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 맞다.
제희 친구라는 그 아이가 늦은 시간에 제희를 찾아왔다.
욕실에서 뒤엉킨 다이와 제희.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완벽하게 통한다는 것---
나는 왜 완벽하게 네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일까.
제희가 묻고, 다이가 대답한다.
괜찮아. 내가 네게로 가니까---
이번에 또다시 다이의 살갗에 내 몸이 닿는다면 난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이는 내가 알 수 없는 침통한 표정으로 나와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저 쏟아지는 샤워기가 다이의 눈물처럼 보이듯--- 그렇게---
우리 할머니 죽.었.어. 우리 할망구가 뒈졌다구!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어.
그것은 다이의 슬픔이다.
다이가 말하는 그 천사 같은 할머니는 이제 다이를 더 이상 위로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앞으로 다이의 방황이 분홍신처럼 영원히 쉴 수 없다는 뜻이다.
다이에게--- 세상의 따뜻함이 식어버렸음을 뜻한다.
그, 모든 것에--- 다이는 자신을 던져버릴 정도로 분노했음을 뜻한다.
제희 엄마가 알아버렸다.
충격으로 숨이 멎을 것 같다.
여보--- 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우리 제희--- 아직도 이렇게 품안의 자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충격이 너무 무거워서--- 너무 무거워서--- 제희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
나루의 밝고 구김없는 모습에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은형에게 당연한 수순처럼 어둠이 왔다.
학교에 소문이 나버렸다. 은형의 상처가 다시 벌겋게 열렸다.
원래 그래. 원래 그렇다니까.
자신이 가장 숨기고 싶은 이야기일수록,
타인들은 열광한다. 그리고 흘리고 싶어 한다.
누군가 눈물로--- 절망으로 묶은 비밀을---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지--- 고통만 남겨두고 말야.
그리고 나면--- 뒤를 닦은 휴지처럼 사람들의 발밑으로 떨어뜨려 무심코 짓밟지.
절망으로 묶은, 누군가의 비밀이란, 타인에겐
원래 그저 그런 수다꺼리일 뿐이야.
나--- 나--- 나--- 살고 싶지가 않아!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누나, 웬일이에요?
--- 보고 싶어서--- 오늘 아니면--- 죽어도 말 못할 것 같아서 왔어.
네?
사랑해. 오랫동안---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었어.
누나--- 무슨 말인지---?
널 사랑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무거웠는지, 다시는 널 보지 못해도 좋아.
왜 하필--- 저 같은 놈이에요.
널, 처음 본 순간부터였어. 그날의 너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어. 멈춰지지 않았어.
내겐--- 그저---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나는 --- 그런 사람이 있어요.
어쩐지 평생동안--- 되풀이 될지도 모르는--- 그런 사랑이에요.
그만---충분해. 나, 지금 네게 얘기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고 있어.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다.
저렇게 눈물을 흘려야 할 정도로 우린 사랑에 쉽게 빠져버리는 것인가?
나는, 새삼 사랑이란 이름의 잔혹성에 놀라고 있었다.
사랑은--- 이렇게 깊고 넓은데---
왜 필요한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 줄 수 없는 건지---
왜 그 사랑의 깊이 만큼, 그 만큼의 아픔을 주는 것인지---
윤은 누나의 터지기 시작한 울음은 가늘게 오래오래--- 이어졌다.
마주보기가 어려운 사랑은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
다이와 제희의 사랑이 벅차만큼 윤은의 사랑은 서럽다.
너, 아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놔야 하는 거래.
언제가 마지막 순간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래---
제희의 말에 다이가 받아친다.
말 따위가 뭐가 중요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지 않는 게 중요하지. 다 개소리야!
아름답다.
나는 투명한 땀이 초콜릿 색의 다이의 피부위에서 모래알처럼 반짝거리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 흉터가 훈장처럼 빛나는 다이의 피부를 쓰다듬고--- 태양처럼 빛나는 그의 두 눈에 입맞춤을 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그리고 더위만큼--- 사랑은 끝도 없이 차올랐다.
널 사랑한다. 그리고 널 경애해. 너를--- 널--- 나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그냥 다이와 있을 때면 습관처럼 치미는 비애인지도 모른다.
--- 우리 약속하자! 우리의 끝이 온다고 해도 그건 우리가 사랑을 잃지 않을 때여야 한다는 거---
너는--- 우리의 사랑이 닳아 없어져버릴 것 같이 보이냐?
나는 우리의 사랑이 너무 외로운 것 같아--- 너무 아파---
마치 고통으로 범벅이 된 축제같이--- 이렇게 불안한 것인가!
듣기 싫어! --- 다이가 제희의 입술을 깨문다.
말했잖아. 널 먹고 싶다구. 정말 하마터면 널 먹을 뻔했어.
그게 우리의 끝이야. 네가 나에게 먹히는 그 순간이---
멋지다. 큭!큭!큭!
은형이의 방황은 계속되었다.
어른 남자의 손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은형을 다이가 만났다.
야, 너도 갈 때까지 갔구나!
내 일에 상관 마!
있잖아--- 너와 제희는 대체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야?
감히 네가 물어볼 수조차 없는 사이---
뭐---?
정신차리고 들어가라. 여자애들 놀기엔 위험한 거리니까.
그런 거니? 담배를 다 태울 때까지 있어준 거였니? 웃기네--- 정말, 웃기네---
분명한 건--- 나--- 네 친절은 싫어! 네 친절은 피비린내가 나--- 그래서 싫어.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다. 누군가에게---
나루가--- 보고 싶어. 왜 하필 그 애가 생각나지? 정말 형편없이 마음이 약해졌나봐.
그래도--- 그 애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져--- 그런데 되게 슬프다---
기분이 왜 이러지? 오늘 같은 날--- 정말 보고 싶다.
구겨지는 대로 접어눕는 몸밖으로 이렇게 막막한--- 세상이라니---
나는 너무 지쳤다--- 다리를 일으켜 세우기에도--- 너무 지치고--- 두 눈의 눈꺼풀을 올리기에도 이젠--- 너무 지쳤다. 이렇게 지친 내가 작은 두 발로 헤매여야 할 막막한 세상이라니---
너무 지쳤어--- 이젠 쉬고 싶어. 이젠--- 무서워--- 자꾸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가 아니래---바보 같은 나, 아무 것도 아닌데---
나의 모든 것이었던 몇 년의 삶이--- 나를 밑으로 밑으로 날게 해---
은형아--- 너--- 이제 편안하니? 편안해---?
은형이는 편안할까? 편안하겠지---
지켜주지도--- 위로해주지도--- 못했어. 은형이 자살했는데---
제희는 은형이의 자살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네가 힘들 땐 언제든지 내가 옆에 있어줄게---
어쩌면 아버지의 사건으로 불안한 동요를 간직한 다이야말로
내가 아니면 위로해줄 사람이 없는 상태일 텐데---
다이답지 않은 말에 난, 은형에 대한 다이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은형은 그렇게 떠나고---
은형의 죽음은 그렇게 우리 곁에 머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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