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어서

뿌리깊은나무 / 이정명

2012. 7. 18. 08:25

 

새로운 문자라 해야 고작 스물여덟 자인데 그토록 많은 한자에 비하면 세발의 피일 터인데 그것을 어찌 두려워했소?

 

 

무지한 자로군...

새로운 글자는 불과 스물여덟 자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세상을 바꿀 엄청난 힘을 지녔네.

그 문자가 반포되면 이 나라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된단 말일세.

상것들도 노비들도 모두가 글을 읽고 쓰는 세상을 생각해보게.

시전의 상것들이 학문을 한답시고 거들먹거릴 것이고,

농사짓는 노비가 상전과 사리를 따지게 될 것일세.

아래쪽과 위쪽, 양반과 상놈, 임금과 신하의 위계는 뒤죽박죽이 되고

천지는 아비규환의 비명천지가 될 것일세.

모든 공문서에는 이상한 말이 나다닐 것이고,

관가에는 제 이익을 찾으려는 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게 될 것일세.

평생을 천착한 경학의 대가들은 요사스런 학풍에 밀려날 것이고

사대부들은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새 글자를 배워야 할 것이야.

대국의 말을 버리고 오랑캐의 말을 만들어 쓰는 조선을 대국이 두고만 보겠는가?

온 나라가 전란의 위기에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데 학문한다는 자가 어찌 그냥 두고만 볼 것인가?

최만리

 

 

강채윤

주상전하와 소이 항아가 숨어 있는 두 명의 학사임을 알았으나

지수귀문도의 두 음소는 끝내 찾을 수 없었사옵니다.

 

이도

스물여덟 자의 글자로 세상의 말을 모두 쓸 수 있으나 쓰지 못할 말이 있으니

바로 말없음이다.

말없음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니

말하고자 하나 말하지 못함과

말할 수 있으나 말하지 않음이다.

말하지 않고 뜻을 전한다면 수많은 말보다 나을 것이니

그것이 으뜸 되는 음소가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