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번째 남자 2 / 은희소
새봄이한테 돌아가.
걘 지금껏 널 기다렸어.
널 필요로 해.
무엇보다도 새봄이를 도울 수 있는 건 너뿐이니까.
그리고 난 이제 더 이상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너랑 대립하고 싶지 않아.
원준이가 희소 절친에게
이렇게 틀어쥔 채로 널 놓아주지 않으려는 그 앨 외면할 수 있어?
열은 언제나 따뜻한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르는 법이래.
온도 차이가 크면 클수록 따뜻한 쪽은 차가운 쪽으로 더 많은 열을 잃게 돼.
그래서 따뜻한 쪽은 항상 손해를 보지만,
결국 덕분에 차가운 쪽은 더이상 차가운 채로는 있을 수 없어지게 되는 거야.
사람 마음이라고 다를 게 뭐 있겠어?
있잖아--- 사실은---
내가 그렇게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새봄이한테 잘해 준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칭찬은 하지 마.
누군가가 새봄이를 지켜줘야 한다면,
그건 니가 아니라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니가--- 새봄이를 신경 쓰고 걱정하는 건 싫으니까.
나, 원준이 니가 좋아하는 사람은 새봄이라는 거 알거든.
그래, 맞아.
난 새봄이를 좋아해.
적어도, 오랜 전에는 분명 그랬지.
하지만 너무 오래 돼서 잊어버렸어.
그게 잠시뿐이었던 건지,
아니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건지,
그저 항상 곁에 있어 왔다는 기억뿐이야.
걔에 대해서는 생각이 완전히 멈춰버렸어.
휘영이랑 원준이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나.
은희소 말이야.
나 다시 한 번--- 그 애 손을 잡을 거야.
이번에는 제대로, 진심으로 말이야.
왠지 너한테 이 얘기는 해둬야 할 것 같아서.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어.
하지만 그런데도---
왜 이렇게 미칠 듯이 화가 나는 거지.
희소의 첫번째 남자친구, 장휘영 이야기.
니가 소원을 빌면
뭐든지 이루어질 거야.
하지만 혼자서는 안 돼.
내가 언제나 함께 있어야만 해.
그러니까 뭔가 간절히 바라는 게 있을 때는 꼭 나를 불러.
내가 너와 함께 소원을 빌어 줄게---
나는 사실 매일매일 녀석을 기다렸었다.
며칠씩 놀러오지 않을 때면 마구 심술을 부렸다.
녀석과 함께 수도 없이 자질구레한 소원을 빌었다.
잠이 많아서 아무데서나 널브러져 낮잠이 들곤 하는
녀석의 옆에서 함께 낮잠 자는 것도 좋았다.
오라, 이거 남자친구가 있다는 건 꽤 좋은 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녀석이 처음처럼 느닷없이 이별을 통보했을 때 무지 화가 났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엄청 섭섭했다.
그날, 마치 꿈처럼 눈이 내렸다.
한여름인데도,
햇빛이 쨍쨍한데도 눈이 내리니까,
정말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더이상 녀석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 여름의 일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 건지도 모른다.
7살의 기억은 8살의 기억에 묻히고,
8살의 기억은 9살의 기억에 덮히고---
나는 열심히 남자친구를 사귀고,
또 헤어지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8년이 지난 15살의 현재,
나는 녀석을 다시 만났다.
그때에 비해 성격은 더 나빠지고 매우 삐딱해진 장휘영이다.
덕분에 생각나버렸다.
그때, 너한테 엄청 분했었다.
내가 너한테 왜 심술이 났었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장휘영---
진짜 알면 알수록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녀석이야.
그때도 그랬어.
가까이 다가와 있어도 왠지 전혀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지.
그래서 답답하고 화가 나고 심술이 났어.
새봄이의 토토 말이야!
나의 베아트리체 말이야!
그 애들을 만든 건 너잖아!
니가--- 우리들한테 준 거 맞지? 그렇지?
베아트리체가 그랬어.
널 주인님이라고 불렀어.
너한테 특별한 힘이 있다고 말했어---
너는 나한테 옛정이라는 게 남아 있냐?
아, 그래. 옛정을 봐서---
우리 다시 한번 사겨볼까?
옛날에 한번 해봤던 거니까 이번엔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럼 나도 옛정을 봐서 새봄이의 토끼 인형을 되돌려줄 테니까 말야.
어때. 꽤 괜찮은 거래 아냐?
장휘영--- 너는---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옛날에도 지금도--- 왜 나한테 사귀자는 말을 해?
옛날에 내가 왜 너한테 심술이 났었는지 알아?
넌 제일 중요한 말을 하지 않았어.
그때도 그랬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다짜고짜 사귀자고 하고는---
그게 전부야?
사귀자 하고 말하면 끝이야?
나는 매일매일 기다렸어.
니가 나한테 말해줄 줄 알았어.
니가 떠나던 날도 그랬어.
널 잊지 말아 달란 말만 몇 번 하고는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잖아.
날 좋아한다는 말 같은 거---
이제 와서 이런 얘기 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라도 그때, 너 날 좋아하기는 했니?
