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8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넓은 정원이 있는 멋진 집을 나는 진심으로 지을 생각이었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최신 시스템의 부엌과 지하 스튜디오.
네 방 옷장에는 유행하는 옷을 빼놓지 않고 갖춰 놓고---
남자 때문에 울기만 하는 네가
몇 번이고 되돌아와도 웃을 수 있도록.
각오는 했었어.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건.
나나, 노부나.
같이 가자, 야스.
난, 그 한 마디를--- 도저히 꺼낼 수가 없어.
그럴 수밖에.
야스한테는 야스가 선택한 인생이 있고, 노부에겐 노부에게 주어진 미래가 있잖아.
말 못 해.
그러니까 야스가--- 스스로 원해서---
가지 마라. 쓸쓸하잖아.
한심하긴! 그럼 네 녀석이 와!
교섭 결렬이군. 그럼 애써 보셔~
야스! 변호사 사무실이라면 도쿄에도 있어.
이 마을에서도 노랜 부를 수 있지.
하지만--- 이곳엔 돔이랑 무도관이 없는 걸.
어리석은 꿈이라고 여겨도 좋아.
난 언젠가 반드시 커다란 무대에 서서, 수많은 스포트라이트와 환호를 받으며
죽어라 써도 남아돌 정도로 돈을 벌 거야.
그저 노래만 하는 걸로 행복한 공주님이 아니니까.
노래는 내가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니까.
언젠가 반드시.
그리고--- 기차에서 너를 만났다.
그건 잊을 수도 없는 2001년 3월 5일.
스무 번째 생일날.
나는 그렇게 너와 만났다.
상경 도중 열차에서 만나,
무슨 인연인지 같이 살기 시작한 고마츠 나나(통치 하치코)는
제멋대로에, 울보에, 어리광쟁이에, 거기다 희한할 정도의 연애 체질,
그것도 잘도 갈아치워서,
상경한 지 반년도 안 돼, 남자가 이미 3명째.
헌데 조금도 더러워지지 않는 희한한 여자였다.
하치는 우리 밴드에 있어선 펫같은 존재로--- 뭐 좋게 말하면, 마돈나다.
하치가 그곳에서 웃고 있는 것만으로 주변이 빛을 발하고,
스튜디오에서나 라이브에서나 모두 활기를 띠었다.
그건 실력 있는 새 멤버를 영입하는 것보다, 의미있는 일로 여겨졌다.
천진난만한 건지, 만만찮은 건지.
너는 모르겠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지금은 태풍과도 같은 세력을 지녀서
내 마음을 휘두르고 있다는 걸.
나는 마치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된 소년처럼---
부풀어가는 연정이 위험수위라는 걸.
그 무렵, 난 일주일의 반 정도를 렌의 방에서 보냈지만
엇갈린 적도 많아서 만날 수 있는 건 아주 잠깐이었다.
단둘이 있으면 서로 갈망하는 충동을 제어할 수 없는 우리에게---
서로의 얘기를 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기분 잡치는 쓸데없는 얘기까지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 무렵 나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꿈이 있었다.
덕분에 많은 것을 손에 넣었고,
둘도 없이 소중한 것을 잃었다.
하지만 죽기살기로 살았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런 후회는 없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딱 하나.
있잖아, 하치.
넌 지금 웃고 있니?
타쿠미 : 평소엔 잊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나면 무쟈게 사랑하고 싶어지는 건 뭐냐?
렌 : 두말 필요 없이 좋아하는 거네.
타쿠미 : 빨리 안 끝나나.
렌 : 뭐가?
타쿠미 : 여름방학.
유리도 블래스트를 따라다닌다는, 사는 보람을 찾고부턴 장밋빛 인생입니다!
유리는 중학교 때부터 라이브하우스에 늘 혼자 와서,
나는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었다.
고향에서는 부모나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남이 들으면 기겁을 할 말을
큰 소리로 사는 보람이라고 말하는 너에게
내가 얼마나 용기를 얻고 있는지 알고 있지, 유리?
렌이 아이를 바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기가 있어도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아마도---
어머니가 될 자신이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사정이야 어떻든, 신네 부모가 무책임한 건 틀림없어.
제대로 기르지도 못할 거면 낳질 말아야지. 세상엔 한심한 엄마들이 너무 많다니까.
하치가 내 말에 반문했다.
꼭 한심해서 낳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제대로 키울 수 없었던 건 틀림없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거고---
아이가 생기면 낳아서 기르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잖아.
뭐? 어째서 당연한 거야?
어? 어째서라니--- 잘은 모르겠지만--- 모성본능아닐까?
그럼, 예를 들어 지금, 만약 렌의 아이가 생긴다면
프로 데뷔를 앞둔 터라, 틀림없이 곤란하겠지만,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까?
렌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본능으로?
말도 안 돼.
나나--- 문 열어.
---
부탁이야, 열어.
앗! 큰일났다! 사람이 와!
(철컥) (끼익) 믿지 말라구. 내가 하는 말따윈.
뭐 하러 왔어? 돌아가!
이런 때,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경우엔 어떻게 하면 좋지?
