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번째남자 6 / 손새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난 베아트리체의 마음 같은 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어.
가볍게 지나갈 일이라고 생각해서
애써 모른 척하고 무시했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어떤 건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게 나일 텐데도
네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주지 못했어.
나는 너를 얼마나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보답 받을 수 없는 마음이 얼마나 괴롭고 슬픈 건지 알면서도, 나는---
내가 먼저 알아챘어야 됐는데---
내기 만약 너에게 상처을 주게 된다면,
난 견딜 수 없을 거야.
나 역시 너만큼이나 상처받게 될 거야.
미안해, 희소야.
아무리 해도 이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
한 번 변해 버린 마음은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나 봐.
알고 있어.
네가 나한테 바라고 있는 게 어떤 건지.
하지만,
이대로는 그럴 수 없을 거 같아.
빨간 벨벳 리본의 진실
'이 리본은 네가 내거라는 표시야. 그러니까 절대 풀어버리지 마.'
이거 돌려줄게.
소원을 빌었어.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좋으니까,
내가 '너에게 속한 것'이 아닌---
네 앞에서 그냥 한 사람의 남자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니까 나한테 기회를 줘.
어떤 대답이라도 기다릴 테니까,
이번만큼은 내 마음을 똑바로 바라봐 줘.
하지만 저 리본은---
사실 난,
처음 너를 만났을 때부터 내내 불안하고 무서웠어.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내 앞에 나타났던 것처럼,
또 어느 날 갑자기 꿈처럼 네가 사라져 버릴까봐.
그러니까
그 리본은 네가 어딘가로 사라진다 해도
부디 내가 찾아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의 표시였어.
너를 결코 잃지 않기를,
언제까지나 계속 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소중한 부적 같은 것.
나는 어쩌면---
그동안 나를 지켜주고 소중하게 대해 준 희소의 마음을 배신한 걸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넌 언제까지나 날 지키고 보호해야만 할 존재라고 여기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나는 너에게
정말로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그리고
너의 것이 아닌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는지도 궁금해.
내가 밥 사줄까?
할머니가 집안 일 열심히 도운 상이라고 용돈을 주셨거든.
난생 처음 받아보는 돈이라 너무 기뻤어.
--- 그러고 보니 내가 희소한테 뭔가를 사 준 건 처음이네.
난 언제나 받기만 했었는데.
이런 기분이었구나.
소중한 사람에게 뭔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다는 건---
받는 것보다 주는 게 훨씬 기분 좋은 거였어.
그 동안은 희소한테 받기만 했으니까,
이젠 나도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어.
앞으로는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었음 좋겠어.
나는 네가 원하는 걸 전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베아트리체, 나는 말이지.
나는 그래.
우리의 첫만남부터 지금까지
너는 나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가 됐어.
지금으로선 이게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네가 말했지.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원하고 바라는 거라면
그게 뭐라고 해도---
네가 상처받지 않도록 네 마음을 지켜 주겠어.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넌 나에게 소중하고 또 소중한 존재라는 거야.
그것만은 절대 변하지 않아.
그러니까--- 앞으로 잘 부탁할게.
그래도 생각해 보면 다행이지 뭐야.
네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여자가 나라서 말야.
--- 뭐,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네가 남자건 여자건 선인장이건 상관 안 해.
갈 때까지 가보자구!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로 와서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 되어 준 베아트리체.
너는 고맙게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줬지만--
나는 그래.
나는 너랑은 조금 달라.
나는 너를 싸랑해 ♥
장휘영은 꿈꾸고 있다.
도대체--- 이유가 뭐냔 말이다.
뭐 이쁜 구석이 있다고,
그렇다고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 자신에게 치명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미치도록 신경이 쓰여서
결국은 내버려둘 수 없게 된단 말이야.
알고는 있냐?
나는 말이지---
주머니 속에 있는 사탕을 하나씩 꺼내어 주듯,
너무나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너에게 목숨을 걸고 있어.
