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파한집 1 / 윤지운

2008. 7. 1. 10:20

봄 밤, 낙성에서 피리소리를 듣고

                                                              

이백

 

누가 부는 것인지 피리소리가 밤하늘을 날아,

봄바람에 흩어져 낙성 가득 퍼진다.

이 밤, 들려오는 노래 중 절양류의 곡,

누구라 제 고향을 그리지 않을까.

 

 

 

파한집은

한가로움을 깨뜨리는 이야기 책.

고려 문인 이인로의 시화집이자 비평서이며, 잡록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의 주된 배경은 중국 당 현종 천보연간이다.

 

 

<나오는 사람>

주유, 자는 백언

아버지가 유명한 도사였던 탓에 그 재능을 어느 정도 이어받아 가업?을 잇고 있다.

직업상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 검술을 익히거나 몸을 단련하는 것이 귀찮아

호연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져 곁에 두고 있다.

 

원위, 자는 호연

무인 집안의 아들로 나름 탁월한 무예를 지니고 있다.

가족은 없고, 얼떨결에 백언에게 일신을 의탁하고 있는 중.

가끔 '내가 뭐하러 이 사람에게 붙들려 혹사당하고 있나'를 고민할 때가 있는 듯하다.

 

 

제 1편 恨 한

 

요괴 퇴치물에 있어 '한(恨)'이란 빼놓을 수 없는 요소.

동양의 의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 '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형태로,

여러가지 의미로 제법 다루게 될 듯하다.

 

한이란 얽매여 움직이지 못하는 마음.

한 곳을 맴도는 마음은 곧 슬픔이 되고

슬픔마저 붙들려 갈 곳을 잃으면

그것이 원망이 되어 사람을 해치게까지 되는 법.

때문에 스스로 견디지 못할 남의 원한을 샀다면 스스로 그것을 갚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갓 미물의 한도 그렇게 무서웠는데

하물며 사람의 한이야---

 

 

제 2편  壽 목숨

 

목숨을 늘여달라고 부탁한다는 걸명(乞命) 소재는 고전설화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수명이 늘어나는 것과 복록을 누리는 것,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닐까 한다.

 

쓸데없는 짓이야.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좋아.

죽는 것이든, 사는 것이든.

주어진 만큼이 가장 적당한 법이지.

 

부모가 정성으로 늘여놓은 목숨은 그저 고꾸라져 죽는 것만 못한 세월이 될 테니

과연 부모의 애정이란 독이 될 때가 있는 게로군.

 

 

제 3편  弧 여우  狐아닐까?

 

'혀 잘린 참새'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에피소드이다.

'거짓말을 하고 식량을 훔쳐먹은 참새가 애초에 원흉아니냐'하고 생각한다.

글쎄, 할머니가 뭔 죄냐고.

 

사람의 애정이나 진심에서 나온 걱정은

인간 거죽을 뒤집어쓴 여우의 살기어린 교태만도 못한 것이냐.

 

인간의 마음은 허망하구나.

허망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제 4편  鳥 새

 

중국은 워낙 넓은 나라라 아무 지명이나 갖다 쓸 수 없어서 중국지도를 샀는데,

과거의 지명과는 큰 차이가 있어 고생하였다.

병주자사는 물론 가공의 인물로 당시 병주자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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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새'에서 절제된 마음이 참으로 아련했다.

우와~ 갑자기 이인로의 파한집이 읽고 싶어진다.

 

 

이인로(李仁老)

1152(의종 6)∼1220(고종 7).

고려 무신집권기 때의 문인. 본관은 경원. 초명은 득옥. 자는 미수.


가문은 무신란 이전 고려 전기의 3대가문의 하나였던 경원 이씨로, 누대에 걸친 왕가의 외척으로서 부동의 문벌을 형성해왔지만,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자, 화엄승통(華嚴僧統)인 ‘요일’이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켰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나, 1170년(의종 24) 그의 나이 19세 때, 정중부가 무신정변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는 말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그 뒤 환속하여 25세 때에는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학습하였고, 1180년(명종 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이때부터 임춘·오세재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 과거의 시관)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으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열전(列傳)에서 그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라고 평한 것은,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상과 현실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저술로는 《은대집》·《쌍명재집》·《파한집》 등이 있다고 하나, 지금은 《파한집》만이 전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따옴)

 

파한집

목판본. 3권 1책. 규장각도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260년(원종 1) 저자의 아들인 세황()이 엮어 간행하였다.

