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나나 18

2008. 6. 24. 10:23

어디라도 좋았다.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면.

 

그곳에 바다가 있으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어서

하루만 더 살아보자는 마음을 먹게 돼.

 

앞으로 하루,

하루 더 힘내서,

이 목숨을 이어가고 싶어.

 

있잖아, 하치.

죽을 장소를 찾아서

이런 곳까지 왔는데

어째서 나는 지금도

이러고 있는 걸까?

 

있잖아, 하치.

갯바람에 안겨 있으면

파도 소리가 달콤하게 유혹해.

하지만 네가 구해준 이 생명을

버릴 순 없잖아.

 

(미래)

하치. 노부 : 영국?

야스 : 아니--- 영국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나나 노래에 섞여 점원 같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거든. 그게 영국식 영어더라구.

신 : 난 나나 씨가 영국에 있을 가능성이 놀다고 봐. 나나 씨는 피스톨즈나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이 영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렌에게 이런저런 얘기도 들었을 테지.

야스 : 우선 바닷가 마을부터 찾아볼까?

신 : 그치만 영국도 섬나란데 그런 마을이야 널렸어.

하치 : 하지만 단서를 잡은 것만으로도 굉장한 진보잖아.

노부 : 그보다--- 나나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진보라구.

 

 

(노부의 기타 반주에 나나가 노래를 부르고, 하치가 행복해 하던 그 시절의, 그 음이 울린다.)

노부 : 가끔은 튕겨줘야지. 주인님이 없으면 기타도 외롭잖아.

하치 : 라이브하우스는 잘 되고?

노부 : 응. 실력 있는 젊은 놈들이 차고 넘치니까 재밌기도 하고 보람 있어.

하치 : 그야 음악사에 남을 2대 밴드를 배출한 곳인걸. 영향이 크지.

노부 : 음악을 좋아하는 놈이 늘어나는 건 역시 기쁘니까. 근데 렌은? 그냥 놔둬도 돼?

하치 : 응--- 또 영국 갔어.

노부 : 타쿠미한테? 그래--- 어째 통 볼 수가 없어요. 기타 치고 있어?

하치 : 기타만 치고 있어.

 

 

 

아무래도 기타만 치고 있는 렌은 진짜 렌이 아닌 것 같다. 나나의 렌이 아닌 것 같아. 타쿠미의 렌인가봐. 나나의 렌이라면, 나나가 렌을 그냥 놔두고, 모르는 바다로 갔을 리가 없잖아. 나나의 렌은 어디로 갔을까. 바다로 가버렸나. 그래서 나나는 바닷가에서 서성거리며 죽음을 생각하나? 렌의 부재가 아니고는 나나가 죽음을 생각할 큰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렌, 가장 내 마음을 아리게 하는 인물이다.

 

신 : 그러고보니 유리가, 우편함에 사진이랑 테이프를 넣어둔 범인이, 지금도 나나 씨의 행방을 쫓는 기자나 카메라맨이 아니겠냐더라구.

야스 : 아니, 그건 나도 생각해봤는데, 가자한테 특종감이잖아.

어째서 공개하지 않고 하치한테만 몰래 알려 주는 짓거리를 한 거냐구.

신 :  그러게--- 하치는 렌이 몰래 우편함에 넣어준 게 아닐까 하던데. 크리스마스 선물로.

 

하치의 말대로 렌은 바다로 가서, 산타가 된 거야. 산타가 되서 나나를 그리워하는 하치에게 나나의 존재를 알려주는 선물을 준 게 분명해. 그럴 거야. 아니면, 나도 몰라. 복잡한 인생사.

 

(현재)

레코딩을 마치고 영국에서 돌아온 트라네스.

 

어서 와~ 된장국 끓여놨어. 싸모님이~

쌓여있는 점프와 나나의 메모지를 보며 렌, 흐뭇하게 웃는다.

 

한편, 무신경한 타쿠미와 하치의 신경전.

