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Let 다이 / 이교도의 춤

2008. 2. 19. 15:08

 

지금부터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이야기야.

어떤 왕국의 작은 마을에 한 남자가 흘러들었대.

남자는 그 마을이 맘에 들어 정착하기로 했어.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 남자에게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았어.

남자의 생김새며, 쓰는 말이 마을 사람들과 전혀 달랐고,

더구나 마을 사람들이 믿는 종교엔 남자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지.

마을 사람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남자가 무서워서 자꾸 남자를 멀리 했어.

 

남자가 마을에 살기 시작하고서 스무 번째로 맞는 일요일,

마을 사람들이 기도를 끝내고 나오자, 교회 앞 광장에 그 남자가 서 있었대.

남자는 마을 사람들을 소리 없이 바라본 후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대.

순간 마을 사람들은 남자의 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대.

두 팔을 좍 벌리고 춤추는 남자의 모습이

마치 드넓은 하늘로 자유로이 날아오르는 독수리 같았대.

두 발로 대지를 치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마치 바다 속을 우아하게 헤엄치는

돌고래 같았대.

남자의 몸은 마치 중력에서 해방된 것처럼 자유롭고 압도적이었대.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하여 남자가 춤을 끝냈을 때

광장을 가득 메운 마을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성을 그에게 보냈대.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남자를 받아들였지.

 

남자의 소문은 어느 새 먼 마을까지 퍼지고

그 춤을 보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이 남자가 사는 마을로 몰려 들었대.

남자는 그저 변함 없이 묵묵하게 춤을 추었대.

남자가 마흔다섯 번째 일요일을 맞았을 때

질투심 많은 왕의 귀에도 그 소문이 흘러들어갔대.

왕은 부하에게 명령했대.

이교도의 두 다리를 '절단하라'.

부하는 왕의 명령에 따라 두 다리를 잘랐다.

마을 사람들은 남자의 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비탄에 젖었다.

그러나, 일흔 번째 일요일을 맞았을 때

두 다리를 잃은 남자는 다시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래서 말야, 그 이교도는 어떻게 되었어?

남자가 마을에서 맞는 일흔 번째 일요일, 두 다리를 잃은 남자는 다시 광장에 모습을 나타냈어.

그리고 의자에 앉은 채, 두 팔과 두 손과 양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춤을 추기 시작했지.

그 춤 역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어.

그 춤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자,

이번에는 왕의 부하가 두 팔을 싹둑 잘라버리고 말았어.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그의 춤을 볼 수 없을 거라 아쉬워했지.

그런데도 백서른 번째 일요일, 남자는 다시 광장에 나타났어.

사람들은 숨죽여 그를 지켜봤지.

그런데 남자는 목을 교묘하게 움직이면서 목으로 춤을 춘 거야.

그러자 끝내 왕의 부하가 남자의 목까지 쳐버리고 말았는데,

땅으로 구르는 남자의 목을 본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비명을 질렀지.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 놀라웠던 건

남자가 리듬을 바꿔가면서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눈으로 춤을 췄던 거야.

하지만 그 춤은 오래가지 못했지.

그리고 남자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죽어갔어.

그런데, 남자의 육체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지만

남자의 춤은 마을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그 후에도 오래오래 이어져내려갔대.

그 남자의 전설은 지금까지 입을 통해 내려오는 거야.

이렇게 너와 나에게까지.(레벌루션 No.3  '이교도의 춤)

 

그래서 그 왕과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다만--- 우리에게 아무리 고단한 인생이 펼쳐져 있다 해도,

상처받고 좌절하는 일이 있다 해도---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추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추는 거야!

 

나 말이야. 그때 철길에서 죽음을 경험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내 나이에 건방지게 잠시 삶을 알 것 같았어.

그런데 삶이란 게 말이야. 감정에 빠져살아보지 않고 어떻게 알겠어?

아무런 감정 없이 사는 삶이라는 게, 과연 산다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런데 그 감정이 열정으로 둔갑할 때, 비로소 삶이 숨을 쉬는 것 같더라.

그래서 말야--- 네 말대로,

멈추지 말고 끝까지 추는 거야. 멈추지 말고 끝까지 추는 거야.

 

다이가 전해주었던 '이교도의 춤' 이야기는

다이와 제희의 사랑이었고, 그들의 다짐이었다.

다이와 제희는 그들의 다짐대로 끝까지 출 것이다.

다리가 잘려나가고, 두 팔이 잘려나가서, 끝끝내 얼굴로만 남더라도.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면서, 끝내 출 것이다.

그들만의 춤을.

바라보는 이 없어도, 응원해주는 이 없어도

처절하게 추어댈 그들의 춤이 서글픔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든 책이었다.

호흡이 긴 문장들 때문에 소설을 읽는 느낌도 들었고,

현실인지 만화인지 구분하기 힘든 표현들과 장면들 때문에 보는 내내 긴장하였다.

긴장감 때문인지 다이와 제희의 이야기가 나를 둘러싸며 힘겹게 다가왔다.

그래서 답답하고, 쓸쓸했다.

 

나는 예전부터 의식 있는 저항이 아니라

자의식에 끌려가는 충실한 반항 그대로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무언가 박차고 뛰쳐나가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과도기 세대들의

냉소와 자학, 자기 파멸의 유희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싶었습니다.

현실에 편향하는 모든 안주와 순응과 합리성에 돌팔매를 던지고,

결국 자기가 던진 그 돌에 맞아 죽는 그런 위험한 젊음의 이야기 말입니다.

[Let 다이]는 소외된 성을 통해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단순히 성별에 따라 강요되는 사랑에서 벗어나서 만난 그들의 자유로운 영혼은,

이 사회에서 거부당한 굴절된 사랑의 고통을 현실로 보여줍니다.

그들의 사랑이 신의 섭리를 벗어났다는 이유로

여지없이 배척당하고 경멸 혹은 호기심의 대상으로 손가락질 받아도,

그들은 결코 반윤리적인 변태들이 아닌

그저 철저하게 소외된 소수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보편적인 법칙만을 논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사랑을 강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당당하게 어둠에서 양지로 끌어올려

긴 그림자의 여운을 남기고 싶은 것이 저의 의도입니다. (원수연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