 

명유()와 학자들의 시문이 인멸될 것을 슬퍼하여 이를 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파한집》이라는 제목 그대로 문인의 파한적()인 문담()이며,

 

시화() ·기사() ·자작시()와 아울러

 

신라의 옛 풍속 및 서경(西)과 개경()의 풍물() ·궁궐 ·사찰 등이 재치 있게 소개되어 있다.

 

작자가 보고들은 일화()와 문우() 교제에서 주고받은 문담을 

 

해학적인 수법으로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고대소설의 태동기에 패관문학()으로서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고려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이는 한국 최초의 비평문학서로서도 가치가 있으며,

 

고려시대의 각판() 잔존본()으로 소중한 것이다.

 

후일 최자()는 이 책을 본떠서 《보한집()》을 썼다. (네이버 백과사전)

 

 

경계의 시대… 구귀족과 사대부의
대숲 아래 깨진 술판

열 아홉 살의 청년 이규보는 1186년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런 제안을 받았다. “우리 모임의 오세재(吳世才)가 경주에 놀러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자네가 그 자리를 메워주겠는가?” 이담지의 초대에 대해 이규보는 “칠현(七賢)이 조정의 벼슬입니까? 어찌 빈자리를 보충한단 말입니까? 혜강(?康)ㆍ완적(阮籍) 뒤에 그들을 계승한 이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비꼬듯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던져진 ‘춘(春)’과 ‘인(人)’ 두 자를 운으로 삼아 시를 지었다.

 

‘영광스럽게도 대 아래 모임에 참석하여(榮參竹下會)/ 유쾌하게도 독 안의 봄에 자빠졌네(快倒甕中春)/ 알지 못하겠네 칠현 가운데(未識七賢內)/ 누가 오얏씨를 뚫은 분이신지(誰爲鑽核人)’

 

이 시는 동석자들을 대단히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는 무신란(1170년) 이후 진나라 죽림칠현을 본뜬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던 이들 문인들의 자부심을 여지없이 짓밟은 것이었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이 자기 집 오얏나무 씨를 남이 가져다 심을까 봐 오얏을 먹은 후 늘 송곳으로 씨를 뚫어서 버렸다는 고사를 끌어와 시비를 걸었으니 말이다.

 

이규보 스스로 작성한 ‘백운소설(白雲小說)’의 현장보고서에는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인로는 아마도 배알이 뒤틀렸을 것이다. ‘어린놈이 재주만 믿고 까부는군. 우리를 이따위로 비웃다니!’ 그러나 이규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나하게 취해 거만한 태도로’ 나와 버린다.

 

고려 전기와 후기의 경계에 살던 두 사람, 각각 문벌귀족과 신흥사대부를 대표하는 문학사의 라이벌 이인로와 이규보는 이렇게 만났다. 35세 이인로와 19세 이규보의 만남, 12세기 말 고려 문인지식인 사회의 상징적 축도(縮圖)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술판이 깨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옛 사람의 문장을 갈고닦는 '用事'의 정신을 문학에 구현

현실부정의 보수성향 강해

 

이인로(李仁老)


1152년에 나서 1220년에 세상을 떠났다. 문종에서 인종까지 7대 80년 동안 권력을 장악했던 경원(인주) 이씨의 후예이다.

 

정중부의 난 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칼날을 피했다. 5년 후 환속하여 경대승이 권력을 잡고 있던 명종 10년(1180년)에 장원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지만 구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죽림고회를 결성해 중심 인물로 활동했고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했다. 특히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은대집(銀臺集) 후집(後集) 쌍명재집(雙明齋集) 등 문집이 여럿 있었지만 현재 전하는 것은 아들 세황이 엮은 우리나라 첫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뿐이다.

