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그 남자! 그 여자! 8 / 소우지와 레이지

2008. 10. 24. 21:15

네가 알고 싶어 하던 걸 모두 얘기해 주마.

아리마 가문에 대해.

그곳에서 레이지가 얼마나 이단이었는지,

그의 죄도,

내 죄도---

길고 긴 이야기를---

 

아리마의 친부인 레이지와 아리마의 양아버지이자 레이지의 이복형인 소우지의 이야기.

 

 

 

아리마 가문은 도내에서 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뭐, 그럭저럭하는 집안이다.

그래서 태어났을 때 내 인생은 결정되어 버렸다.

가문을 잇는데 불만은 없다.

다만, 이 아버지가 나를 항상 번뇌케 했다.

아버지는 모든 일에 있어서 완전한 사람이었어.

그런 사람의 자식이 된다는 건 비참한 거란다.

4명의 자녀들 중 누구도 그를 닮지 않았으니까.

평범한 자식들에게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괴로웠다.

 

어두운 가정과 음험한 아리마 일족 중, 나는 기질이 낙천적이라, 그래도 인생은 즐거웠다.

누님인 에이코는, 계속해서 상처를 입었어.

안타까웠다.

 

나는 의무를 다하고, 누군가에게 집을 물려줘 버리면 해방될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직계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을 위태롭게 만들 줄이야.

 

아버님이 말야, 애인한테서 낳아온 애를 본가에서 살게 하겠댄다.

그애 이름--- 레이지라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은 아리마 레이치로---

레이지는 누가 봐도 아버지에게 사랑 받는 '특별한 아이'인 거야.

 

그곳에는 한달 전에 물에 빠져 자살한 어느 여성과

목숨을 건진 그 아들 레이지의 상태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무엇이,

그 여성을 그렇게까지 내몰았을까?

 

부탁이다--- 레이지를 지켜다오---

아버지는 그 여성을 사랑한 거다.

태어난 아이를 사랑한 거다.

잔혹하리만큼 아이들에게 눈길조차 안 주던 주제에---

어째서 그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을까.

 

실수가 쌓여가면서--- 모두가 이미 가해자다.

 

아버지도, 누님도, 나도, 아이를 길동무로 삼은 그 여성도---

 

숨을 삼킬 정도로 아버지를 빼닮은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신이 들어? 난 소우지, 부모 뻘 되는 나이지만 네 형이야.

오랫동안 괴로워했던 걸 몰라서 미안하다.

이제부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주마---

 

그리하여 비로소 우린 서로의 존재를 아주 가까이서 깨달았다.

같은 돌림자의 이름을 가진, 나이도 환경도 성격도 대조적인

서로의 형제의 존재를.

 

레이지는 의외로 순순히 내게 마음을 허락하고---

어리면서 그는 긍지 놓은 사나이였기에, 우는 소리 하나 없이 싸우고 있었다.

이 집에 깃들어 지금 그를 집어삼키려하는 어둠과.

 

데려가게 하지 않아.

이 아이는 나의 소중한 동생이니까.

골절된 부분이 강해지듯--- 마음도 변하는 것일까.

공포와 혼란이 안정되자 그는 상처입은 마음을

그 높은 프라이드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보수해서 꽤 독특한 인격을 만들어냈다.

 

그때, 문득---

레이지가 변화한 의미를 알았다.

레이지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놀자'고 생각한 거야.

멀쩡한 정신으론 헤쳐나갈 수 없으니까.

일족내의 어둠에서 얼마만큼 놀 수 있는가 하는 위험하고 즐거운 게임.

그러한 레이지가 좋았다.

아름답고 강하고 섬세한--- 나하고는 완전히 다른 남동생.

 

나는 그런 레이지를 위태롭게 여기면서, 그 화려하고 강한 개성에 매혹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레이지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맹목적이어서

이 사람이 그 냉정한 아버지였나 하고 내심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외외로 레이지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난 아버지도, 어머니도 싫어.

닮은 부류끼리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관계라니--- 추하잖아?

 

레이지에게 있어서 피아노는 감정의 배출구일 뿐이어서,

소리에 내면의 굴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그 악의의 베토벤이네, 광기의 쇼팽이네 하는 건 선남선녀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그 속에는 섬세한 신경과 고상한 영혼의 존재가 분명히 느껴졌었다.

비범한--- 비범한.

 

레이지는 아버지를 경멸하고 있지만, 그 힘을 철저히 이용했다.

 

어라, 이 서류 잘못 됐다. 어쩔 수 없다니까. 제대로 하라구, 형.

미안하다. 변변찮은 실수를 해서. 난 너하고 달아서 말이야.

 

사소한 한 마디였지---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어.

오직 한 사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형이--- 자신을 거절했다.

 

그 집에 또아리 틀고 있던 어둠은 내 마음에도 있었던 거야---

깨달았을 때는--- 늦었지.

그 후 모든 게 망가져 갈 뿐이었지.

 

도저히--- 불행이 반복되는 걸 멈출 수 없던 거겠지.

