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네--- 잇세.
선생님, 이 부스에는 들르지 않아도 되나요?
난 이런 이벤트를 둘러볼 때는 평론가가 아니라,
전혀 지식이 없는 일반인으로 오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지.
그렇다면 이 부스에는 들를 이유가 없어.
들를--- 이유가 없다?!
저 남자는 냉혹할진 몰라도, 쓸데없이 남을 멸시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아요.
녀석이 들를 이유가 없다고 들으란 듯이 중얼거린 데는 뭔가가 있는 거야---
그렇다면 네가 고른 와인과 요리는 어떻다는 거지?
네가 말하는 일반인은 어떤 수준의 고객을 말하는 거야?
확실히 저 부스는 인기가 좋아.
뭔가 있어.
그리고 그 뭔가는 우리 부스에는 부족한 요소야.
대체 뭐지?
우리한테 빠져 있는 '들를 이유'라는 게---?
나는 요리는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 나라만의 식재료, 향료, 조리법,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풍토가,
요리에 반영돼 있다고 봅니다.
본고장의 중화요리는 더 맛있고, 본고장의 프랑스 요리도 이보다 더 맛있을 거예요.
그런데 굳이 억지로 둘을 섞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섞음으로써 양쪽 모두의 개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중화요리와 와인의 마리아주를 위해 고심해온 하야시의 항변.
저 집 음식은 같이 마시는 와인이 부르고뉴든 보르도든, 절대 거슬리지 않아요.
리스트에 올려놓으면, 와인을 좋아하는 손님은 꽤 만족하며 마시고 갈지도 모르죠.
대신 이 음식은 와인을 빛나게 해 주지도 않아요.
음식을 돋보이게 만드는 와인도 여기엔 없어요.
비유한다면 대합실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낯선 남녀 같은 거죠.
서로를 방해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서로 소통하지도 않아요.
물론 마리아주는 기대할 수도 없죠.
저들이 시음용으로 준비한 와인도 맛은 있지만 강한 개성이 없는 것들이에요.
무난하게 맛있는 요리와, 무난하게 맛있고 음식을 방해하지 않는 와인.
이런 조합이면 손님을 오래도록 계속 끌지는 못해요.
금방 싫증낼 겁니다.
와인과 요리가 타인처럼 어색하게 한 테이블에 올라와 있어도,
거기에서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진한 감동이 결코 탄생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단 디저트에 오히려 달콤한 귀부와인을 매치시키는 것처럼,
서로의 강한 개성을 인정하고 그래서 더욱 가까워지는---
그런 조합이 바로 마리아주예요.
시즈쿠도 한 마디 한다.
하지만 덕분에--- 나도 깨달았어.
우리한테 부족하고, 그러면서 잇세의 부스에는 분명히 있는---
'무언가'라는 녀석의 정체를 말야.
오감에 호소하는 작전으로 나왔군.
예. 이탈리아 와인과 중화요리라니까 어제는 손님이 별로 몰리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유를 생각해 봤죠.
부스에 줄줄이 놓여 있는 프랑스 고급 와인의 빈 병을 보고,
고객이 시각적으로 이끌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지만 이쪽은 이탈리아 와인이라 지명도가 낮으니까 같은 방법을 쓸 수 없어요.
그래서 저쪽이 시각에 호소했다면, 우린 후각에 호소했던 거죠.
그래서 '아마로네'군요.
와인이 후각이면, 중화요리는 청각에 호소하는 거죠.
저 식욕을 자극하는 치이익 소리를 들으면 나라도 배가 꼬르륵하고 신호를 보낼 겁니다.
현장에서 직접 요리함으로써 소리뿐만 아니라 냄새까지 풍겨요.
그리고 '아마로네'의 향기와 섞여 신비한 공간이 생겨났어요.
음---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신기한 공간이야.
푸드 앤 와인쇼를 성공한 시즈쿠와 하야시네.
하야시네 부스를 다시 찾은 잇세가 맛보기를 원한다.
고마워요, 맛있군요.
흐흥! 막돼먹은 평론가 녀석,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
아뇨. 녀석은 지금 평범한 일반 고객이에요.
하지만 표정을 보면 알아요.
녀석은 분명히 이 마리아주에 만족했어요.
잇세의 동생인 세라에게 광고모델을 부탁하는 시즈쿠.
세라는 시즈쿠와 와인을 마시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신이 납득할 만한 말로 표현해주면 모델 일을 수락하겠다고 한다.
근사한 표현.
그리고 오빠인 잇세에게도 같은 와인을 마시게 하는데---
일단 블라인드로 마시고 싶어요.
재미야, 재미. 가끔은 괜찮잖아?
오빠한테 블라인드는 전혀 의미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아.
난 기회가 있으면 블라인드로 와인을 마시려고 해.
가격과 이름을 전부 잊고 마시면,
그 와인의 본질에 다다를 때까지 집중해서 깊이 파고들 수 있으니까.
와인의 세계로 다이빙한다---?
오빠답네.