 

문벌 귀족과 신흥 사대부

 

대나무 아래로 이규보를 초대한 문인들은 이른바 죽림고회(竹林高會) 멤버들이었다. 오세재, 임춘(林椿), 황보항(黃甫抗), 조통(趙通),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그리고 이인로(李仁老). 나이로는 오세재가 좌장이었지만 문학으로는 이인로가 대변인 혹은 대표였다. 이들은 모두 고려사의 분수령이 된 무신란으로 몰락한 옛 문신귀족의 후예들로 ‘무부(武夫)’들이 지배하는 현실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들은 죽림칠현이 그랬듯이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부정의 정신을 지니지는 못했다. 이들은 애초에 확고한 세계관적 선택에 의해 죽림에 자리 잡은 인물들이 아니라 무인들의 칼날에 밀려 쓴 잔을 마시고 있던, 한때는 ‘잘 먹고 잘 살던’ 세력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죽림(竹林)은 옛 영화를 동경하는 공간이었지만 한편으로 그곳은 무신들이 지배하는 개경의 풍림(楓林)을 향한 욕망이 감춰진 모순된 공간이었다. 이들의 냉소는 아마도 개경을 향한 욕망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명종 10년(1180년) 과거를 통해 이미 관직에 나가 있던 이인로는 이들 가운데 풍림을 향한 욕망을 가장 먼저 실置?인물이었다.

 

그러나 이규보의 출신 성분은 문벌귀족이었던 경원 이씨의 후예 이인로와는 전혀 달랐다. 부친 윤수(允綏)가 호부낭중(戶部郎中)이라는 재경 관료의 지위에 있었던 것이나 고향 황려(여주)에 조상 전래의 가전(家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분명 이규보는 막 개경으로 진출해 조금씩 기반을 형성해 가던 신흥 세력의 일원이었다.

 

스물 세 살 때 예부시(禮部試)에서 낮은 등수로 뽑힌 것이 못마땅해 사양하려고 했다가 부친에게 크게 꾸중을 당한 일화도 이 같은 집안의 성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이규보에게 문벌귀족에 대한 적대의식, 나아가 강한 현실지향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을 지녔던 이인로와 이규보의 충돌, 그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 귀족과 신흥사대부의 충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답습넘어 새로운 뜻을 표현 현실지향적 '新意'를 중시

신흥세력의 자신감 보여

 

이규보(李奎報)


1168년에 나서 1241년에 별세했다. 막 서울로 진출하기 시작한 중소지주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기동(奇童)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재주가 있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는 별명이 말하듯 두주불사, 활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했다. 또 침입한 몽골군을 진정표(陳情表)로 물리칠 정도의 문장가였다.

젊어서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하는 시를 쓰기도 했지만 명종 20년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간 후 최충헌의 환심을 사서 출세길에 오르면서 현실 비판이 약해진다. 백운소설(白雲小說), 동명왕편(東明王篇) 등 그의 작품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모두 정리돼 있다.

 

용사와 신의_두 시대의 충돌

 

이들의 라이벌 관계를 잘 드러내는 것이 문학창작 방법론이다. 최자(崔滋)는 ‘보한집(補閑集)’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인로는 “나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황정견, 소식 두 사람의 문집을 읽은 뒤에 말이 굳세고 운이 맑은 소리를 내게 되었으며 시 짓는 지혜를 얻었다”고 했는데, 이규보는 “나는 옛 사람을 답습하지 않고 신의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두 사람이 들어간 문이 다르다고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같은 문으로 들어가 다른 문으로 나왔다는 것이 최자의 생각이었다. 옛사람의 문장과 뜻을 읽고 배우는 것은 같지만 이인로는 옛사람의 문장과 문체를 갈고 닦아 자신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상태를 지향했고, 이규보는 답습을 넘어 생경하더라도 새로운 뜻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최자가 지적하고 있는 문이 바로 ‘용사(用事)’와 ‘신의(新意)’라는 다른 문이다.

