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흥청망청
1494년, 성종 뒤를 이어 맏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자에게나 붙을 연산군이라는 호칭을 아직까지 달고 있는 연산 '이융'
중종반정의 정당성을 부인하지 못하는 한 연산군일 수밖에 없는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는 '흥청망청'이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그가 한창 놀기를 좋아할 때, 궁중에서 가무와 풍류를 담당하던 여악에 소속된 여자들을 몇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그 중 제일 높은 등급을 '흥청(興淸)'이라 부르고, 차례로 운평, 광희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면서 흥청을 동반한 잔치도 자주 벌였고, 이렇게 흥청거리다간 나라가 망해버리겠다고 백성들이 탄식하면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본디 '흥청'은 사악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씻어준다는 뜻으로, 연산군이 어머니를 위해 잔치를 벌일 때 동원한다는 명목으로 지은 것이다.
재주와 미색을 갖춘 여인들을 찾아오라는 연산군의 명을 받은 채홍사가 바빠질수록 연산군의 방탕함은 더욱 심해졌고, 나라의 기강은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연산군이 처음부터 못된 임금, 방탕한 국왕이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 때문에 연산군은 이토록 헤어날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들어선 걸까?
그것은 갑자사화의 먼 원인이 된 생모의 억울한 죽음이었다.
(아!그렇구나 우리역사 조선1 참고)
결국 연산의 파멸은 생모로 인한 트라우마였다.
네살바기였던 융(연산)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출당해 사사된 사실을 모르고,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인 줄로 알고 자랐다.피가 통하지 않은 탓인지 정현왕후를 잘 따르지 않았던 융.
게다가 할머니 인수대비의 미움을 받으며 불운한 성장기를 보냈던 융이 바르게 성장하기는 힘들었을 것같다.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중종)이 받는 사랑을 지켜보면서 융이 느꼈을 외로움.
그래서 어린 시절 성장기의 경험은 아주 중요한가 보다.
연산의 포악함과 중종의 온화함만 보더라도 애들은 어렸을 때 무조건 사랑받아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