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하이힐을 신은 소녀 8

2009. 4. 15. 23:10

그러니까--- 이제부턴 정말 줄타기를 해야 하는 거야.

나를 너무 사랑하지 않게---

조금은 차갑고 못되게.

그러다가도 너무 멀어지면 붙들고---

너무 다가오면 밀쳐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렇게 시간을 끌지 않으면---

너무 빨리 망가져---

순식간에

수정이와 내가--- 갈기갈기--- 다 찢어놓겠지---

 

나--- 맘이 변했어.

 

뭐? 뭐야, 너, 지금?

너, 나 가지고 노니?

 

바보같이--- 잔뜩 기대하고---

또 미련하게--- 먼저 고백하고---

이 얘기를 할까 말까?

내 입으로 말하기도 민망하고---

게다가 유치하다고 비웃겠지.

말하면 분명히 내가 손해볼 게 뻔해.

그래도 짜증나서 해야겠어.

이런 취급을 당하고 살 수는 없어!

 

너! 잊지 마.

네 여자친구가 전국에서 제일 예쁜 애라는 걸.

 

너야말로 잊지 마.

네 남친이 전국에서 제일 성질 더러운 인간이라는 걸.

 

나쁜 놈!

정말 용기 내서 고백한 건데--- 대답도 안 해주구!

단지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야--- 두려워서야---

내가 욱일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욱일이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욱일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수정아---

고경희--- 안 데리고 왔다.

맘이 변했어.

안 헤어질 거야.

그러면--- 분명히 네가 무슨 음모를 꾸밀 테지?

 

잘 아네.

난 분명히 여러 번 경고했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그렇게 되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이 말을 해둬야겠다.

만약에 고경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영원히 널 떠날 거야.

그리고--- 다시는 안 돌아와.

 

보라돌이의 꿍꿍이.

 

내가 양욱일을 한번 미치게 해줄까?

나를 이용하라구.

 

솔직히 말하면, 처음 네 얘길 듣고 약간 혹했던 건 사실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해.

밀었다, 당겼다, 하라고.

하지만 난 싫어.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표현할 거야.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고.

만약, 그런 거에 질려서 떠나는 남자라면---

그깟 기술을 써서 붙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양욱일은 이미 기술을 쓰고 있으니까 문제인 거지.

너는 그 여우 같은 녀석이 널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게 안 보여?

그래서 네가 그놈한테 더 목매고 있잖아.

양욱일이 갑자기 연락 없고, 그럴 때 있지?

그럴 때면 조바십 나지?

네가 양욱일을 좋아하는 만큼--- 양욱일은 널 안 좋아할지 모른단 생각 때문에.

 

뭐야--- 마치 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실은 나--- 진짜로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어.

 

 

수정이와 보라돌이가 어렸을 때에---

 

뭐라구?

 

널--- 좋아해! 좋아한다구!

 

조용히 해! 욱일이가 널 죽일 거야!

 

그런 녀석 하나도 무섭지 않아!

 

네가 아직 걔를 몰라서 그래. 본 적도 없잖아.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도 마.

 

넌---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 누나랑 너희 아버지가 결혼하면--- 우린 친척이 돼버린다구.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같이 도망치자.

내가 나이는 어려도 도망치는 건 잘한다구!

 

바보야!

난 지금 휠체어 없이는 화장실도 못 가는 처지야.

게다가 너랑 내가 같이 도망치면---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는 뜻이 되잖아.

욱일이가--- 평생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걸.

무슨 짓을 써서든--- 찾아낼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

 

나한테 한 가지만 약속해. 그럼 방법을 알려줄게.

이제부터 넌--- 영원히--- 영미 언니를 좋아하는 거야.

평생, 다시는, 나를 좋아한다는 말 입밖에도 꺼내선 안 돼.

죽고 싶지 않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욱일이가 나를 당겼다, 밀었다, 한다는 말이지!

욱일이의 문자를 나 몰라라, 하는 고경희.

하지만 다시 휘둘리는 데 단 1초!

 

다음에 또 내 문자 씹으면, 그땐 애들 다 보는 데서 해버릴 거야.

 

뭐야--- 불과 1초 만에---

가슴을--- 이렇게 뛰게 만들다니---

 

욱일이와 수정이의 생일이다.