이게 정말 내가 꾸고 있는 꿈이라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잊어버렸던 기억 같은 건가?
그러고 보면 이때의 기억은 이상하게도
감정이라던가 느낌 같은 게 어쩐지 결여돼 있는 것 같아서---
은희소라는 존재만큼은 선명하게 남아 있지만,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한 부분은 흐릿하다고나 할까---
언젠가 네가 나한테 따지듯 물어본 적이 있었지.
'그때 넌 나를 좋아하기는 했니?
말해 봐. 날 좋아했었지? 그렇지?'
난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어쩌면 나는 잊고 있는 것뿐인지도 몰라.
그때의 나를.
너를 생각했던 마음을---
뭐 그런가---
예전의 내게 은희소가 어떤 존재였던지는 대충 알겠어.
오랫동안 떠나 있던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도
줄곧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녀석을 꼭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만났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어.
오히려 더 알 수 없어졌을 뿐이야.
나는 여전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눈치 챌 때도 되지 않았어?
네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건 잃어버린 걸 다시 찾기 위해서야.
너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한 건 바로 나야.
내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돌려 받기 위해서.
휘영의 어린 시절 모습을 한 누군가?!
아직도 모르겠어?
이 내가, 너에게 특별한 힘을 부여해 준--- 바로 그---
목숨이 다해가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겁이라곤 하나도 없지?
솔직히 넌 지금 당장 쓰러져 다신 일어나지 못한다 해도 이상할 게 하나 없다구.
이게 다 네가마음의 일부를 잃었기 때문이야!
덕분에 나까지 함께 분리돼버렸다구!
원래대로라면 나는 네 안에서 너와 같은 모습으로 자라 존재하고 있었겠지.
--- 너는 지금 내 덕에 겨우 버티고 있는 거야.
한계에 다다른 건 이미 오래 전이야.
앞으로 한 번이라도 더 힘을 쓴다면,
그땐 나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어.
게다가 나 역시 일부가 분리된 상태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대로 네 안에 영원히 갇혀 버리게 돼.
넌 두 번 다시는 깰 수 없는 잠에 들게 될 거야.
하지만 네가 잃어버렸던 마음을 다시 되찾고,
그와 함께 떨어져 나간 나의 일부를 돌려 받을 수 있다면---
그땐 내가 가져간 너의 시간들을 전부 돌려주겠어.
그럼 넌 앞으로의 남은 생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너는 이미 알고 있을 거야.
그걸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왜냐하면, 너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거니까---
잃어버린 마음을 찾도록 해---
그래도 따지고 보면,
어릴 때부터 해서 우리 인연이 보통 인연은 아니잖아?
--- 솔직히 이런 얘기까진 안 하려고 그랬는데,
내가 지금까지 연애에 목숨 걸구 남자친구를 열두 명이나 사귄 건,
어느 정도 네 탓도 있다고 생각해.
어쨌든 네가 내 첫 번째 남친이잖아.
나의 첫 번째 연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친구란 걸 사겼는데,
겪어보니 그게 참 좋은 거였더란 말이지.
뭐랄까, 좀더 내일이 기다려지고 같은 놀이를 해도 더 신나고---
계획도, 바라는 것도 많아지고,
암튼 모든 게 평소보다 업되는 느낌인 거야.
연애를 한다는 게 그런 거더라구.
갑자기 세상이 훨씬 더 재밌어지는 거.
게다가,
마음이 되게 든든해져서 꼭 천군마마를 얻은 것처럼 그런 기분이라니까.
암튼, 짧았지만 너랑 사귀면서
아, 연애란 이런 거구나.
이렇게 신나고 좋은 거구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딱 새겨진 거야.
남자친구가 있는 건 너무 좋은 거라고 말야.
그런데 네가 갑자기 떠나 버리고 나니까 갑자기 확 허해지더라구.
