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어서

바람의 화원 2

2008. 7. 29. 11:36

 

 

신한평 : 김조년 어른을 만났다.

윤복 : 장사꾼이니 거래를 청했겠군요.

한평 : 그래. 늙은 욕망을 위해 아들을 팔아먹는 더러운 거래라 해도 좋다.

하지만 이 폐허 같은 화실을 이대로 둘 수는 없지 않니?

더구나 이 재앙은 네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도 하니까.

 

홍도 : 되지 않은 소리 집어치워라! 김조년의 화실이라니---

고작 그 시궁창으로 들어가려고 객기를 부리며 도화서를 떠났느냐!

윤복 : 아버님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홍도 : 나쁘지 않다면 어리석겠지.

네 몹쓸 아버지가 등을 떠밀지 않는데 네가 그 냄새나는 곳으로 들어갈 이유가 무엇이냐?

 

윤복 : 소인이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김조년 : 이 나라 최고의 화인을 얻고 싶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

윤복 : 돈으로 재능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조년 : 돈으로 재능을 살 수는 없지만, 재능을 키워줄 수는 있겠지.

 

정향의 두 눈은 오래 전부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 눈길이 가닿은 곳은 호수 가운데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의 두 눈이었다.

여리게 울리던 가야금의 곡조는 점점 고조되었다.

때로 물 흐르듯 잔잔하고, 때로 폭포처럼 거센 가야금소리에 윤복은 흔들렸다.

 

이 그림의 주인은 저 가야금 치는 금기로군.

윤복이 무언가를 들킨 듯 흠칫 놀랐다.

저 금기만이 그림 그리는 화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홍도의 가슴은 서늘했다.

그 기녀가 윤복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홍도는 스스로 비참해지는 것을 느꼈다.

천하의 화원이 어찌 한낱 가야금 치는 기녀를 질투하는가.

 

부친이라 한 말이 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그 아이에게 다른 애비라도 있단 말인가?

태연한 어조였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저는 그림자놀이를 그 아이처럼 좋아하던 한 화원을 알고 있습니다.

그 화원은 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지요.

그리는 것은 보이는 것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그리고 이런 말도 했었지요.

그림을 그리움이며, 그리움은 그림이 된다고---

언젠가 윤복이도 같은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뒤늦게 생각해보니 놀라운 우연이었습니다.

그 화원은 저의 벗이었고, 어른의 후배이기도 했었지요.

 

나는 그 아이를 기르고, 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했어.

그 아이의 손에 붓을 들려주고, 그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그 아이가 그린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지.

그 아이도 어른처럼 행복했을까요?

마른 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질문이었다.

한평은 대답하지 못했다.

 

윤복의 그림에는---

즐거워하고 수줍어하고 성내고 싸움박질하며 가슴설레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혁명이자 기존의 화풍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전위성을 도화서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윤복의 그림이 제값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도화서에서 내쳐진 후였다.

윤복과 김조년은 신흥부자와 예인이 결합하여 새 바람을 일으킨 가장 좋은 본보기였다.

 

김조년 : 이즈음 자네 마음 속에는 밝음과 어두움, 따뜻함과 차가움, 사랑과 미움,

존경과 원망과 같은 대극적인 감정이 격렬히 충돌하고 있는 모양일세.

 

극단적 감정의 충돌은 이즈음 그림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윤복의 길지 않은 인생 자체가 갈등과 대결, 그리고 격렬한 내적충돌의 연속이었으니까.

늘 사랑하면서도 미워해야만 했던 아버지,

따르고 싶었지만 맞서야 했던 홍도,

사랑했으나 가질 수 없었던 정향,

자신의 여인을 가로챘지만 그 아래에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김조년---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은 때로 윤복을 신경질적으로 만들기도 했고,

명확한 마음의 고통은 그를 안하무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윤복의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감정이 정향의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김조년은 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누구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젊은 아이들의 들끓는 열망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 법이다.

 

신통하구나--- 붓이 아닌 그림자로 그린 그림이라 하겠다.

빛이 사라지면 그림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지요.

하지만 그 실체는 어둠 속에 여전히 존재하겠지.

홍도는 생각했다.

무엇이 그림자이고, 무엇이 실체인가?

늘 어둠 속에서 그리던 얼굴---

 

실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진실을 뜻하는 것이라면,

진실도 언젠가는 빛 앞에 모습을 드러내겠지?

제가 뭔가 스승님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나를 속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을 테지?

