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랑

그 남자의 책 198쪽

2008. 10. 29. 09:08

오랜만이었다.

그랬더니 공원에서 꽃범의 꼬리가 꼬리를 감추어버렸다.

그래도 뭐.

내년 이맘쯤이면 또 볼 수 있을 것이고,

비슷한 빛깔의 벌개미취가 산뜻하게 피어올라 있으니까 괜찮아.

여기저기 잎들은 한껏 색조화장에 여념이 없는데,

그저 밋밋한 얼굴은 나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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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과 책의 공통점은?

1. 보고 있으면 자고 싶어진다.

2. 침을 바를수록 잘 넘어간다.

3. 가을에 더 보고 싶다.

 

 

 

영화에서 은수가 말했다.

그런가?

가을이 되면 더 보고 싶어지는 것이 또 있다.

영화!

그것도 감성을 콕콕 찔러주는 은근한 멜러물.

여전히 제목에 혹, 하는 나쁜 버릇.

그래서 '사과'를 보지 않고 ''그 남자의 책 198쪽'을 택했다.

그것도 나 혼자 보는 걸로.

기억이 맞다면 혼자서 영화를 봤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덤덤한 용기.

 

2008년 제 14회 부산국제영화제초청작이었다.

원작소설이 있었다.

몰랐다.

초청작이었다는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원작이 있었다니, 쩝.

 

사랑을 기억해도 될까요---

 

떠나버린 사랑은 추억이고 집착일 뿐이다,

라고 말한다.

그래서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기억하지 않더라도 그대로 묻혀서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리는 '지나간 사랑'.

그것을 굳이 기억해내려 한다면 그건, 집착이 돼버린다.

그렇다고 그때 그렇게 절실했던 사랑이,

떠나버렸다고 해서

남겨진 나는

그것을 그저 한때의 버둥거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지. 결코.

 

다만 인정하자.

고집 피우지 말고 떠나버린 사랑에 예의를 갖추는 거야.

그러면 모든 게 아름다워지겠지.

나를 휘감았던 과거의 열기를 추하지 않게 가라앉힌다.

가라앉은 마음을 쓰다듬고

그래, 은수처럼 '잘 먹고 잘살아라'라고 홀가분하게 말해주자.

그러면 되는 거다.

그렇게 내버려 두고, 새로운 사랑에 저항하지 말자.

 

은수야, 잘 했어.

그와 함께 찍었던 사진을 버리지 못하고

포스트잇으로 가려서라도 거울 앞에 붙여두고 싶은 미련이 

얼마나 미련스러운 일인지.

떼어내버린 건 잘한 거야.

 

준오도 잘 했어.

사랑을 찾아줄 단서라는 건 무의미해.

찢어버리고 일어서는 거야, 불끈.

새롭게 다가오는 사랑을 잡을 수 있어야

아팠던 과거의 사랑도 

네 몸에 흐르는 혈액을 따라 잔잔하게 스며들어

너를  따뜻하게 숨쉬게 할 테니까.

 

과거의 그 여자, 민경이 두고간 흔적, 연체된 책에는 198쪽이 없었다.

196쪽에서 멈춰버린 책의 다음 쪽수들은 어디로 갔을까.

 

000책 198쪽을 봐.

너에게 주고 싶은 내 마음이 거기에 있어---

 

198쪽의 행방은 어디에 있을까?

 

윤성희 단편집 [거기 당신]에 수록된 [그 남자의 책 198쪽]에 있지 않을까.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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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작가는 "페이지의 숫자에 의미가 있진 않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신의 인생에 또 다른 페이지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 여주인공이 198쪽만 찾는 남자를 만나, 새로운 199쪽을 넘길 수 있기를 바랐다"고 제목의 숨겨진 의미를 밝혔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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