--- 쳇~ 재미없어.
냄새만 맡고 바로 알았잖아.
이름을 아는 건 큰 의미가 없어.
이 근사한 와인 속에 숨겨진 이미지의 세계에---
네가 말하는 것처럼 다이빙하는 것이 중요하지.
근사한 표현인걸. 역시 오빠야.
칸자키 시즈쿠와 완전히 똑같은 표현---
설령 두 사람이 같은 수준의 뛰어난 감성을 갖고 있다 해도,
와인에 대한 까다로운 표현이 이 정도로 완벽하게 일치하다니---
역시 이 두 사람은---
완벽해요!
32병 모두 빈티지와 이름을 정확하게 알아맞히셨어요, 선생님.
그래?
하지만 계속해서 경험치를 더욱 쌓지 않으면 언젠가 실수하게 돼.
무엇보다 상대는 표고 4000미터인 마터호른에서
블리저드에 섞여 불어오는 몽라셰 냄새를 맡아낸 남자니까.
주제넘지만 제가 보기에 선생님이 그를 경계할 필요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호되게 몰아세우지 않아도 될 텐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싸우고 있는 대상은 그뿐만이 아니야.
더 무시무시한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나는---
'제 6사도'에 관한 내용을 읽겠습니다.
고독.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진정한 고독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내 주변에는 늘 따스함이 있었다.
정말로 힘들 때는 위로를 받고,
자만할 때는 엄격함 속에 내몰렸다.
그렇게 나는 살아왔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나는 버림받은 음유시인처럼 어둠 속을 걷고 있다.
처음 맛보는 고독에 떨면서---
문득 멈춰 서자
어느새 칠흑 같은 하늘은
짙은 쪽빛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곳은 눈이 미치는 한,
움직이는 것 없는 조용한 영역.
그 세계에는 고요한 샘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까닭에 수면을 쓸고 가는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없다.
갈증을 풀어주는 샘도 없고
초조함을 다독여 주는 바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있고, 치유가 있고,
무엇보다 거기에 몸을 맡기는 듯한 평온함이 가득하다.
천천히 밝아오는 어스름 너머에,
부드럽고 안도감으로 충만한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다.
신비에 싸인 그림자는
이윽고 희미한 빛의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잔월처럼 몽롱하게 떠오르는 그 모습은,
엄숙하면서 자애로움으로 넘친다.
그 물체는 사람이면서 우주다.
그 눈은 내리깔고 있으나,
모든 것을 응시하고 있다.
그 손가락은 영원한 사유를,
이야기한다.
일어서는 것도 아니고
마냥 앉아 있는 것도 아니며,
말하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니고,
그저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으며,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니다.
태양도 아니고 달도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받아들여 준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조용히 품어 주려 한다.
무심코 다가간다.
사랑하는 자식처럼
사랑받는어머니처럼.
고독이 실린 내 어깨를 끌어당기는 것 같아서,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나는 걸어간다.
뺨을 갖다댄다.
안식을 구하며.
그리고 묻는다.
나는 무엇을 하면 좋습니까?
이 앞에 있는 몇 년의 세월을 더 살아내는 것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이 와인은
고뇌하는 자의 질문에---
묵시로써 답해 준다.
잇세와 세라의 엄마--- 가 일본에 왔다.
시즈쿠의 아버지인 칸자키의 묘소를 찾은 그녀.
12사도와 신의 물방울.
유타카 씨, 당신은 누가 이기길 바라나요?
아니면, 혹시 이 싸움의 의미는--- 그러면---
괜찮아요, 시즈쿠 씨?
괜찮지 않아.
제 6사도는 내 수준을 완전히 넘어섰어.
로베르 영감님.
아버지가 보고 있던 세계가, 영감님 눈에도 보입니까?
큭큭. 네 눈에는 안 보이더냐?
난 보인다.
너한테도 보일 텐데?
찾아내겠어요, 나도.
그게 아버지라는 사람 자체에 다가가는,
단 하나뿐인 수단이니까요.
미륵보살상을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 아니에요?
아니. 난 보러 가지 않을 거야.
제 6사도에는 다른 식으로 접근해 보려고.
왜요?
아버지는 글 속에서 아무것도 찾고 있지 않았어.
그런 와인이 아니라고 생각해.
잇세 씨는 어쩌고 있을까?
잇세의 머릿속에는 이미 제6사도가 있을 거야.
녀석이 마셔온 수많은 와인 중의 하나로.
다만 그것은 사막의 모래알 같아서, 아주 막연한 존재야.
잇세가 사도에 다가가려고 할 때
늘 거기에 표현돼 있는 무언가를 직접 만나러 가는 것은,
녀석에게 사도 찾기는 확인작업이기 때문이야.
지금이면 틀려도 처음으로 돌아갈 다시 시작할 수 있어.
하지만 아까처럼 턱을 괴고 앉아 고민만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와인은 마셔야 의미가 있는 거야.
마시지도 않고 생각만 하거나 말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왜냐하면--- 와인은 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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