그땐, 상대가 누구든 다시 새 남자친구를 사귀기만 하면,
너랑 있을 때처럼 똑같이 될 줄 알았어.
근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더라구.
그래서 그렇게, 기회만 닿으면 남자친구를 사귀려고 열심히 들이댄 걸지도---
그때의 행복했던 기분,
좋은 느낌을 되살리고 싶어서.
뭐, 그런 점에 있어서는
너한테 고맙다고도 생각해.
처음이 너였고,
그게 너무 좋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던 거야.
--- 근데 있잖아. 만약에 말이지,
그때 네가 여길 떠나지 않고, 우리가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면 말야,
우린 지금까지 헤어지지 않고 사귈 수 있었을까?
넌 까칠한 성격이구, 난 떼쓰는 성격인데두
잘 사귈 수 있었을까?
어째서---
왜 난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없는 거지?
너를 바라보던 내 마음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대체 어떻게 하면---
다시 찾을 수 있는 거지?
너--- 갑자기 왜 이래?
억울해서 그래.
뭐가 고맙다는 거야?
내가 무슨 용기를 줬다고?
네가 나한테 얻어간 게 있으면
나도 뭔가 남아 있는 게 있어야 될 텐데.
난 너처럼 그렇게 산뜻한 기분이 남아 있지 않단 말이야.
난 지금도 그 때랑 별반 다를 게 없어.
모르겠어?
네 말대로 성격도 나쁘고 까칠한 내가 너한테만큼은 얼마나 관대한지.
한 번도 너 무시한 적 없잖아.
네가 겁도 없이 나한테 개겨대는 것도 그럴 여지가 있으니까잖아.
한 마디로 너니까 봐준다는 거야.
그런데 그게 또 열 받는단 말야.
나는 아무리 해도 네가 신경에 거슬려.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을 만큼 네 일에 상관하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으니까 돌아버리게 짜증난단 말야.
젠장, 이럴 바에야 차라리---
네 말대로,
내가 정말 너를 미친듯이 좋아하기라도 하고 있는 거라면 좋겠어.
그런 머저리 같은 감정이라도 느낄 수 있으면
차라리 속 시원하겠단 말이야.
그러고 보면 어릴 땐---
쳇,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잊고 살다가 한번 생각나 버리니까,
줄줄이 사탕처럼 굴비 엮듯 기억들이 새록새록 하잖아.
장휘영, 넌 말이야.
지금은 진짜로 뭔 생각을 하는지 못 알아먹을 수상쩍은 놈이 됐지만,
그땐 솔직히 외롭던 나한테 한 줄기 빛 같은 존재였다구.
--- 비록 입은 거칠고, 툭하면 날 가르치려 들기 일쑤였지만,
엄마아빠한텐 안 통하던 내 고집도 땡깡도 응석도
전부 받아준 건, 너뿐이었어.
그때 내가 너를 세상에서 제일로 만만하게 봤던 건,
그래, 네 말대로 내게 그럴 여지를 줬으니까 그랬을 거야.
전부 받아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베아트리체의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지다.
기억 안 나세요?
8년 전의 일이오---
주인님이 제게 마음을 심어 주셨잖아요.
전 그걸 바탕으로 스스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답니다.
이건 설마---
잊어버리고 있었어.
이 녀석에 대한 일---
그래, 힘이 분리됐다고 했었지.
그렇다는 건---
이 녀석이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사람으로 변하게 된 것도 전부--- 그 때문?
그러니까 네가 바로--- 내가 잃어버린 것---?
영 뒤끝이 찜찜한 것이--- 혹시 이거 미련 같은 건가?
비록 옛날 일이긴 해도 말야.
내내 듣기를 기다렸던 말이니까.
너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
끝끝내 못 들어서 억울했던 말이니까.
설마--- 나는 아직도 기대하고 있는 걸까?
그 녀석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