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열세번째남자 5 / 강원준

2009. 8. 8. 15:32

오오--- 웃는 얼굴도---

내내 잡아 주고 있는 손도---

무슨 일이 있었든,

전부 괜찮아졌다는 증거지?

불안했던 마음 같은 건 잊어버리고 안심해도 되는 거지?

 

그러고 보면 원준이랑 사귀기 시작하고

진짜 데이트를 하는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아.

아! 이 얼마나 행복한 데이트란 말인가!

처음으로 원준이한테 받은 선물!!

할렐루야!

최고로 즐거운 날이얌!!

 

 

여기 말이야,

가을이 되면 잠자리가 파리 떼처럼 많아지는 거 알아?

--- 가을이 되면 꼭 같이 구경 오자.

 

꼭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마--- 그럴 순 없을 거야.

 

또 다시 고개를 드는 불안감.

원준이를 사귀면서도 내내 사라지지 않는 불안감은---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사라질 거라고 믿었어.

그래서 매일매일 수십 번 전화하고, 수백 번 문자를 날리고---

어떻게 해서든 네 옆에 있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 이곳에 없을 테니까.

미국에 가게 됐거든.

새봄이와 함께.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가 결정한 거야.

 

뭐?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야---?

 

너한테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몰라서---

그동안 니 전화나 문자에도 답을 하지 못했어---

이 손--- 끝까지 잡아 주지 못해서--- 미안해.

 

너를 좋아해.

너와 같이 있는 게 좋아.

정말 그러고 싶었어.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새봄이와 함께였어.

 

그래서---

옆에서 줄곧 새봄이의 불행을 지켜봐왔어.

내내 불행한일뿐인데도 한 번도 불평하거나, 화낸 적이 없고,

슬퍼서 울어도 누굴 원망하지도 않았어.

--- 너무 바보같잖아.

지켜보는 사람한테까지 그 고달픔이란 게 전해져 올 만큼---

그런 새봄이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울고 있을 때마다 언제나 말해 줬어.

혼자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언제나 함께 있어 주겠다고.

그 말이 약속이 되고, 결심이 되고, 등에 짊어진 짐처럼 되어버려서

벗어날 수가 없어.

그게 내 한계야.

 

새봄이랑 한 약속이 나보다 더 중요하단 말야?

그럼--- 그 얘길 하려고---

나한테 이러려고 오늘 하루 놀아준 거야?

이걸로 너랑은 끝이다 해서 기분이나 달래주려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내가, 네 웃는 얼굴을 많이 봐두고 싶다고 생각해서였어.

아마 이게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하니까,

널 볼 수 있는 있는 건.

네가 이런 날 용서해 줄 리 없잖아.

미안.

하지만 넌---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아이니까---

너한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하지 마.

안녕---

 

나한테 이러지 마.

그냥 그렇게 뒤돌아서 가 버리지 마.

 

참 이상하지.

처음 원준이한테 차였을 땐,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함참을 울고 또 울고,

밤새도록 울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왜 두 번째인 지금은 그때만큼 눈물이 안 나는 걸까?

그때보다 훨씬 더 좋아하게 됐는데,

그때보다 훨씬 훨씬 더 슬픈데.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안 돼 버리면,

모든 게 다 귀찮아져 버리나 봐.

슬퍼하는 것도, 우는 것도, 다 귀찮고 귀찮아.

하긴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내내 실패만 해왔는 걸, 뭐.

애초에 이런 내가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있겠어.

 

 

 

희소가 희소다워야 희소지!

 

다짜고짜 때려서 미안.

하지만 의뢰받은 일이라서.

어쨌든 이걸로 복수는 끝.

너 말야, 새봄이랑 미국에 간다며.

네 얼굴 보는 것도 이게 마지막일 것 같은데, 기념으로 한 대 정도는 맞고 가야지.

뭐, 맞을 짓을 하기도 했고.

도대체가 넌 예나 지금이나, 소중한 걸 지킬 줄 모르는 녀석이야.

그게 남이 됐건, 자기 자신이 됐건 간에 말이야.

 

어쨌든 난 너처럼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은 녀석은 이해가 안 돼.

분명 스스로에게도 상처가 될 텐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

 

베아트리체가 희소에게.

 

왠지 사랑이란 건 참 슬프고 잔인한 거구나.

왜 하필 너였을까 하면서도,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은 절대 이렇게 좋아하게 되진 못했을 테니.

그런데 그러면 또 서글퍼지지.

이렇게나 특별하고 세상에 하나뿐인 그런 사람인데---

왜 이루어질 수 없는 걸까--- 하고.

