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어서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로버트 뉴턴 펙

2010. 5. 23. 22:38

셰이커 교도인 로버트 가족과 이웃들의 청빈하고 진솔한 삶의 이야기.

셰이커 교본에 따라서 바르고 올곧게 살아가는 그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셰이커 교는 몸을 흔드는 의식이 있다고 했던가?

 

 

하늘은 바라보기에 참 좋은 곳이야.

그리고 돌아가기에도 좋은 곳이라는 느낌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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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이 끝나면 씻고 또 씻는데도 돼지 냄새가 좀처럼 떠나질 않아.

그래도 네 엄마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어.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내 몸에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단다. 언젠가 내가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있지.

 

그러니깐 엄마가 뭐랬어요?

 

엄마가 말하길, 나한테서 성실하게 노동한 냄새가 난다더구나.

그러니 창피하게 여길 필요가 없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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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네가 해야 해, 로버트.

엄마와 이모 둘이서는 할 수 없단다.

봄이 오면 너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어른이라구, 열 세 살짜리 어른.

어른이 되기에 충분한 나이지.

이곳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네가 책임지고 처리해야 해, 로버트.

너말고는 책임질 사람이 없어.

바로 너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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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보다 훌륭한 사람?

농부보다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니?

가축을 돌보고 곡식을 기르는 사람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단다.

우리 농부가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린다구.

우리 역할은 신의 창조물을 돌보는 일이야.

이보다 훌륭한 일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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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돼지와 돈과 고기와 은행 따위에 관한 얘기가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건전한 기독교인으로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셰이커 교본에 쓰여진 대로 엄격하게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검소하게 살아야 할 셰이커 교인이에요.

그렇게 많은 걸 욕심내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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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아빠가 미웠다.

핑키를 죽인 아빠가 미웠다.

평생 수많은 돼지를 죽인 아빠가 미웠다.

 

아, 아빠,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요.

 

나도 그렇단다. 하지만 네가 어른스럽게 받아들이니 고맙구나.

어른이 되려면 그런 건 이겨내야 해. 어차피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

 

아빠의 커다란 손이 얼굴을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그 손은 돼지들을 죽인 손이 아니라, 엄마 손처럼 정겨운 손이었다.

아빠 손이 거칠고 차가웠다.

--- 조금 전에 핑키를 죽인 손이었다. 아빠가 죽였다.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었다.

--- 나는 참지 못하고 아빠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

돼지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그 손에 말이다.

--- 설사 나를 죽이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빠를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 아빠가 나를 내려다 보더니,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나는 아빠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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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이듬해 5월 3일 헛간에서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빠.

나는 딱 한 번만 아빠를 불렀다.

괜찮아요. 오늘 아침에는 푹 주무세요.

일어나지 않으셔도 돼요. 내가 아빠 일까지 다 할게요.

더 이상 일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제 푹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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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루만큼은 모두들 일손을 놓았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는 날이었다.

아빠 동료들이 찾아와서 반가웠다.

--- 아빠를 존경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찾아왔다.

아빠는 부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아빠는 언제나 당신이 가난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과장이 아니었다.

아빠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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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몬트의 투막한 흙,

저 아래 어딘가에 우리 아빠 헤븐 펙이 묻혀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땀 흘리며 당신 소유로 만들려던 땅 속 깊은 곳에.

하지만 이제는 땅이 아빠를 소유하게 되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아빠랑 보낸 지난 13년은 정말 행복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