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어서

즐거운 나의 집 / 공지영

2010. 5. 22. 10:51

만일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널 키웠다면,

넌 아마 엄마를 훨씬 더 미워했을지도 몰라---

이 말이 위녕,

상투적인 위로로 들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알아.

 

아빠는 성실한 사람이고, 아빠는 한결같은 사람이야.

그리고 언제나 옳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이야.

--- 아빠는 널 사랑했어, 끔찍하게 아꼈어.

너도 그건 인정을 해야 해.

 

알아.

 

어떤 부모든 최선을 다해.

하지만 자식에게 상처를 줘.

그건 어쩌면 인간의 운명 같은 걸 거야.

그래서 그 많은 심리학자들이 어린 시절을 연구하는 거고.

 

알아.

 

어른들도 완전하지 않아.

더구나 처음 낳은 자식에게는 언제나 실수투성이야.

부모 연습을 해본 적이 없어서---

 

알아.

 

그래 알겠지, 알아도 미안해.

그래도 미안해, 위녕.

엄마는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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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순간에도 너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돼.

너도 모자라고 엄마도 모자라고 아빠도 모자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자람 때문에 누구를 멸시하거나 미워할 권리는 없어.

괜찮은 거야. 그담에 또 잘하면 되는 거야.

잘못하면 또 고치면 되는 거야. 그담에 잘못하면 또 고치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가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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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모스크바를 또 언제 볼까 싶었어.

어제가 오늘까지 망치는 건 더 참을 수가 없더라구.

그래서 일어서 파란 아이섀도를 멍들지 않은 한쪽 눈에 바르고

혼자 푸슈킨 박물관에 가서 고흐의 그림을 보았지.

아르바트 거리에 가서 우동을 사 먹고---

잘 한 거 같아.

실제로 그 이후에 모스크바에는 다시 가지 못했어.

게다가 고흐의 그림을 그때 실물로 처음 보았거든---

여행까지 와서 날 때리는 사람하고 더 살 것인지 말 것인지는

그 다음에 결정해도 되는 거니까.

 

엄마, 왜 맞고 살았어? 그러고도 한참 더 있다가 이혼했잖아.

 

둥빈이를 생각했었지.

두 번 이혼하는 일보다는 자살하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았고---

생각해보았지.

세상에 나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느냐,

아니면 집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매를 맞느냐---

그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그렇게 맞고 다음 날 대학에 가서 페미니즘을 강연해야 할 때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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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것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울타리 같은 거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이니까.

당연히 보호받아야 하고 침범당해서는 안 돼.

그런데 그런 폐쇄된 영역에서 힘이 센 한 사람이

힘이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쓰자고 들면

힘이 약한 사람은 당하게 마련인 거야.

타인들이 볼 수 없는 장막 저쪽의 세계니까.

그게 부인이든 남편이든 혹은 아이든 노인이든---

그 사람이 페미티스트든 사회정의의 화신이든

힘이 센 사람이 폭력을 쓰면 약한 사람은 당하는 거---

그게 가족의 딜레마일 거야.

낯선 사람이 가하는 폭력은 피하면 되지.

친구가 그러면 안 만나면 되지.

그러나 사랑해야만 한다고 믿는 가족이 그런 일을 저지를 때

거기서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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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엄마는 그걸 운명이라고 불러---

위녕, 그걸 극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걸 받아들이는 거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큰 파도가 일 때 배가 그 파도를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듯이,

마주 서서 가는 거야.

슬퍼해야지.

더 이상 슬퍼할 수 없을 때까지 슬퍼해야지.

원망해야지, 하늘에다 대고,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하고 소리 질러야지.

목이 쉬어 터질 때까지 소리 질어야지.

하지만 그러고 나서,

더 할 수 없을 때까지 실컷 그러고 나서---

그러고는 스스로에게 말해야 해.

자, 이제 네 차례야, 하고.

 

어떤 작가가 말했어.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우리의 성장과 행복은 그 반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영어의 responsible이라는 것은  response-able이라는 거야.

우리는 반응하기 전에 잠깐 숨을 한번 들이쉬고 천천히 생각해야 해.

이 일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지만,

나는 이 일에 내 의지대로 반응할 자유가 있다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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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돈도 별로 없고, 얼굴은 못생기고, 배도 나오고,

그런데--- 늘 엄마를 즐겁게 해줘.