후다닥 욕실로 뛰어들어가서 변기를 붙잡고 고통스러워 하는 하치.
입덧?
낳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
타쿠미가 책임질 일 없으니까--- 내가 멍청해서 그런 거야---
혹시 그이의 아이일지도 모르고---
돌아가--- 두 번 다시 오지 마.
그이란, 노부?
(상당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그래, 알았어.
욕실문을 잠그고 하치의 휴대폰으로 노부에게 전화를 거는 타쿠미.
나나한테 아이가 생겼다. 누구 애인지는 모르지만.
뭐, 누구 애든, 나나가 낳고 싶다면--- 내 자식으로 인정하고 돌봐 줄 생각인데.
네 생각은 어때?
있잖아, 하치.
자기 인생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해.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강해질 수는 없는 법,
인정할 수 있게 된만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트랩네스트'의 의미는 '덫이 있는 새장'
한번 들어가면 자력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게 된다.
지배욕이 강한 남자가 고안했을 법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타쿠미도 오늘은 분~명히 하치코한테 갔고, 하루종일 안절부절 하더니, 쏜살같이 가버리더라.
나나--- 직접 본 적은 없는데, 듣기론 상당히 수완 좋은 여자더라구.
나오키, 너, 뭔가 곡해를 하고 있는데--- 그 둘은 이미 쫑났어.
무슨--- 그건 쫑난 게 아냐.
타쿠미가 마음에 들어 한 여자를 그렇게 간단히 놔줄 리가 없잖아.
왜 아무 말 없어? 뭐라고 해 봐! 책임을 질 건지, 물러날 건지!
타쿠미는 무엇 때문에 화가 났을까?
그렇게 고민하지 마. 우선 누워 있어. 유산이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너는 스물이 됐는데도 믿음직스럽지가 못해.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외로우면 금방 남자랑 자기나 하고, 그러다 결국 아이까지 생겨서 어쩌지도 못하다니--- 부모님이 통곡을 하겠지? 내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지만.
애 아버지가 누구든--- 엄마는 틀림없이 너니까, 마음 굳게 먹어.
(진심이라면---썩~ 괜찮은 남자처럼 보이게 하는 대사)
있잖아, 하치.
난 네게 목줄을 달아서라도
내 곁에 붙들어 두고 싶었어.
그런 자신이 두려워서, 늘 일부러 조금씩 거리를 둔 거야.
친구는 지금도 잘 만들지 못해.
아직은 조금--- 두려워.
더 이상 침대가 좁다던가, 지갑을 잊었다던가---
적당한 거짓말로 속일 여유도 없었다.
내가 견딜 수 없이 외로울 때,
곁에 있어 주길 바랐던 건 렌이 아니었다.
하치가 타쿠미의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야스---
괴로워서, 숨쉬는 것도 버거워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에 와 있었다.
모든 걸 쏟아내듯 털어놨지만, 제대로 설명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왜 이렇게 하치를 원하는 건지도,
왜 이렇게 타쿠미가 미운 건지도,
스스로조차 잘 몰랐으니까.
노부가 나 보고 이상하대--- 나--- 이상해?
보통은--- 친구라면--- 이런 때 어떻게 하는 거야?
난 하치랑--- 보통 친구처럼 되고 싶은데---
야스는 그저 묵묵히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어쩌면 가끔 달래는 듯한 말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달콤한 블랙스톤 향에 에워싸여 있자니, 이상하리만큼 평온해져 가는 걸 깨달았다.
괜찮냐, 나나?
괜찮아. 제대로 할 수 있어.
평범하게 친구를 사귀는 건 역시 잘 모르겠지만.
하치가 누구와, 어떤 인생을 걸어가든, 간섭하지 않고 다정하게 지켜볼 거야.
야스가 나한테 그렇게 해 주는 것처럼.
말처럼 쉽진 않을 걸?
미안해, 야스.
고마워, 괜찮아. 잘 해낼 거야.
그럴 수밖에--- 나랑 하치는 같은 여자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애타는 걸까?
나, 오늘부터 녹음 들어가. 그 전에 네 결심을 들려 주지 않을래?
이대로는 안정이 안 돼서 일 못 해.
--- (삐질삐질) 아이는--- 타쿠미의 아이로 낳아서 기르고 싶어. 폐가 안 된다면.
(희미하게 놀라는 듯, 미소짓는 듯,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결혼할까?
어?
사생아는 좀 그렇잖아. 세간에 발각되면 아무리 감싸봤자 이미지도 안 좋고.
하지만 평범하게 결혼하면 문제 없잖아?
상대가 일반인이라면 매스컴도 그렇게 떠들진 않을 거야. 싫어?
(하치, 놀라면서 도리도리)
타쿠미, 흐뭇한 미소를 짓고--- 하치는 눈물이 글썽글썽.
(우우~ 이렇게도 결혼하는구나! )
네가 누구와 어떤 인생을 걸어가든
네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성인 같은 사람은 될 수 없어도,
네 눈동자에 비치는 나는,
강하고 유연하길 바랐어.
능력이 넘치는, 만화주인공처럼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