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앵전 1
# 1939년 광주. 광주 권번.
권번(券番) : 일제강점기에는 영화감독이 여배우가 필요할 때 권번에 연락해서 역할에 맞는 외모와 연기력을 가진 여배우를 캐스팅했으며, 레코드 회사가 음반을 취입하고자 할 때도 가수가 소속된 권번을 통해서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광고회사에서 광고모델을 섭외할 때도, 이벤트행사에 도우미가 필요할 때도, 권번에 섭외 요청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수나 배우, 모델이 되고 싶은 끼 있는 소녀들은(심지어 소년들까지도) 인기 스타를 배출한 권번에 오디션을 봐서 들어가곤 했습니다. 이렇듯 권번에선 가능성 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교육시켜 훌륭한 연예인으로 만들고, 데뷔 후에는 그들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권번은 요즘의 모델 에이전시나 연예기획사와 비슷한 기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효금이, 규태--- 두 사람 다 훌륭혔다.
이 승무는 남성적인가 허면 여성적이고, 여성적인가 허면 남성적인---
동중정, 정중동으 춤이라고도 헌다.
여자이지만 남성적인 패기를 가진 효금이,
남자이지만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규태에게
이 승무는 더 없이 잘 어울리는 춤이여.
너그들은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
그러나 예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재능만으론 부족허제---
재능을 갈고 닦는 노력 또한 중허단 말씀이시죠잉?
글씨--- 물론 노력도 중허제---
천재는 압도적으루다가 그 재능을 빛내기 나름이지만--- 은젠가는
천재이기 땜시 부딪히게 되는 '천재으 한계'를 경험허게 된다 이 말이여.
머지않아 너그들도 그 한계를 경험허게 될 것이여.
천재으 한계를 넘어서서 역사에 남는 명인이 되야불는지---
순간으 재능을 불사르고 한 줌 재가 되야불지는 너그들에게 달린 것이여.
# 경성.
광주에서 올라 온 동기(童妓)라고? 그럼 이 집이 딱이야!
이름난 요정, 요릿집들도 멀지 않고.
조선 권번, 종로 권번, 한남 권번 같은 경성의 3대 권번 사무실도 여기 다 모여 있지.
마당이 없어서 춤 연습허기 힘들것다.
효금아--- 인쟈 우린 여그 경성서 살아야 혀.
그리고 여그서 너는 유명해질 거여.
그러려면 이름도 바꿔야것제. 그 인간이 절대 우릴 찾을 수 없도록---
이웃집에 돌릴 떡을 낼름 집어먹는 벱이 어딨소!
나도 이 동네 사람이니 봐주라~ 이래 봬도 이 동네에선 날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나, 안동 김씨 김두한이다. 네 이름은 뭐냐?
나주 임씨 임효금이요.
하하하! 너 맘에 든다!
언제 한 번 우미관에 들러라! 떡 잘 먹었다, 꼬마야!
춤반 3년에 신무용은 전혀 배우지 않은 건가?
뭘 가르치는 거야, 광주에선?!
아, 긍께. 박영구 선상님께 승무를 배우고, 신갑도 선상님께 검무를---
광주는 예향이니 어땠을지 모르지만, 경성에선 무슨 행사가 아니고서는 승무니, 검무니 하는 옛무용은 출 일이 별로 없단 말이요--- 그렇다고 옛무용이 아주 수요가 없는 것은 아니니, 일단 한 번 시험을 받을 수 있게 해주겠소.
신대우 선생님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평소 존경하던 신 선생님 앞에서 공연을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두근거리고 달아올라 숨이 차오르네요.
근디 이 신대우란 남자는 뭐 허는 사람이길래---
자자--- 그럼 분위기도 무르익었는데 우리 극단 자랑거리인
최영심의 소리 한번 들어볼까?
~~~~~
신대우 : (속으로) 한심하군. 예쁘게만 부르려고 하고, 이몽룡을 그리워하는 춘향이의 이면을 전혀 그리지 못하고 있어.
효금 : (당당하게) 이면을 그리지 못허는구만이라. 아, 소리라는 거이--- 가사으 내용을 이해허고, 그에 맞게 이면을 그려야 허는디--- 소리으 음양이 맞지 않소.
!?!?
하하~ 뭘 모르는 기생년 하나가 분위기를 망쳤군요.
고작 어린 아이가 한 몇 마디 말에 기분이 상하시면서---
제가 쓰는 비평을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웬일이세요? 소장님이 저런 아이에게 관심을 다 보이시구---
이 바닥에서 애들을 보다 보면 말야--- 어쩌다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
얘는 뭐가 돼도 되겠다--- 그런 느낌 말이야---
기생이라는 직업은 조선의 유교적 계급사회에서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당시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예술과 정치, 문화 등의 교양을 쌓은 신여성이었다.
그리고 예술가를 '환쟁이', '광대'라 부르며 천하게 여기던 조선에서
전통예술을 지켜온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대화를 거치며 대중화된 기방문화는
일본의 유곽문화와 결합하여 천박한 유흥문화로 타락하고 말았다.
손님들은 기방 예의도 없이 돈다발을 흔들며 기생들의 치마폭을 들추고,
기생들 역시 예능과 교양을 익힐 생각도 않고,
오직 신세 고치는 수단으로 자신의 직업을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유곽에서 매음을 하는 여성들마저도 자신들을 기생이라고 칭하고 다니는 실정이니
기생이라는 직업이 가지는 위상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
기방문화의 타락과 동시에 우리 전통예술 역시 타락하지 않을지--- (신대우)
양팔통(陽八通)이네.
양팔통이오?
