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신의 물방울 20

2009. 8. 20. 22:45

제 6사도의 이미지를 찾기 위해서 미야비와 함께 아스카로 떠난 시즈쿠.

 

있죠, 시즈쿠 씨가 보고 싶었던 광경은 어떤 거예요?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어렵지만 굳이 말한다면,

우주가 느껴지는 광경이지.

 

아스카에 이탈리아 사람이 경영하는 이탈리아 식당, '스파치오'

 

저기, 가게 이름인 '스파치오'는 무슨 뜻인가요?

 

우주라예.

 

--- 두 분이 와 이런 외진 곳에 왔는지.

와인과 관련된 사정이 있는 게 아닙니꺼?

 

그렇군예.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연상케 하는 와인이라--- 어렵네.

 

 

 

'제6사도'의 내용을 들었어요?

 

들은 적 없어. 그냥 마신 적이 있을 뿐이지.

그 사람과 함께.

알고 싶어?

 

천만에요! 그런 짓을 하면 싸우지도 않고 지는 게 되니까!

 

농담이야.

하지만 하나만 말할게.

이런 곳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불상만 쳐다보고 있어서는,

제6사도는 찾아낼 수 없어.

너는 그 나이에 와인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니?

그런 사람에게 와인의 여신은 미소를 지어 주지 않아.

 

내가 오만하다고 말하고 싶은가요?

 

오만과 열등감.

그 상반된 감정이 한데 섞여 있지.

네가 고른 퍼스트클래스의 와인에서, 그런 정신 상태가 엿보이더구나.

하나 더, 이것만은 알아뒀으면 하는구나.

 

이 '제6사도'조차 찾아내지 못한다면,

너는 아직 칸자키 유타카는 고사하고,

내 수준(잇세의 어머니)에조차 이르지 못한 거야.

 

이 와인은 '눈물짓는 미륵'.

마셔 보렴.

성 야곱의 밭을 의미하는 와인.

제브레 샹베르텡 프리미에 크뤼 '클로 생 자크' 1997년산.

 

그리고 똑똑히 알아둬.

네 자신이 얼마나 미숙한지.

칸자키 유타카가 얼마나 아득한 존재인지.

 

찾았어, 미야비.

이 안에--- '미륵'이 있어!

 

로랑.

어머니가 내 미숙함을 깨우쳐 줬어.

정말이지, 여전해.

예전부터 그 사람은 내게 지독한 짓만 해왔어.

어린 나에게 콤플렉스를 심어주는 행동을 하지 않나.

날 죽이려 한 적도 있어.

 

눈물.

따뜻한 눈물.

모듬어 안는 대신 흘리는 눈물.

슬퍼하는 누군가를 대신해 눈물짓는 그 모습.

--- 어머님은 어쩌면--- 잇세가 착각하리라는 걸 알고 계셨는지도 몰라요.

미리 알고 깨우치게 도와주신 건지도 모르죠.

 

웬 바람이 불었을까?

네가 자진해서 교토 관광을 하자는 말을 다 하고.

 

무리하고 있는 게 환히 보여, 잇세.

네가 그렇게 쉽사리 나를 용서할 리 없지.

이렇게 같이 다녀도 네 머릿속에 있는 건 오직 와인뿐인걸.

젊은 날의 칸자키 유타카의 일면이 그랬듯이---

 

부드러운--- 석양이다.

왜일까---

석양과 아침 해는 사진으로 비교하면 전혀 다르지 않은데,

실제로 보고 있으면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보여.

 

만약 내 생각이 옳다면 내 어머니인 이 사람과 과거에 함께---

짧으나마 생활했던 이 거리를 둘러보면 틀림없이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안 보고 갈 거니?

태양이 저문 뒤에 내려앉는--- 땅거미를---

기다려 본 적이 있니?

어둠 속을 헤매면서 간절히 태양을 기다려 본 적이---

 

간신히 태양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오면,

그때는 뒤돌아보렴.

꼭 알게 될 거야.

칠흑 같은 어둠이라고 생각했던 그 우주에---

네가 걸어가는 길을 어슴푸레 비추는 하얀 달이 멀리서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

 

 

 

변호사 선생.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선생은 누가 이기기를 바라나?

 

저는 변호사입니다.

유타카 선생님의 유지에 따라 이 싸움을 공정하게 지켜볼 뿐이에요.

 

그것 참 유감이군.

선생은 유타카의 마지막 말을 들었나 했는데 말이야.

 

부르노 자코사 '바를로' 환상의 붉은 라벨.

츄구지에 모셔놓은 미륵반가사유상.

두광을 갖추신 숭고한 그 모습과 이미지가 겹칩니다.

 

그것이 제6사도인가?

 

--- 뺨을 비비고 싶은 친밀감을,  이 와인에서는 느끼지 못했어요.

제6사도는 두광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이 와인은 제6사도가 아닙니다.

 

잇세--- 녀석이 틀렸다.

표현은 둘째치고 골라온 와인 자체부터.

 

틀리면 안 돼.

이걸 틀리면 나나 잇세나 남아 있는 사도에 도전할 수 없을지 몰라.

믿자.

나 자신을.

이 한 잔의 루비색 액체 속에 펼쳐지는 우주를, 감지해내야 해.

보여다오, 와인아!

아찔한 우주와 미륵보살상의 이미지에 아버지가 담은,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그것으로 끝이냐?

 

아뇨.

그 뒤에 제가 느낀 것이야말로,

아버지가 저한테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생각해요.

 

겨우 알았어요.

처음에 느낀 고독은,

길을 떠날 때 느끼는 불안함과 허전함이었어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 걸음을 내딛기 시작할 때의,

그 형언할 수 없는 초조감.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선뜻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불안함과 망설임.

 

난 지금 아주 잘 알아요.

내가 어떻게 여기에 서 있을 수 있는지.

주저하면서도 어떻게 앞으로 걸어갈 힘을 계속 간직할 수 있는지.

그게 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성장해가는 나를

자상하게 지켜봐 주는 사람들 덕분이라는 것을요.

--- 그것이 이 와인에 대한 저 나름의 표현이에요.

 

루치아노 산드로네, '바롤로 카누비 보스키스' 2001년.

 

이 와인은 지나간 반생을 돌아볼 때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인간의 '진정한 따스함'이라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줬어요.

 

알았겠지?

고전도 모던도 상관없어.

와인을 마시고 느낀 순간부터가 그 세계의 시작인 게지.

 

--- 잇세, 자네는 와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빠질 수 있는 덫이 있다는 것을,

유타카는 전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응--- 이겼어.

어쩌면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저 천재를 이긴 건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부터 자네는 다음 패배를 향해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게 될 수도 있어.

그것 또한 와인이라는 거지.

 

잘 듣게, 시즈쿠. 명심해둬.

남자는 경쟁에서 진 뒤 패배를 인정하고,

나아가 그것을 밑거름으로 삼아 성장해가는 동물이야.

토미네 잇세는 그걸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어쩌면 그렇게 반생을 살아왔는지도 모르지.

 

그래, 제6사도는 자네에게 어떤 와인이었나?

 

저는 부모님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뭐랄까---

가슴에 확 와 닿는 와인이었어요.

부모님 품에서 완전히 벗어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러면서 부모님을 포함해

이제까지 나를 지켜봐준 사람들의 마음으로 돌아보는 듯한.

 

'홀로서기'인가?

너도 이제 부모로부터 독립했다는 얘기야.

그런 의미를 담아 네 아버지는,

'카누비 보스키스'를 제6사도로 선택했는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