한껏 멋을 부리는 고경희.

 

남들한테 예쁘단 소리 백날 들어서 뭐 하겠어.

정작 욱일이한텐 한 번도 예쁘다는 말 못 들었는데---

자기도 눈이 있으면

오늘은 한 마디쯤 하겠지.

 

뭐야, 고경희!

자기가 예쁘다는 걸 너무 알고 있어!

 

그게 왜?

나도 거울 있고, 나도 눈 있어.

 

오우~ 예쁜 건 어떤 기분이야?

아까 같은 애들 보면 엄청 가소롭고 그런 거야?

 

아무 기분도 아니야!

아무 느낌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어!

백날 예쁘단 소리 들어서 뭐 해!

정작 남자친구가 예쁘다고 생각 안 하는데.

 

내가 한 번도 얘길 안 했다구?

(불쑥) 고경희! 넌 사람이다!

넌 학생이구. 넌 여자야!

 

짜증나게 왜 그래?

그딴 당연한 소리는 왜 자꾸 하는데?

 

그럼 예쁘다는 소리는 왜 듣고 싶은데?

당연한 거를!!

 

나랑 약속했던 거 기억 안 나?

다시는--- 나 좋아한다는 둥, 그런 얘기 입 밖에도 꺼내지 않기로 했잖아.

 

(하하하) 양수정.

내가 아직도 널 좋아한다고 생각해?

솔직히 말해봐, 양수정.

혹시 바라는 거 아니야?

내가 널--- 좋아해줬으면 하고?

 

멍청이! 정신 나간 녀석!

이딴 걸 선물이라구!

 

보라돌이가 선물해준 원피스를 입어보는 수정.

수정은 그 옷을 입고 마루에 걸터 앉아서 삶은 달걀 두 개를 먹는다.

보라돌이는 대문 밖 낮은 계단에 앉아서 수정이의 기척을 가늠한다.

 

오늘 네 생일이잖아.

 

알고 있었단 말야?

그럼 나 여기서 해줘!

 

뭐? 여기서? 길거리에서?

 

난 말야--- 지금까진 생일이 그다지 즐거운 날이 아니었어---

태어나서 한 번도--- 즐겁게 보낸 적이 없었어.

근데 올해는--- 이상하게 굉장히 기다려지더라고---

 

그래서 심통을 부렸군.

길목에 앉아서 생일 파티를 하는 두 사람.

 

소원 빌어.

 

너도 같이 빌어.

 

욱일이가 소원을 빌 때--- 함께 빌었다.

앞으로 평생--- 욱일이의 생일을---

내가 축하하게 해달라고---

하지만 뭘까---

이렇게 행복한데도---

동시에 이렇게 가슴 아픈 불안함은---

 

고경희는 예쁘다.

엄청 예쁘다.

내 눈에 세계 최고!

우주 최고!

 

즐거움도 잠시---

욱일이가 전국에서 제일 성질 더러운 남친으로 돌변하려 한다.

 

도망가.

더 늦기 전에.

 

그때--- 양수정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

 

그래서--- 갈 거야?

거기까지 도망간 애를 굳이 찾아내서 뭘 어쩌겠다구!

 

도망가야 해!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어!

평생--- 나 때문에 누군가 다치게 되는 걸 볼 순 없어!

어떻게든 벗어나야 해!

양욱일에게서!

욱일아,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마.

그렇게--- 그렇게 안타까운 목소리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듯한 그런 목소리로---

나를 부르면--- 난---

 

고경희---

 

놔줘--- 아파.

욱일아--- 놔줘--- 이제 더 이상은 못 하겠어---

 

고경희---

그런 소리 하지 마!

더 이상 못하겠다느니, 그런 소리 하지 말란 말야!

너도 알잖아.

너는 날--- 못 벗어나---

 

욱일아--- 이건--- 사랑이 아니야---

이건--- 저주야---

 

 

양수정--- 왜 숫자 더 안 세냐?

(조용하다. 휴대폰을 쥔 보라돌이의 손이 떨린다)

 

누나--- 지금 당장 119에 전화하고---

누나도 수정이네로 빨리 와---

 

어머! 무슨 일인데? 수정이가 왜?

넌 거기서 뭐 하는데!

 

수정이가 약 먹을 동안---

내가 망봐주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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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받은 사랑이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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