엄마가 슬플 때, 엄마가 화를 낼 때, 엄마가 술먹고 지난날을 생각하며 울 때도---

엄마를 웃게 만들어---

사람이 사는 데 유머라는 것이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어.

그건 머리와 마음과 삶 전부를 아우르는 총체적 의미의 여유 같은 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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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오늘 저처럼 슬픈 날에는 어떻게 해요?

 

--- 음, 슬퍼하지.

 

아저씨가 젊었을 때 어떤 유명한 스님을 취재하러 간 적이 있어요.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삼천배를 하고서야 어렵게 뵈었지.

그리고 물었어.

스님,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습니까? 하고.

그랬더니 그 스님이 대답하더구나.

앉아 있을 때 앉아 있고, 일어설 때 일어서며, 걸어갈 때 걸어가면 됩니다, 하는 거야.

아저씨가 다시 물었지.

그건 누구나 다 하는 일 아닙니까?

그러자---

그 스님이,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아직도 그 눈빛이 생각난다.

형형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 눈으로 아저씨를 물끄러미 보더니 말하더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앉아 있을 때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일어설 때 이미 걸어가고 있습니다.

 

아저씨, 사는 게--- 어려워요.

아저씨는 잠시 웃었다.

그래, 사는 것은 어렵지.

아주 어려운 일이야.

스님도 어려웠으니까 깨달음을 찾았겠지---

그런데 말이다, 위녕,

사는 게 어려운 일이다, 이걸 한번 받아들이고 나면,

진심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사는 게 더 이상 어려워지지 않아.

왜냐하면 어려운 삶과 내가 하나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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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 해.

누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다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내게 말해줄 누군가가 좀 있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너 혼자 다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엄마는 가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그런데 이 아침 힘겨운 얼굴로 자고 있는 엄마를 보자

온몸으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떠올라왔다.

온몸으로, 온몸으로.

그리고 그것은 실은 나누어 질 수는 없는 종류의 것들이라는 것도 깨달아졌다.

엄마는 그렇게 엄마 몫의 삶을 지고, 나는 내 몫의 삶을 지고 가는 것,

아무리 사랑해도 각자가 지고 갈 짐을 다 들어줄 수는 업는 것,

그것이 인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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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어.

어떻게 하는 게 좋은 엄만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엄마가 되는 일일 거야---

차라리 장편을 백 편 쓰라는 게 낫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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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예전보다 더 아이들을 껴안아주었는데,

막상 내가 객관적으로 나라는 인간을 엄마로서 그려내자,

아마도 겁이 났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도 나는 좋은 엄마는 아니었고, 그것이 미안해서였을 것이다.

아니, 그렇기도 했지만 실은 내가 맘속으로 되뇌이는 사랑을 표현해내는 일에

너무도 게을렀다는 사실을 글을 써내려가면서 새삼 아프게 인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이 남들의 기준으로 보면 뒤틀리고 부서진 것이라도 해도,

설사 우리가 성이 모두 다르다 해도,

설사 우리가 어쩌면 피마저 다 다르다 해도,

나아가 우리가 피부색과 인종이 다르다 해도,

우리가 현재 서로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해도,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명사는

바로 '사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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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해서 괜히 미워하고 시샘했다.

알려고 들지도 않았으면서 그냥 외면했다.

그래서 미안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작정 비난해서.

아는만큼 보인다, 는 말은

너 자신을 알라, 만큼이나 진리인 것같다.

알면 이해하고, 이해하면 동조해버린다.

동조한다고 해서 삶의 형태가 같아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너그러워진다.

성이 같은 아이 셋을 키우기도 어려운데,

성이 다른 아이 셋을 키우는 일은 더 복잡하겠지.

그래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잘 키워보려는 엄마의 마음은, 똑같이,

난해한 철학 문제에 골똘하는 것과 같으니까.

근데, 다르다.

작가는 아이 셋을 키우는 것보다 장편소설 백 권 쓰는 것이 더 낫다고 했지만,

나는 장편소설 한 권 쓰는 것도 아이 셋을 키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작업이니까 ㅠㅠ

아무튼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했고,

어떤 육아서보다도 진솔해서 마음에 와 닿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의미 있었던 책이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살겠냐는 말에,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는 작가를,

응원한다, 세 아이의 엄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