나 혼자 끝냈더라면 그런 뼈아픈 고통은 없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어도--- 견뎌냈을 거다.

 

형--- 형은 몰라.

난 딱히 형이 한 말에 상처받은 건 아냐.

내 존재가 형을 괴롭게 할 뿐이라는 걸 알게 된 것뿐.

내가 나타나--- 형은 듣지 않아도 좋을 소릴 듣고,

하지 않아도 좋을 생각을 하고, 수중에 있던 평온한 일상을 버릴 수밖에 없게끔,

인생을 망가뜨린 건 바로 나.

형--- 형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려 하지만,

난 형을 그렇게 만드는 내 자신이 미워.

어머니를 죽게 하고 살아났는데--- 살아난 것 때문에 소우지의 인생을 죽이고 있다.

슬프다--- 나는 슬프다--- 슬프다---

 

처음 소우지를 만났을 때, 다정해 보이고, 아무런 때도 묻지 않아서,

이런 사람이 내 형이라는 걸 알고는--- 기뻤다.

 

이 집안의 고통의 사슬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죠?

 

이제야 알았다.

모든 것이 잘못됐었어.

난 터무니없이 형을 상처 입혔다.

하지만 돌아가 봤자 틀림없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

 

점점 처지는 나빠지고, 늪 바닥을 기어다는 것 같은 나날.

지쳐가면서, 이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게 됐을 무렵,

그런 무렵이었다.

 

더 이상 료코한테 접근하지 마. 알겠냐?

 

단 하룻밤의 일.

근심을 떨쳐 버리려는 기분으로, 기억도 확실히 나질 않는다.

 

형--- 난, 혼자서는 제대로 해 나갈 수 없어.

남한테 상처를 주고, 나한테도 상처를 입혔어.

 

난-- 형한테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다시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고,

긴 여행은 끝났다--- 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불행의 사슬에 얽혀, 돌아갈 장소가 없는 길고 긴 여행을

또 다시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 행복한 시절을 잊을 수 없다.

가슴을 채우고 있던 생각에서 해방되어,

사람은 살아가면서 몇 번이고 다시 고쳐 살 수 있다고 믿었어.

 

 

 

사진 도착했어? 놀랐지? 자기랑 쏙 닮은 게, 예쁘지? 사내아이야.

맞다. 이름도 지어줘야지. 레이지가 지어 주지 않을래?

 

모든 것을 용서해 준 형도 이 과오만은 용서하지 않아.

실수로 불행한 아이를 또 낳은 건---

나에게는 더이상 새벽 따윈 오지 않아.

 

이름? 이름이라면---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어--- 아리마 소이치로.

 

나는 비겁자가 되었다.

말하는 대로 돈을 지불한다.

형에겐 말하지 않았다.

모두 털어놓고 아이를 데려오는 게 최선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부터 나에 대한 형의 감정이 변해 버리는 것이 무서웠다.

도대체 왜?

딱 한 번의 일로,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원하지도 않는 아이 때문에

인생을 망쳐야만 하는 거지?

점점 료코가 요구하는 금액이 많아지고, 나는 지쳐갔다.

그런 나날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날 깨달았다.

아이가 늘 울고 있다.

겨우 흥신소를 이용해 거처를 알아냈을 때, 난 스무 살이 되어있었다.

겨울의--- 눈 내리던 밤이었다.

 

다행이다--- 살아 있어--- 정말 날 빼닮았네.

계속 네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미안하다.

형을 줄게. 애정도, 미래도, 모두 줄게.

난 이제 필요 없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행복해라---

 

명성을 손에 넣고, 모든 이가 칭찬을 해도--- 이 가슴의 고통을 지울 수는 없어.

 

그것이 우리 형제의 최후가 되었지.

 

줄곧 생각했어.

만약 내가 형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더라면,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면 누구도 이토록 상처받는 일 없이, 나는 제대로 된 인간으로---

난 멈추고 싶었어.

그 집이 나를 절망시켜도, 결코 휩쓸리지 않겠다고.

그렇게만 되면--- 나는 줄곧 나를 괴롭혀온 자신의 인생에 복수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때 그 집의 어둠에 붙들렸던 걸까?

 

어쨌든--- 이 아이에게 있어서 넌--- 생지옥으로 떨어뜨린 악마야.

이 아이는 내가 기르마. 새로운 환경을 주고 싶어--- 알고 있겠지만,

이 아이 앞에는 나타나지 말아다오.

내내 너를 지켜보며 살아가고 싶었는데--- 잘 가거라.

 

희한하지?

들은 건 질투와 애정, 과오, 연약함, 방황, 인간의 아름답지 못한 면들인데,

그게 오히려 피가 통하는 인간으로서 호의를 품게 하는 거였어.

살아가는 괴로움을 아는 사람은,

매력적이야.

고통을 뛰어넘어 나의 행복을 기원해준 아버지들이 있다는 사실이--- 기뻐.

그래서 난 나의 과거를,

나쁘지 않다고 여기게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