉은 강가]의 경우
두 번을 빌려다 보았는데 대여점에16권이 분실되고 없어서
16권을 주문을 해서 볼만큼 흠뻑 빠졌다.
역사와 상상을 적절하게 꿰맞추는 작가의 구성력에 감탄하면서
구구절절 한 장면 한 장면 놓치지 않고 보았다.
전 28권을 손에서 놓지 못할 만큼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어제 뉴스에 이 만화에서 언급했던 이집트 소년왕 투탄카멘의 모습이 공개된
기사를 보았는데 괜히 반가웠다.
작년 겨울부터 만화 읽기를 시작했다.
어려서 만화책 보기와 TV 만화에 열중했던 버릇이
이 나이에 다시 생겨버렸다.
[베르사이유 장미]를 만화와 애니로 다시 보기 시작하면서
[노다메칸타빌레]와 [궁]을 샀고,
올 여름에는 [신의 물방울]을 보면서 와인의 세계를 엿보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무리 꼼꼼이 들여다 보아도 금새 잊어버린다.
탄식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를 위로하면서 만화를 본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시대물을 잠시 제껴두고
정말 유치? 해보이는 순정물들을 보기 시작했다.
딸아이랑 같이 낄낄대면서 보는데
나도 나를 잘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
주로 공장만화라고 하는 만화들이 재미있었다.
동네 아줌마들이 제목만으로도 유치하다는 [물좋은 하숙집],
이현숙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강은영의 [히싱],
이미라의 [인어공주를 위하여], [파라다이스키스] 등등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은 상당히 유혹적이었다.
그림도 예뻤다.
드라마로 될지도 모른다는 천계영의 [오디션]은 더욱 자극적
아, 천재는 따로 있구나.
배우지 않아도 알고, 외우지 않아도 이해하는 천재.
참 좋겠다. 그리고 그들의 인연이 부럽다.
다들 완결된 작품이라 오래된 것이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는 편하고 좋았다.
주로 고교생들의 이야기였지만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다.
그것이 만화가 주는 기쁨이잖아!
물론 그들의 문화와 언어, 생활이 이해되는 것이
만화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해버리기도 했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캔디캔디] 애장본을 보았다.
작년에도 빌려보았던 것인데 또 빌려와서 본다.
중학교 때 폭 빠져서 보았던 캔디 만화가
지금 보아도 가슴 뭉클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나는 아줌마캔디에서 할머니캔디로 변해가는 것을 즐기지 않을까 싶다.
여전히 테리우스는 멋지고, 나의 우상이었던 캔디는 씩씩했다.
다만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역사의 한 도막이 눈에 들어온 점이 다르달까.
캔디 만화에서 1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딸에게 지적해주고 누가 멋지냐고 물었더니 다들 별로란다.
딸이 아직 사랑을 모르나보다.
앞으로 한달 정도는 만화보기를 자제해야 한다.
아이들이랑 기말고사 준비를 해야 하니까.
시험은 만화가 아니고 현실이기 때문에......
공개된 투탄카멘 미라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