네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 네가 신한평 어른의 소생이 아니며, 영달을 좆는 그 욕망의 희생자라는 것 말이다.

제가 화원 신한평 어른의 소생이 아님은 사실이나,그의 욕망에 희생되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 또한 그분의 야심과 그 가문의 명성을 이용했으니까요.

 

홍도는 자신을 사랑하기에도 바빴다.

그림을 그리고, 그릴 대상을 찾고, 거기에 담을 무언가를 구상하느라 길지 않은 하루가 다갔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림을 생각했고, 기방에서도 그림 생각뿐이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곧 그린다는 것이었고, 그린다는 것은 곧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홍도가 아는 한 생도는 그림은 보이는 대로 그려지며, 사물은 생각하는 대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림은 그린 사람의 뜻과 심성과 인생이 비친 그림자라고도 했다.

그 화원을 홍도는 질투하며 사랑했고, 선망하며 동정했고, 동경하며 낯설어했다.

그 두 얼굴 사이에서 홍도는 흔들렸다.

한 꺼풀을 벗기면 또 한 꺼풀의 단단한 막으로 싸인 듯한 그 아이는 비밀투성이였다.

그 아이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 감추어진 비밀을 홍도는 미친듯이 알고 싶었다.

 

이 그림은 정말 오묘하구나.

보는 순간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듯 아슬아슬하니 말이야.

너는 그림에 있어 하나의 경지를 넘어선 것 같구나.

그림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조화를 터득했으니---

한없이 단순한 구도 안에 수많은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아.

마치 너처럼 말이야.

 

화제에 네가 숨긴 속마음이 드러나 있더구나.

네가 말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으렷다?

네가 말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림이 아니라, 너 자신에 대해---

세상을 속이고 사람들을 속이고 너 자신까지 속일지라도

네 존재의 진실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네가 지금까지 말하지 못하면서 언제나 말하고 싶었던 진실,

네가 지금껏 멍에처럼 짊어지고 오면서 내내 벗어버리고 싶었던 짐을---

이제 내려놓아라.

 

얼마나 많은 세월을 내가 죄지으며 살아야 하겠느냐.

너를 마음에 담은 그날부터 나의 삶은 죄많은 삶이었다.

너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죄인이었고, 너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짐승같은 놈이 되어야 했다.

왜 나의 꿈속에까지 찾아온 것이냐?

왜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은 것이냐?

 

홍도는 억센 손길로 윤복의 중치막 고름을 잡아당겼다.

홍도의 손길은 더욱 거칠어졌다.

문득 홍도의 거친 손길이 얼어붙은 듯 멈추었다.

홍도는 무자비하게 억눌린 그 슬픈 가슴을 바로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구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느냐?

 

진실은 참담했지만 홍도는 안도했다.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한 여인을 사랑할 수 있다.

그 사랑이 받아들여지든 거부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한 여인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뿐.

 

언제부터였습니까? 제가 여자라는 사실을 언제 아셨습니까?

 

어쩌면 처음 보았을 때부터가 아닐까 몰라.

너를 마음에 둔 것도, 네 감춰진 모습을 알아차렸던 것도.

그래---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난 너라는 존재를 내 마음속에 품었을 거다.

하지만 그때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나 자신도 몰랐다.

어쩌면 재능있는 제자에대한 사랑이었을 것이고,

자꾸만 엇나가는 제자에 대한 연민이었을 것이고,

뛰어난 천재에 대한 동경이었겠지.

 

저로 인해 치르신 고통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너는 나의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이었다.

네가 남자든 여자든 그것은 상관없었어.

나는 한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사랑했을 뿐이니까---

 

내가 너에게 알고 싶은 것이 더 있다.

그 기방의 여자아이가 네 가슴에 있는 것이냐?

 

물음의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 가슴에 있는 것은 한 사람일뿐, 남자도 여자도 아닙니다.

스승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홍도는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이상 묻지 않았다.

한 남자의 시선과 한 여인의 시선이 달빛이 부서지는 어둠 속에서 만났다.

시선과 시선은 얽혀들고, 미끄러지고, 스며들고, 새겨졌다.

윤복은 먹물을 기다리는 종이처럼 희고 깨끗했다.

홍도는 먹물을 머금은 붓처럼 거침없었다.

 

그 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 그것은 축복일 것이다.

주상으로 명으로 함께 그림을 그리던 그때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저속하고 음흉한 자들은 두 그림에 마음대로 점수를 매기고 난도질을 해댈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그림은 걸작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그림은 휴지조각처럼 버려질 것이다.