왠지 처지가 비슷하지?

너랑 나랑.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똑같은 마음을 받을 수 없다는 건,

역시 슬프고 화나는 일이잖아.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여 걱정 시키기도 싫고,

혹시나 부담이 될까봐 마음을 숨기는 것도 벅차고---

 

그러니까 내 말은,

자신에게 함부로 하는 건

상대방을 원망하기 위한 구실밖에 안 된다는 거야.

--- 그냥--- 그냥 이제껏 하던 대로 하는 거야.

넌 지금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해왔잖아.

이제 와서 과자 따위나 먹으면서 그동안의 노력들을 우습게 만들지 마.

모든 일에는 유종의 미라는 게 있는 거야.

좋은 기억이 되느냐, 나쁜 기억이 되는냐는 자기자신에게 달려 있어.

그러니까 우리 둘 다 좋아하는 사람들 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자.

 

드디어--- 원준이가 떠나기로 한 날이 왔습니다.

 

--- 진짜 왔구나.

그때, 너한테 새봄이와 떠난다고 얘기했을 때,

그게 너를 보는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었어.

다시는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넌 언제나 예상을 깨는 행동을 해.

 

그냥,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한 것 뿐이야.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마무리를 제대로 지어본 적이 없거든.

매번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채로

항상 마지막의 기억이 안 좋았어.

그래서 알고 있어.

아무리 좋은 기억이 있었다고 해도,

결국은 마지막 순간의 감정이

평생 그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는 걸.

 

하지만 그런 경험들 덕분에 알게 됐어.

진짜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

어떤 기분이 드는 건지.

가슴이 어떻게 뛰는지,

내 마음이 어디까지 열릴 수 있는지---

그런 걸 알게 해준 건 네가 처음이었어.

그러니까 역시,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슬퍼지지 않을래.

내가 가지게 될 너에 대한 기억이

마음 아프거나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만났기 때문에

나로서는 상처받는 것도, 상관없을 만큼,

있는 힘껏 좋아할 수 있었던 거니까.

그게 너에 대해 내가 가지게 될 기억이야.

그렇게 정했어.

 

앞으로는 네가 울 일 같은 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 문을 나가면,

이제 얀녕이구나.

솔직히 헤어지는 게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오늘을 돌이켜 기억했을 때,

눈물보단 미소가 지어질 수 있길 바라.

 

은희소의 열두 번째 사랑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가을이 왔습니다.

 

코스모스가 잔뜩 피고, 잠자리떼가 가을을 만끽하는 계절.

 

가장 소중한 것은 늘 바로 옆에 있다고들 말한다.

 

누군가에게 베아트리체에 관해 설명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매우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그건 물론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 왜 네 사촌이야?

--- 그래서, 진짜 그 녀석한테 여자라도 소개시켜 줄 셈이야?

그 녀석이 너한테 어떤 마음인지 알면서도?

 

게다가 뭐랄까,

요즘의 베아트리체는 예전과 달리---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난 지금껏 한 번도 베아트리체를 남자로 여겨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남자로서 이 녀석을 좋아하게 됐다는 게 도무지 와 닿지가 않는다.

'좋아하니까---'

그래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땐---

솔직히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이 명확했었다.

내가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

내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

하지만 지금은---

정말이지 얘를 뭐라고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단 말이다.

무엇보다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는 생각해 볼 문제라는 거다 =ㅅ=;;

다만

지갑을 탈탈 털어도 상관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베아트리체라는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라는 거다.

 

그러고보면 저는 은희소에게 정말로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은희소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마음이 사라지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희소가 그 사실에 꽤나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것 때문에 희소가 어색해 하는 건 정말 싫은 일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진 몰라도 언젠간,

자연스럽게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건--- 포기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구요.

제가 희소를 좋아하는 건,

희소에 대한 저의 수많은 마음들 중 하나일 뿐이란 말입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질 감정이니까요.

 

장황하긴--- 바보냐?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자라나고 커지는 거야.

결국 너도 알게 될 걸.

진짜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말이야.

 

베아트리체!

너두 잡아 봐! 소원 빌고 싶은 거 없어?

 

소원---?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이게 전부 다 내가 빌 수 있는 소원의 개수라면---

나는 무슨 소원을 빌고 싶은 걸까?

그때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하늘 가득 흩어진 낙엽들만큼 아무리 많은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단 하나의 소원이란 걸요.

소원을 빌고 싶습니다.

용기를 내고 싶어요.

 

어디 말해 봐.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면 뭐라도 들어줄 테니까.

 

내 소원은---

(희소에게 입을 맞추며) 은희소의 진짜 왕자님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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