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전쟁이다.
여기 보이는 이곳은 마치 사막 같다.
이곳에 두 개의 참호가 있다.
참호 안에는 병사가 숨어 있다.
그들은 적이다.
적은 바로 저 건너에 있지만 나는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혼자입니다.
적도 혼자인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도 배가 고픕니다.
적과 나의 공통점은 이 둘뿐입니다.
그는 야수입니다.
그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죽입니다.
바로 그의 잘못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실을 모를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습니다.
전투지침서에서 다 읽었으니까요.
적은 잔인하고 일말의 동정심도 없다.
적은 인간이 아니다.
이제 먹을 것이 거의 바닥났습니다.
내가 먼저 전쟁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가 나를 죽일 테니까요.
그가 먼저 전쟁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총을 쏘지 않을 겁니다.
나는 인간이니까요.
다음 주면 이 전쟁은 끝이 날 겁니다.
나는 제 3번 위장술에 따라 덤불숲으로 위장하고 참호를 빠져나갑니다.
나는 적의 참호로 기어가서 그를 죽일 겁니다.
그러면 전쟁은 끝이 나겠지요.
방금 사자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적의 참호 안에는 아무도 없어요.
어떻게 된 걸까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습니다.
바로 내 참호 안에!
그가 내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 오지 않을까요?
'이 순간부터 전쟁을 끝낸다.'
이런 메시지를 받는다면 나는 당장 수락할 겁니다.
----------------------------------------
어! 앞쪽 안면지 두 번째 줄 일곱 번째 위치에서 네잎클로버를 물고 있던 군인과
또 한 명의 군인이 사라졌다. 뒤쪽 안면지 그림에서.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내가 만난 사자는 누구였을까?
내가 규정하고 있는 적의 개념은, 나에게도 똑같이 규정된다.
그건 불변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른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한다.
그래서 나는 동정심 많은 인간인데, 적인 그는 어린 아이에게 총을 쏘는 야수가 된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나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잘못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까지나 피해자이고, 그는 가해자의 편이다.
살아가는 모순
딱히 전쟁이 아니더라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순들.
내가 옳으니까, 나머지는 다르거나 틀리게 되는 이유들.
묻지 말고--- 응답하자.
나도 너랑 같다.
특히 전쟁이나, 전쟁처럼 사투를 벌이는 상황에서는
나는 분명히 그의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