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의 등에 업혀 오랫동안 걸었다.
나는 내 숨조차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무기력에 빠졌다.
방황보다도, 나태보다도, 18세의 그 무기력함이란--- 죽음처럼 무거운 것이다.
--- 상처는 익숙하게 매어져 있고, 통증도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지금의 무기력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기차와 흔들리는 배에서 기댈 곳을 세워주던 어깨가 다이임을 알고도 나는 무기력 때문에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 청춘의 무기력, 그것처럼 무서운 말이 어디 있는가---
아주--- 오래간만에 평화롭게 눈을 떴다.
그건 아마도--- 이 녀석 때문---
걱정 마. 앞으로 내가 너의 방타조끼가 되어줄게.
그럼 항상 같이 움직이는 거야?
그래---
따뜻함으로도--- 내게 상처주는 눈--- 멀어지면서 다가오고--- 가까이 오면서 사라진다---
너, 알고 있니?
뭘?
너 어느새 불량아로 전락해 있다는 거--- 공부 잘해도, 문제아는 문제아야!
왜 그렇게 불쌍한 표정으로 쳐다봐?
넌 사랑을 하면 그렇게 모든 걸 거니?
그게 어때서. 네가 내 맘 알아? 나 여기 계속 있을 생각인데---
산장에서 여유를 찾은 다이와 제희.
이곳에서 잡은 그들의 안식이, 사랑이, 성장이, 미래가--- 안정된다면 좋은 텐데, 감격스러울 텐데!
그러지 못할까봐 조바심이 난다. 아련해진다.
나는, 새삼 예고 없이 다이에게 끌려가 극진파의 멤버가 되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뒤로부터 내 의식은 완전하게 다이의 생각들로 지배당히기 시작했고,
그 감정들이 너무 아프고 처절하여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을 때, 날 위로해주던 한 편의 시가 떠올랐다.
그것은 [담쟁이 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 나호열]라는 제목의 시였다.
혼자서 서지 못함을 알았을 때 그것은 치욕이었다.
망원경으로 멀리 희망의 절벽을 내려가기엔
나의 몸은 너무 가늘고 지쳐 있었다.
건너야 할 하루는 건널 수 없는 강보다 더 넓었고 살아야 한다.
손에 잡히는 것 아무 것이나 잡았다.
그래
지금 이 높다란 담장
기어오르는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야.
흡혈귀처럼 붙어있는 것이
이것이 나의 사랑은 아니야.
살아온 나날들이 식은 땀 잎사귀로 매달려 있지만
저 담장을 넘어가야 한다.
당당하게 내 힘으로 서게 될 때까지
사막까지라도 가야만 한다.
태어난 곳을 그리워하면서도
더 멀리 달아나는 생명의 원심력
나랑 같아. 널 사랑하는 내 모습 같아.
다이의 툭 뱉어낸 표현이 낙엽 되어 툭툭 내 심장 위에 떨어졌다.
다이--- 우린 닮은꼴이었구나!
제희는 상처가 덧나 통증이 심해졌지만, 조금이라도 다이와 더 있고 싶은 마음 때문에 참는다.
왜, 죽음이란 단어가 내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부서질 듯 가혹한 통증 때문일까?
아니면 완전할 수 없음에, 우리의 사랑이 지쳐가는 것일까?
고열에 시달리는 제희를 병원에 데리고 가려는 다이와 막무가내로 만류하는 제희.
그냥 내 옆에 있어줘. 일 분이 아깝지도 않니?-- 나--- 형편없지? 지금 이 모습 말야.
넌 네가 매력 있는 줄 아나 본데--- 나니까 널 좋아하는 거야.
그래, 나도 너니까 좋아하는 거야.
새벽이 왔지만 제희의 열은 식을 줄 모른다. 정말로 자연발화되는 거 아닐까!
깃털처럼 내리는 바닷가의 눈을 맞으며 다이의 품안에 고즈넉히 쓰러진 제희.
나 말이야. 그때 철길에서 죽음을 경험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내 나이에 건방지게 잠시 삶을 알 것 같았어.