태어난 연, 월, 일, 시--- 4주 8자가 전부 양의 글씨로만 되어 있다 이 말이야~
이거이거 완전 남자 팔자를 타고 났구만?
카~ 아깝네, 아까워~ 사주 자체는 참 좋은데---
남자로 태어났으면 삼군을 호령할 대장군 감인데, 여자라서 글렀네.
여자는 장군 하면 안 되남요?
여자 장군 들어 본 적 있냐?
지하여장군이요---
나중에 죽어서 지하에 묻히거든 네가 여장군 하렴.
--- 지하에선 어떤지 몰라도 우리가 숨 쉬고 사는 이 천하에선 대장군은 남자뿐이야.
그래서--- 이 애 이름을 새로 짓고 싶다?
예--- 앞으로 예인으로 대성헐 이름으루다가---
임효금~ 수풀 림에 효도 효, 비단 금이라---
흠--- 양팔통 사주에 이런 이름을 지어줬다 이말이지?
아마 양팔통의 드센 기운을 누르려고 효금이란 이름을 지어준 모양인데---
자기 본래의 기운을 누르는 이름을 가지고 대성할 순 없지.
명창 임유앵이 네 큰언니라고 했지?
예에--- 버들 유에 꾀꼬리 앵이렸다?
잘됐군. 이 아이에게는 따뜻한 기운의 이름을 지어줘서 기를 살려줘야 하니까---
수풀 림, 봄 춘, 꾀꼬리 앵--- 꽃 피는 봄에 숲 속의 꾀꼬리가 지저귀는구나!
임춘앵, 이 이름이라면 네가 타고난 양팔통 팔자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그러나 네 운명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은 포기해야 할 거야.
그래도 좋으냐?
임춘앵--- 마음에 들어.
에그--- 어쩌다 저 인간에게 걸렸대. 종로 바닥 최고의 악질인데---
자신도 조선인이면서--- 일본 놈들보다 더 독하다니까---
어제 일은 권번 선생에게 얘기는 들었네만--- 왜 하필 쿠니모토 마리코를 건드렸나.
일본 다카라즈카 예술학교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 후에 조선 무용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종로경찰서와의 연줄 때문에 특례로 입학시키긴 했는데--- 형사 아버지 끗발 믿고
멋대로 구는지라 우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있다네.
방금 너를 찾는 지명이 들어왔다.
지난 번에 요릿집에서 너를 마음에 들어하신 분이야.
네가 가장 자신 있는 춤이 보고 싶다고 하시는 구나---
그 분은 예술계와 사교계에서 유명하신 분이야.
그분께 예쁘게 보이면 이번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을지 몰라.
그때 자신을 칭찬하던 신대우 평론가를 떠올리는 춘앵.
가심이 퉁게퉁게---
누구 앞에서 춤을 추든 요로코롬 떨린 적이 없는디---
진정허자--- 잘헐 수 있어.
그때, 스윽~ 뒤로 나타나는 신대우가 아닌 경성 제일의 물주.
지난번에 듣자하니, 기생이 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그날이 지 첫날이고, 오늘이 두 번째여라.
그래? 그럼 내가 네 머리를 올려주랴?
내, 네 꽃값은 서운하지 않게 치러주마. 그래, 얼마가 필요하냐?
천 원---
(삐질삐질) 천 원이면 경성 시내에 집을 사고도 남을 돈이야!
내 나이 열 여섯, 이팔청춘이요.
나으리 같은 분을 평생의 첫 남자로 받아들이는데,
집 한 채도 얻지 못한다면 어디 기생해먹것소?
효금이 누나는 기생이 되면 머리를 올릴 거여?
글쎄--- 언젠가는 그렇게 되지 않것어?
그렇구나---
그건 왜?
(머뭇머뭇) 그게--- 언젠가 누나가 머리를 올리게 되면--- 나가 누나으 머리를 올려줘도 될까?
(화끈) 긍께--- 지금 시방 니가 나으 기둥서방이 되것다 이 말이여? 우허메에~ 아그야아~!
나가 니 기둥서방을 혔으면 혔지~ 대그빡에 피도 안 몰른 자슥이~ 헛소리나 삐약삐약 혀쌌고---
나 지금은 무엇 하나도 누나를 이길 순 없지만---
언젠가 나가 조선 최고의 춤꾼이 되믄, 누나를 내 색시로 맞을 거여.
언제였던가! 부끄러워하면서 다짐해주던 규태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춘앵.
집 한 채 값 아꼈다고 생각허씨요!
한 마디 툭! 던지고 나와버린다. 하지만---
엄니--- 미안--- 휴--- 이제 어디서 천 원을 구한담---
----------------------------------------------------------
스토리작가 전진석의 이야기 구성력은 참으로 뛰어나다.
공부를 많이 하고, 무진장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천부적인 재능인 것이고--- ^0^
이야기들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매번 감탄한다.
남성적이었던 춘앵에게 걸맞을 수밖에 없는 여성적 이미지의 규태라는 인물과,
그들의 순수한 애정을 드러내도록 끼워 넣은 춘향가와 김유정의 '동백꽃' 이야기.
그리고 일제강점과 근대화로 인해 혼란스럽고 불운했던 시대적, 문화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운에 인생을 맡기지 않고 단호하게 삶을 개척해 나가던 춘앵의 강한 노력을
창씨개명이 아닌 팔자에 날개를 달아주는 새로운 이름으로, 또 김두한과의 만남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지방 사투리를 맛깔스럽게 구사하여 생동감까지.
그림 작가 한승희 님의 그림도 [천일야화] 때보다 더 깊어지고, 정성이 들어가 보인다.
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