다녀왔어~

누구신지?

왜 화내고 그래?

왜 화났는지도 모르는 무신경한 점에 화난 거야!

 

돌풍이 불면 사고도 는다.

스스로 선택한 파란의 길이지만,

지금만은 제발---  무사히 투어가 성공할 수 있도록.

 

내 예정은?

물론 아무것도 없죠. 렌이 기다리고 있는데.

 

맞아. 렌이 돌아왔지.

아니, 까먹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순간 깜빡했어.

어째 긴장되네.

잘해야만 된다고 생각하니까 긴장되잖아.

그보담 먼저 스스로 즐거워야 되는데.

그래야 자연스럽게 잘해 나가지.

라이브에 대한 마음가짐도 마찬가지고.

이제 본방이다.

 

어서 와요, 싸모님~

렌은? 레코딩 어땠어? 영국이 일본보다 습도가 낮아서 소리가 잘 빠진다며? 하치가 그러대.

앙? 아니--- 뭐, 여름은 그럴지도 몰라도 겨울엔 별 차이없잖아?

그게 뭐야. 역시 하치는 타쿠미의 말빨에 넘어간거구나.

그럼 어째서 일부러 영국에서 레코딩하는 건데?

여기에 있는 것보다 자유로울 수 있어서겠지? 특히 레이라가.

타쿠미는 왜 그렇게 레이라한테 다정해? 하치가 불쌍하잖아.

옆에서 보면 그렇게 보이는 건가 --- 아 참, 신은 잘 있어?

아니, 전혀. 할 맘이 있나 싶을 정도야.

 

느낌이 괜찮은데?

그냥 즐겁게 얘기할 수 있고, 왠지 렌도 즐거워 보이고.

이대로 나가면 계속 함께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치하고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고, 일도 잘 해나가고,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괜찮아.

아무런 문제 없어.

그날 밤 두 달만에 렌의 온기에 휩싸여 몇 번이고 절정에 오르며

나는 렌과 함께 죽는 것과, 무대에서 죽는 것 중, 어느 쪽이 행복할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건 틀림없이 어느 쪽이든 좋으니까,

즐겁게 살 수 있다면, 실컷 노래할 수 있다면, 마지막은 혼자 객사를 한대도 후회하지 않아.

어떻게 살 것인가가 훨씬 더 중요해.

 

신이치. 오랜만이다. 유명인이 이런 곳에서 뭐하시나?

그냥--- 방에 짐 좀 가지러---

네 방이라면 이젠 없어. 아버지가 서재로 만들어버렸거든.

 

야스(하치에게 전화걸어서) : 나나. 신이 그쪽에 안 갔어?

타쿠미(레이라에게 전화걸어서) : 레이라, 신, 거기 있어?

숨기지 않아도 다 아니까, 원래대로 돌아간 거면 솔직히 말해. 있는 거지? 그딴 건 보면 알아. 내가 눈치 못챌 줄 알았어? 있으면 좀 바꿔.

레이라 : 없어--- 와줄 리가 없잖아---

(렌이 레이라를 찾아와서) 신, 안 왔어?

레이라 : 왜? 신이 어쨌는데?

렌 : 너, 신이 갈 만한 곳 짐작 안 돼?

레이라 : 있어. 같은 아파트라고 했어.

술이나 담배같은--- 못된 짓은 전부, 그 여자한테 배웠다고 그랬어.

 

 

 

나나냐?

일이 재미없게 됐다. 신이 경찰에 체포됐어.

 

있잖아, 하치.

언제 종말이 찾아온대도 후회하지 않는 나날을, 너는 걷고 있니?

 

신이 어떻게 돼버릴까 보다, 투어가 어떻게 돼버릴까 하는 쪽이, 나한테는 훨씬 중요했다.

 

하치 : 마리화나?

미우 : 그 료코라는 여자 방에 둘이 있는데 경찰이 왔대. 현행범이라 내뺄 수가 없어.