상처받지 않으면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대결---

그 치명적인 대결의 상대가 윤복이라는 사실이 홍도는 두려웠다.

 

김홍도냐, 신윤복이냐? 단원이냐, 혜원이냐?

애호가들의 사랑방마다 논쟁이 벌어졌고, 저자의 그림쟁이들도 덩달아 열변을 뿜었다.

논쟁과 열변의 끝에는 언제나 돈뭉치가 오갔고 격정적인 욕망이 들끓었다.

김조년은 그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만든 자신의 수완을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겼다.

 

잘 그려야 한다. 부디--- 잘 그려야 한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나를 이기지는 말아다오.

발길을 돌리던 윤복이 고개를 돌렸다.

 

넓은 마당 한가운데에 선 홍도는 너무도 외로워보였다.

한때 스승이었으나 이제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할 경쟁자.

그 사내의 젖은 눈을 보는 윤복의 눈동자가 함께 젖었다.

고인 눈물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툭 옷깃을 스쳤을 때에야

그것이 한 사내를 향한 마음임을 알게 되었다.

 

모든 작업을 끝냈을 때,

윤복은 한 손으로 붓을 든 채--- 여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유심히 살폈다.

모든 것은 남고 모자람이 없었다.

윤복은 자신을 응시하는 여인의 눈빛과, 그 눈빛이 쏘아내는 혼까지도 남김없이 살폈다.

터럭 하나의 모자람도 없이--- 모든 작업을 끝낸 윤복은 천천히 붓을 내려놓았다.

 

미인도

 

여자로 태어났으나 여자이지 못했고,

한 아비의 딸로 태어났으나 또 다른 아비의 아들이어야 했다.

화원이고자 했으나 화원이지 못했고,

혼을 그리고자 했으나 겉모습만 그려야 했다.

 

윤복이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살이 푸른 치맛자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홍도는 그 자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린 듯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여인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보아왔으나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

늘 갓과 중치막자락으로 꼭꼭 숨긴 채 내보이기를 두려워했던 모습.

탐스런 가채를 쓴 단정한 이마 아래로 투명한 얼굴색은 봄꽃 같았다.

홍도는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에 잠시 현기증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너를 일평생 곁에 두고 싶다.'

 

이 그림은 평생을 감추며 살아왔지만,

단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던--- 바로 저 자신의 모습입니다.

저는 평생을 이 여인과 사랑했으며,

앞으로도 여인된 저를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그저 아름다운 그림, 그저 뛰어난 그림을 그리는 화인은 별처럼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조선을 아껴 후대의 후대에 어떤 천재를 내어도

이같은 걸작을 다시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바람의 화원이었다.

바람처럼 소리 없고, 바람처럼 서늘하며, 바람처럼 자신을 보여주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찾아 떠나는 그 길을 차마 나는 나설 수 없었다.

그녀는 바람이었고, 나는 그녀가 흔들고 간 가지였다.

남아 있는 나의 생은 오직 그녀를 그리워하기 위한 시간이었고,

그녀를 생각하기에만도 나의 삶은 모자랐다.

평생을 그녀가 남긴 그림을 바라보며 나는 늙어갔다.

 

이제 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마쳤다.

내가 알았던 한 얼굴에 대한 아프고도 부끄러운, 아주 긴 이야기를.

 

누구도 이 거짓말같은 이야기를 믿으려들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지 모른다.

눈을 감으면 먼 황톳길을 걸어가는 한 여인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한때 나의 어린 제자였고, 나의 경쟁자였던---

어쩌면 내가 사랑했을지도 모르는,

아니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그 여인 신.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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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에 대해 남아 있는 두 줄의 역사적 기록이 두 권의 긴 이야기로 펼쳐졌다.

역시나 작가의 상상력은 무궁한가 보다.

역사적 사실들과 작가의 상상력이 씨실 날실로 얼키설키 엮어내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항상 흥미롭다.

[바람의 화원]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모른다.

다만 작가를 따라서 홍도와 윤복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느낄 뿐이다.

어차피 지난 역사에 대한 기록이나, 그 역사적 바탕 위에서 허구화된 이야기는

작가의 사관과 편애와 창의력에 의해 사뭇 달라지는 거니까.

 

이 책을 읽다 보니 김홍도의 이야기를 다룬 동화 [김홍도, 무동을 그리다]가 생각났다.

아이들이 읽으면 즐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