--- 날 좋아했었지? 그렇지?
그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냐?
듣고 싶었어.
당연하잖아!
처음이었으니까.
사실은--- 잔뜩 기대했었다구.
이 녀석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면서,
그럼 난 뭐라고 말해줘야 되지, 하고 잔뜩 머리를 싸매고---
내내 기다렸다구.
틀림없이---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당연히 그럴 줄 알고---
미안하지만 몰라.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게 아니니까겠지.
그때 너를 되게 좋아했었어.
너랑 같이 노는 게 너무 재밌어서, 매일매일 니가 오길 기다렸어.
나만 혼자 좋아했던 거래도 어쩌겠어,
그게 그런 걸.
새카맣게 까먹고 있었어도 그건 나의 소중한 추억이니까.
너한테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는진 몰라도,
난 그거 덕분에 딴 애들은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신기하고 꿈같은 추억들을 잔뜩 갖게 됐어.
니가 나한테 선물해준 베아트리체도 너무너무 소중해.
그게 너였단 걸 이제야 알게 됐지만---
사실을 정말정말 너한테 고마워.
너 때문에 내가 아주 많이 행복했었다는 거 말야.
그건 아마도---
나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절이 될 거야.
가장 후회스런 기억인 동시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
새봄이를 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건---
화나고 슬픈 얘기를 언제나 그렇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는 거였다.
저렇게 웃을 수 있을 때까지 분명 엄청 많은 눈물을 흘렸을 거다.
어째서 얜 언제나 뽀시시하게 웃는 얼굴일까.
사실은 온통 슬픈 일 투성이면서---
바보 같아서 그런 게 아냐.
어쩌면 새봄이는 누구보다 강한 아이인지도 몰라.
--- 그렇게 자신의 마음이 쉽게 다치지 않도록 지금껏 잘 지켜온 거야.
그건 대체 누굴까?
든든한 마음의 버팀목이 되어,
슬픔에 부서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준 사람은---
슬픔은 절대로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어.
어릴 땐 무슨 소원을 빌어도 다 들어 줬었잖아.
아닌 척해도 이것저것 다 신경 쓰고 있다는 거 알아.
내가 줄곧 네 도움을 받았다는 것도 이제야 알았어.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도,
야영이 있던 밤에도,
불이 났을 때도--- 니가 항상 도와줬잖아.
새봄이가 가여워서 토토를 선물했던 것도 바로 너면서---
어쩌면 새봄이도, 나도---
너한테 참 많은 걸 받았는지도 몰라.
잔뜩 찡그린 얼굴로 말도 맨날 못되게만 하는 주제에,
사실은 엄청 상냥한 사람인 거잖아, 장휘영.
역시--- 원래부터 너와 휘영이는 알고 있던 사이였구나.
나도 궁금한 게 있어.
너랑 휘영이는 대체 언제 만난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너에게 있어서 휘영이는 어떤 존재였는지---
알고 싶어.
휘영이를 어떻게 생각해?
알고 있을진 몰라도 그 녀석, 너를 줄곧 신경 쓰고 있었어.
너에 관한 일이라면 답지 않게 무슨 일이건 나설 정도니까.
불이 난 창고에 니가 갇혀 있을 때도 말이야.
그 녀석은 자기 안전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널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잖아.
--- 누구라도--- 분명 마음이 움직일 거야.
사실은, 나 너한테 할말이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을 좀 들어줬으면 좋겠어.
나는 소중한 걸 소중하게 여길 줄 몰라.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래서 잃은 게 많아.
솔직해지는 방법도,
마음을 보여 주는 방법도 나는 잘 모르겠어.
때로는 나약하고 비겁하게 도망쳐 버리기도 하는 게 바로 나란 놈이야.
니가 날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진 몰라도,
분명한 건 난 니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인간이란 거야.
이런 나라서,
어쩌면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너한테 또 상처를 주게 될지 몰라.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할 수가 없어.
사실은 널 실망시키게 될까봐 불안하기도 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이런 나라도 상관없다면,
나는 니가--- 다시 한번 나에게로 와줬으면 좋겠어.
오늘 낮에 확실히 깨달은 바가 하나 있어.
나는 이 손이---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손은 잡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음이 끌리는 대로, 원하는 대로,
다시는 실수하고 싶지 않아.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아.
지금까진 새봄이를 생각하는 것밖엔 할 수 없었는데---
언제부턴지 모르게 너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게 돼 버렸어.
이제야 깨달았어.
니가 나한테 어떤 존재가 됐는지.
--- 내가 가야할 길을 알았어.
그게 내 마음이라는 걸 알았고,
처음으로 목표라는 게 생겼어.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가면 되는 거지?
너를 향해 가면 되는 거야.
나는--- 니가 좋아, 은희소.
그땐 니가 말했지만,
이번엔 내가 말할게.
나랑 사귀어줘, 은희소.
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 그러니까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오는 법이라니까.
드디어 나에게도 봄날이 온 거야.
그럼--- 니가 나의 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