 

본래 한문학은 정해진 틀이 있는 규범적 문학이기 때문에 용사 없이는 시를 창작할 수 없다. 하지만 용사만으로 창작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도 없다. 규범적 한시에서나 자유로운 현대시에서나 새로운 뜻의 표현, 새로운 의미의 발견은 시의 당연한 이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인로가 용사만이 아니라 신의를 말했고, 이규보가 신의만이 아니라 용사를 언급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인로가 용사를 강조하고 이규보가 신의를 중시한 차이를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들어간 문이 아니라 나온 문이고, 나온 문의 차이야말로 그들의 정치적 위치나 세계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규보가 친구 전이지(全履之)에게 보낸 답장에서 “소동파의 시를 읽고 좋아해서 해마다 과거의 방이 나붙은 뒤에 사람들이 모두 올해에 또 서른 명의 동파가 나왔다”고 떠든다고 했듯 당대의 주류 시풍은 소동파 따라가기였다. 이인로 역시 ‘보한집’에서 “문을 닫아걸고 깊이 틀어 박혀 황정견ㆍ소동파를 읽은 후에야 말이 힘차고 운이 또랑또랑해져 시를 짓는 삼매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규보는 소동파 본받기를 일삼고, 또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당대의 시풍이 탐탁치 않았다. 그래서 이규보는 시는 뜻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말을 꾸미는 것은 그 다음인데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이 말을 꾸미는 일에만 공을 들인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규보는 용사에 대해 글 도둑이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과거에 묶인 이인로, 내달리는 이규보

 

용사와 신의, 두 창작방법론은 적어도 이들의 시대에는 방법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에게 그것은 그들이 속한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관직을 위해 자기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구 귀족 이인로가 보수적 용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면 현실을 긍정하면서 자신 있게 내달리던 신흥 사대부 이규보는 신의라는 칼날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라이벌의 대결은 어쩌면 이미 승부가 결정되어 있는 한 판이었다. 어느 세계에서나 구세대는 신세대에게 밀리기 마련이다. 더구나 구세대가 새로운 현실에 대안을 제출하지 못할 때 패배는 결정적일 수밖에 없다. 두 중세 지식인을 부딪치게 했던 용사와 신의에 대한 우열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우리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대에 있어 우열은 분명했다. 이인로와 그의 시대가 이규보와 그의 시대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지 이인로가 나이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조현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다음 블러그 '한류와 머천다이징'에서 퍼옴)

 

 

이규보의 시 한 편 (아! 그렇구나 우리 역사 고려2 , 윤경진)

 

강화 천도를 찬양하며 이 곳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는 믿음을 담은 시입니다.

몽골군의 말발굽에 백성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국토는 만신창이가 되고 있을 때,

어떤 마음으로 이규보는 이런 시를 썼을까요?

권력의 보호 아래 영화를 누리며 그 권력자를 찬양하는 데 익숙해져 버린

당대 최고 문장가의 서글픈 초상화라고나 할까요?

읽는 이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천도한 것을 뒤늦게 경축함 (이규보)

 

천도는 예부터 하늘 오르기만큼 어려운데

공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 왔네

청하(최우를 가리킴)께서 계획을 서두르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는 벌써 오랑캐 땅 되었으리

크고 튼튼한 성에 한 줄기 강이 둘렀으니

그 공력을 어디에 비길 것인가

천만의 오랑캐 기병이 새처럼 난다 해도

가까운 푸른 물결도 건너지 못하리

강산 안팎에 집이 가득 들어찼으니

옛 서울 좋은 경치도 이보다 더하겠는가

강물이 견고한 성보다 나은 줄 안다면

덕망이 강물보다 나은 줄도 알아야 하리

 

 

고려 정부가 강화도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몽골은 응징에 나섭니다.

이때부터 몽골군의 무차별 공격이 시작됩니다.

대구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린 때도 이때였지요.

 

 

후~ 친일 문인을 떠오르게 한다.

2580에 나왔던 작가 이문열의 비껴가는 말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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