타쿠미 : 투어는 어떻게 되고?

하치 : 그보다 신은 어떻게 되는데?

타쿠미 : 신은 미성년자고, 초범이라면 심한 처분은 안 받을 거야. 괜찮아.

미우 : 하지만 한 동안 못 나올 거고. 나온들 복귀는 힘들어.

타쿠미 : 자르듯 말하듯 말지. ( 역시 야스의 여자야)

하치 : 나 경찰서에 갔다올게.

타쿠미 : 뭐하러?

하치 : 그야 신을 만나러 가는 거지! 틀림없이 맘 졸이고 있을 텐데!

 

타쿠미 : 그렇지만 베이스는 어쩔 건데?

미우 : 대신 연주할 사람을 찾는대.

하치 : 그건 절대로 안 돼!

 

나나 : 회의를 언제까지 하는 거야? 얼렁 베이시스트를 찾지 않음 라이브에 못 맞추잖아.

노부 : 난 그닥 할 맘 안 드는데. 넷이서 노력해 왔는데, 하나라도 빠지면 의미가 없잖아.

--- 베이스가 있다고 다는 아니잖아. (역시 노부는 하치파야~)

나나 : 있으면 다지. 칠 수만 있다면 지금은 아무라도 좋아.

유리(노부 여친) : 그럼, 렌한테 해달래지? --- 렌이라면 여유있게 칠 수 있잖아?

------

나나 : 아, 렌? 좀 부탁할 게 있는데.

노부 : 나나! 네 자존심은 어떻게 됐어?

나나 : 그딴 거 애저녁에 버렸어.

<써먹을 수 있는 건 뭐든 이용할 거야. 이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렌 : 뭐야, 부탁이라니? 그보다, 신 얘기 들었다.

나나 : 부탁이야, 렌. 오늘만이라도 좋아.

렌 : 미안하지만, 난 못 도와줘.

나나 : 어째서?

렌 : 신이 이 정도로 밀려나면 나도 은퇴할 거야.

나나 : 뭐래는 거야.

렌 : (레이라의 눈치를 보며) 아니, 농담. 그리고 그런 의뢰는 사무실을 통해서 해야지.

나나 : 그렇게 느긋할 줄 알아? 웃기지 말고 진지하게 대답해.

렌 : 아니, 진지하게 응해줄 수 없어. 너도 얌전히 자중하는 편이 좋지 않겠냐?

나나 : 어째서 남이 일으킨 불상사에 내가 자중해야 되는데!

렌 : 남이라니 너--- 신은 멤버잖아.

나나 : 그런 바보같은 놈은 멤버도 아냐!

렌 : 좋을 때는 동료고, 안 좋아지면 남이냐? 그런 놈 뒤에서 베이스 치고 싶지 않아.

 

카와노 : 이해하고 자시고도 없어. 신은 미성년자야. 주변 사람들도 반성해야 돼.

유리 : 하지만 전공연 중지라니 너무 해요. 신이 엄청난 책임감을 느끼고 괴로워하지 않겠어요?

야스 : 그 정도도 못 느끼면 곤란해. 그 녀석 탓인 건 사실이잖아.

--- 책임을 느낀다고 하는 건, 자기 존재를 자각하는 일이기도 해.

 

기숙사의 비좁은 엘리베이터에 탔더니 또 숨이 가빠졌다.

5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난 더 이상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놈 뒤에서 베이스 치고 싶지 않아.'

어디로 가야 좋을까?

렌이 있는 곳엔 돌아갈 수 없어.

앞으로 어떡하면 좋지?

모든 게 멈춘 상태다.

 

나나. 너, 솔로로 뛰어라.

블래스트는 당분간 활동중지다.

뭐, 중간 땜빵용이긴 한데, 너 이대로는 수용이 안 되지?

나랑 노부라면 걱정하지 마. 지금은 너 자신만 생각해.

 

아니,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난 노래하고 싶어.

하지만 혼자서는---

 

있잖아, 하치.