그런데 삶이란 게 말이야. 감정에 빠져살아보지 않고 어떻게 알겠어?
아무런 감정 없이 사는 삶이라는 게, 과연 산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런데 그 감정이 열정으로 둔갑할 때, 비로소 삶이 숨을 쉬는 것 같더라.
그래서 말야--- 네 말대로, 멈추지 말고 끝까지 추는 거야. 멈추지 말고 끝까지 추는 거야.
어느새 성큼 나의 회복과 함께 일상들도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엄마는 내 상처에 대해 그 어떤 질문도 안 하셨다.
아마도 내 상처만큼 엄마의 가슴에도 상처가 생겼을 것이다.
나의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다이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다이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리움이란 열병이 불안조차 느낄 수 없게 눈 밑으로 파고 들었다.
나는 곧 퇴원을 했고, 그해 겨울 내내 다이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다이를 찾아다녀야만 했다.
나는 다이와 함께 머물렀던 산장을 자주 찾아갔다.
언제나 굳게 닫혀있었건만, 산장 앞에 가면 그 안에 다이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외에도 다이와 함께 머물던 곳은 어디든 다 가보았지만,
언제나 돌아올 때는 서글플 정도로 처참한 그리움과 함께였다.
특수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미사선생님을 찾아갔다.
다이에게서 온 미사선생님 생일축하카드.
아무런 내용도 없었지만 그건 다이의 양심고백서일 것이다.
나는 다이의 편지를 보자 참을 수 없이 다이가 그리워졌다.
나는 종종 길을 가다 멈추고 다이를 발견한다.
하지만 쫓아가진 않는다.
그였다면 어딘가에 숨어서도 먼저 나를 찾아낼 테니까.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몇 번째인지 모를 이 산장의 길을 오를 때면,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이야, 잘 있니? 보고 싶다! 사랑한다---
오늘도 제희는 그리움을 열어 다이의 흔적을 찾는다.
사람이 있다. 사람이, 설마--- 산장에 사람이 있었다.
미국에서 다이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를 기다렸다고 한다.
다이의 소식을 전해주고, 다이의 감정을 말해준다.
이 사람, 누굴까?
저 모습, 낯설지만 낯익은 몸짓들.
우리는 다이라는 한 사람을 동시에 공유하며 그와의 서로 다른 추억을 나누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사람은 어째서 다이의 속마음까지 알 수 있는 거지?
너는 다이지? / 그럴 리가 없잖아. 이렇게 다른 모습인데. /
너는 다이가 분명해. / 아니래두--- 너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 땜에 감상에 빠지진 마.
묻고 싶은데 대체 다이는 너의 뭐야? / 전부. / 다이와 똑같은 말을 하네. 잠깐 포옹해도 될까?
저기 말야, 놀라운 얘기가 있는데, 다이가 그러는데,
어느 해인가, 공항의자 밑에 네게 줄 편지를 붙여놨대.
그걸 보면 네가 어떻게 할지 알 거라고 말했어.
어디에 있지? 어디!
있다! 믿기 어렵다. 몇 년 동안 무사히 붙어 있다니.
나는 읽기도 전에 벅차오르는 감격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접은 종이를 폈다.
거기에는 감격과 그리움으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다이의 흔적이 있었다.
급하게 휘갈겨 썼지만 아직도 꿈틀거리는 듯한 다이의 메시지는
시공을 초월하여 속삭이듯 이렇게 써 있었다.
제희야, 내가 어디에 있든
날 찾아서 너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라!
죽음을 불사할 나의 사랑에게.
눈물의 정체를 나는 알 수 없었다.
이것이 감격의 눈물인지, 혹은 아픔 때문인지, 기쁨 때문인지,
그저 눈물의 홍수가 내 몸에 굽이굽이 넘쳐 흘렀다.
그리고는 이 넓은 지구에서
오로지 한 사람으로 존재할 다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제희가 다이를 찾아서 미국으로 떠난지 다섯 달쯤--- Let 다이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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