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어서

갑신년의 세 친구 / 안소영

2013. 3. 8. 22:09

듣고 있던 박영효도, 방 안의 젊은이들도 말이 없었다. 천하는 높디높은 중국과 그 아래 엎드린 작은 나라들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크기와 모양이 다를 뿐 저마다 중요한 여러 나라들로 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새로웠다.

조선도 중심이 될 수 있고, 그로부터 여러나라가 바퀴살처럼 고르게 뻗어 나간 것이 천하의 새로운 관계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기도 했다.

 

 

벌써 십여 전이던가,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를 나는 아직 잊을 수 없네. 서양 군대에 밀려 황제가 열하로 피난 간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내 눈으로 텅 빈 왕궁과 북경 거리를 보니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더군. 천하의 중국 황제가 오랑캐에 쫓겨 황궁과 백성들을 버리고 달아나다니...

그런데 북경을 차지한 영길리와 불란서군은 대오도 흐트러짐 없고 자신만만했지. 무지한 오랑캐들이 벌인 한때의 난동이 아니었어. 그들은 큰 세력, 우리가 몰랐던 저편 세상에 오래전부터 있던 세력인 게야.

 

연암의 손자 박규수의 사랑에 모인 청년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 옛날 연암 박지원의 사랑에서, 외로운 서얼 청년들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는 가슴에 품은 이야기들과 조선사회의 개혁에 관한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그로부터 백여 년 뒤, 연암의 손자 박규수의 사랑에도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합니다. 오래된 흰소나무가 서 있는 과수원 언덕 위, 할아버지 연암이 지어 놓은 그 사랑채였습니다.

연암의 사랑에 있던 젊은이들이 불우한 처지였던 데 비해, 손자 박규수의 사랑에 모인 사람들은 앞날이 창창한 북촌 세도가의 청년들이었습니다.

바로 훗날 갑신정변의 주역이라 불리는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입니다.

세 청년은 스승과 함께 급격히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고 개혁의 길을 적극 모색했습니다.

 

 

김옥균을 보는 왕의 눈빛이 따스했다. 왕은 자신보다 한 살 많은 김옥균에게 유달리 친근감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북촌 양반가에 신동이라 소문난 김옥균이었기에, 경연의 스승들이 하는 이야기를 왕도 들은 바 있었다. 스승의 칭찬도 받는 데다 부모형제와 함께 궐 밖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제 또래의 김옥균이 왕은 부러웠다. 원래 김옥균의 집안은 조촐했으나 세도 있는 숙부 밑에 양자로 들어갔다고 한다.

왕은 또한 궁금했다. 친아버지와 인연이 끊어진 심정은 어떠할까. 그러나 그런 궁금함이 왠지 죄스러워 왕은 괴롭기도 했다. 김옥균이 당당히 장원급제하여 대궐에 들어왔을 때는, 처음 보는데도 내심 반가웠다. 왕이라 해도 자신은 하고픈 말을 다 하지 못하는데 언제나 주저함 없이 할 말을 하는 김옥균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라 안팎을 바라보는 눈과 조선의 앞날에 대한 생각이 같았고, 앞에서나 뒤에서나 외로운 처지의 왕을 도우려 애쓰니 미덥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박영효가 보기에, 조선이 변화하는 세계에 동참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은 가까운 일본에 의뢰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았다. 새 문물을 받아들여 옷차림도 머리모양도 달라진 일본은 서양인들처럼 세련되고 근사했다. 그 옛날 훈도시 바람으로 조선 해안을 드나들던 미개한 왜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웃나라가 문명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일본 또한 고립되기에, 이를 방해하는 청나라를 미워하고 그래서 조선을 돕고자 한다는 매끄러운 말도 그럴듯해 보였다.  조선수신사 박영효는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 그 가운데 얻게 된 확신을 왕에게 망설임 없이 전했다.

 

그들이 권하는 대로 둘러본 세계도 다르지 않았다. 세상은 온통 피부가 희고 힘센 서양인들의 것이었다. 그 밖에 작은 나라의 사람들은 설령 왕이나 귀족이라 해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양인들은 남의 나라를 허락도 없이 제집처럼 마구 드나들었고, 심지어 아불리가(아프리카)에 있는 애급에서는 금자탑 모양의 고대 왕의 무덤을 파헤쳐 놓고 구경거리로 삼았다.

민영익은 덜컥 겁이 났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개명 세상이란 말인가. 서양 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도 다 내력이 있어 보였다. 어차피 조선이 문을 열고 변화해야 한다면, 무례한 서양보다는 그래도 전통을 알고 사대부 양반을 아는 청나라와 손을 잡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하를 따르겠네.

다들 깜짝 놀랐다. 왕을 따르는 길은 곧 허망한 죽음의 길에 불과하다고 여태껏 이야기했건만, 홍영식은 끝내 그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모두 벗을 말렸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다며 함께 피신하기를 설득했다. 그러나 홍영식은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자네들 이야기가 맞네. 훗날을 위해 다들 떠나야 하네... 그러나 누군가 한 사람은 남아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일어났으며 무엇을 하려 했는가를 알려야 하네. 비록 우리들의 일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리 뜻만큼은 훗날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네. 전하를 두고 다 떠나 버린다면 우리의 진심을 누가 믿어주겠는가? 나는 끝까지 전하를 따르겠네.

 

이광수는 갑신년 정변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만약 갑신년에 작정했던 대로만 이루어졌다면 본토의 메이지 유신이 부럽지 않았을 텐데, 저로서는 참 안타깝습니다. 뜻을 이루지 못한 연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 지요?

나라를 빼앗긴 지도 이십 이 년째, 일본을 본토라 부르는 것도 익숙해진 때였다.

그럼! 메이지가 다 무언가? 일만 잘 되었으면 이조(李朝)도 제법 볼만했을 게야. 정권을 잡자면 상감을 꼭 붙들어야 하는데, 김옥균이가 어름어름하다 상감을 놓쳐 버렸지. 그래서 고만 실패한 것이라오.

박영효는 갑신년 정변이 실패한 책임을 김옥균에게 돌렸다. 이미 삼십여 년 전에 불운하게 세상을 떠난 사람이건만, 김옥균에 대한 박영효의 복잡한 감정은 생과 사를 초월한 듯했다.

 

 

1894년 8월, 박영효와 조선 망명객들은 그리던 고국에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김옥균이 홍종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지 불과 다섯 달 뒤였다.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김옥균은 목숨까지 걸었지만, 이들의 귀국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힘으로 거저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