사실 난 혼자 있으면 불안해서 울기만 하는 작은 아이 같아서,

너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혼자서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으로 상경한 도쿄였는데

이제와 솔로로 부르라는 말을 듣자

착잡한 마음에 현기증이 일었다.

 

하치 : 뭘 망설여? 죽어도 해야지!

블래스트의 활동중지가 정해진 이상, 다들 각자 뭘 해나가야 할지 생각해야 되잖아.

사양할 필욘 없다고 보는데?

미우 : 돈벌이가 된다고 보는 건, 결국 인정받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타이밍을 놓치면 힘들어. 이 업계에서 살아남고 싶으면 지금은 그것 말곤 방도가 없다고 봐.

 

그래. 하치도 격려해 주고 있고, 마음을 다잡고 분발하지 않으면 안 돼.

하지만 왠지 불안하다.

 

어쩌면--- 이번 일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분명 야스다.

블래스트는 야스가 만든 밴드니까.

온통 나만 생각하느라, 그런 건 생각도 못 했어.

최저야. 야스한테 매달려서 울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레이라 : 차로 왔잖아. 마시면 못 가.

렌 : 그치만 널 혼자 두고 어떻게 가냐.

레이라 : 내 걱정 말고 나나 걱정이나 해줘! 그런 식으로 말하는데, 당연히 상처받지.

렌 : 아니, 되려 성질내고 있을 걸. --- 안 그래도 미움받고 있는데.

레이라 : 그럼 여기 있는 거 알려지면 더 미움받잖아! 돌아가서 화해해.

렌 : 이제 그 녀석 비위맞추는 거 지쳤어---

 

타쿠미 : 렌은 너랑 신에 관한 거 알고 있었냐? 그럼 렌네 집이 좋겠군.

레이라 : 뭐가?

타쿠미 : 너랑 신이 만나는 장소. 어디가 제일 안전할지 생각했어. 렌과 나나의 집이라면, 너랑 신이 놀러 가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 아무도 없을 거 아냐. 그 동안 두 사람한테 잠깐 자리 좀 비워달라고 하면 되고. 그렇게 해서 가끔씩 만나면 돼.

레이라 :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타쿠미 : 멋대로 칠렐레거리면서 만나면 곤란하니까. 신이 나오면 어차피 제일 먼저 만나러 갈 생각 아니었어?

레이라 : 그런 생각 안 했어--- 신이 이렇게 된 것도 틀림없이 내가---

타쿠미 : 딱히 네 탓은 아냐.  너를 몰아세운 것도, 신을 몰아세운 것도 나다. 하지만 난 네 행복을--- 빼앗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냐. 그러려고 트라네스를 만든 게 아니라구.

 

결정했어. 나 솔로로 뛸래.

그렇게 해. 그게 좋아.

난 솔로로 뛰어서 반드시 성공할 거야.

여태보다 더 많은 관객을 끌고 돌아올 거라구.

그러니까 안심해. 블래스트는 내가 망가뜨리지 않겠어.

고맙다.

 

난 이제껏 야스를 위해 뭔가 해주려 한 적이 있었을까?

고맙다는 말이 이렇게 기쁘다니.

야스의 다정함에 기대어

해주기만을 바랐기 때문에 초조했던 거다.

그렇지만 이제부턴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야스를 위해,

응원해 주는 하치를 위해,

동료를 위해,

나는 노래하겠어.

그렇게 생각하니 혼자라도 허전하지 않다.

그날 밤 나는,

렌과 얘기할 마음이 들지 않아 707호로 돌아왔다.

이 방에는, 상경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타와 담배와 아주 적은 옷가지가 있었다.

렌에게 연락은 하지 않았다.

렌한테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꿈을 안고 잠들 수 있었으니까.

 

있잖아, 하치.

아침이 올 때마다

멀어져 가는 그 무렵을,

나는

오늘밤도 보듬어 안고 잠들어.

밤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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