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나무 / 이정명
새로운 문자라 해야 고작 스물여덟 자인데 그토록 많은 한자에 비하면 세발의 피일 터인데 그것을 어찌 두려워했소?
무지한 자로군...
새로운 글자는 불과 스물여덟 자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세상을 바꿀 엄청난 힘을 지녔네.
그 문자가 반포되면 이 나라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된단 말일세.
상것들도 노비들도 모두가 글을 읽고 쓰는 세상을 생각해보게.
시전의 상것들이 학문을 한답시고 거들먹거릴 것이고,
농사짓는 노비가 상전과 사리를 따지게 될 것일세.
아래쪽과 위쪽, 양반과 상놈, 임금과 신하의 위계는 뒤죽박죽이 되고
천지는 아비규환의 비명천지가 될 것일세.
모든 공문서에는 이상한 말이 나다닐 것이고,
관가에는 제 이익을 찾으려는 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게 될 것일세.
평생을 천착한 경학의 대가들은 요사스런 학풍에 밀려날 것이고
사대부들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새 글자를 배워야 할 것이야.
대국의 말을 버리고 오랑캐의 말을 만들어 쓰는 조선을 대국이 두고만 보겠는가?
온 나라가 전란의 위기에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데 학문한다는 자가 어찌 그냥 두고만 볼 것인가?
최만리
강채윤
주상전하와 소이 항아가 숨어 있는 두 명의 학사임을 알았으나
지수귀문도의 두 음소는 끝내 찾을 수 없었사옵니다.
이도
스물여덟 자의 글자로 세상의 말을 모두 쓸 수 있으나 쓰지 못할 말이 있으니
바로 말없음이다.
말없음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니
말하고자 하나 말하지 못함과
말할 수 있으나 말하지 않음이다.
말하지 않고 뜻을 전한다면 수많은 말보다 나을 것이니
그것이 으뜸 되는 음소가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