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Let 다이 / 제희

2008. 2. 11. 12:21

 

도움을 청하던 절박한 순간에 잔인하게 돌아섰던 다이를 다시 만나 분노하는 은형.

다이는 억지스러운 분노라고 말한다.

은형, 다이의 말에 묘하게 설득을 당한다.

 

그래--- 그럴 수 있는 거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니까.

세상 누구한테든--- 날 도와야 한다는 의무를 떠맡길 수는 없다.

그런 거다. 세상이 다 그런 거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세상살이가 그런 거였나?

고작, 이런 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란 말인가?

 

다이가 은형이를 두고 나가자고 한다.

안 돼. 난 은형이와 함께 가야 해!

뭐? 대체 저 계집애가 너에게 뭐야?

모르겠다. 쾌락과 도덕 사이에 서있듯이---

어쩌면 나는 다이와 은형의 사이를 간음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때도 은형인 혼자였다.

난 은형이의 친구였는데도 지켜주지 못했다.

다이를 거부한다는 건 은형을 보호한다는 것보다 몇 배의 힘을 더 필요로 한다.

선택할 수 없는 선택.

 

다이가 함께 나서지 않고 은형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화를 낸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다른 길들처럼--- 넌 내가 아니었어.

의미를 헤아리기 어려운 말 뒤에 잡힐 듯 말 듯한 다이의 침묵.

그래--- 그래, 있는 힘을 다 모아도--- 너를,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독히도 상처에 중독된 사람들이기에---

 

은형이의 아픔을 결코 이해해줄 것 같지 않는 은형의 부모.

무자비하고 인정머리 없고 냉정하기만 한 이 사람들이--- 나의 부모님들이다.

아버지 앞에선 벌벌 떨고, 자식 앞에선 위선적인 엄마. 너무 완고한 아버지.

이분들은 내가 당한 일들조차 절대 용서하지 못할 분들이다.

날 낳아주시고, 날 사랑해주시고, 내게 고마웠던 분들인데--- 왜 이렇게 됐을까.

오랫동안 걷다보니, 나 너무 멀리 왔나봐.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가봐.

마치 옷을 잃어버린 것처럼 이곳은 너무 추워. 나--- 너무 많이 걸어왔나봐.

그저 어른이기만 한 부모 때문에 은형이의 상처는 좀체 마르기 어렵다.

 

어색하게 헤어진 후로 제희는 다이를 찾는다.

다이! 눈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다이--- 다이--- 그 찰나적인 아쉬움은 그에게로 향한 나의 감정을 행동으로 이끌었다.

우연히 마주친 다이의 모습은 나의 객기를 충동질했다.

먼 훗날이 지난다 해도, 항상 되묻고 싶다.

다이--- 어째서 너는 이름 하나만으로 날 가두어버리는 거지?

 

기도의 힘으로 중병의 제자들을 살려내는 미사(미친천사) 선생님이 다이를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더할 나위 없는 자애로운 표정을 한 미사 선생님이

다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다이의 표정은 마치 연약한 먹이를 둔,

인간의 동정심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잔혹한 야수의 얼굴로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사 선생님의 기도는 계속되고--- 나의 떨림은 다시 시작된다.

 

은형이 만나지 마.

걔가 니 거냐?

대꾸할 질문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입 닥쳐!

왜 그러는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 생각!

이봐요, 선생님! 나--- 주님의 아들 맞나요?

다이는 뭔가 잔뜩 음모를 부풀린 눈으로 물었다.

그럼, 주님께 기도해주세요. 신의 섭리를 어기고 타락에 빠져있는 우리 둘을 위하여.

무슨 뜻이지?

우리 둘--- 사랑하고 있거든요.

미사 선생님이 놀라고, 다이는 사실을 보여준다며---

늦어버렸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다이의 입술이 겨울의 꽃잎처럼 차갑게 포개져온다.

나는 다이에게 빠져들어간다.

 

너희들--- 정말 사랑하는 사이구나.

진심을 담아, 그토록 절실하다면 그것은 축복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담담하게, 미사 선생님의 진심어린 마음이 전해져 왔다.

인정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처음으로, 우리의 감정이 아무런 비웃음 없이 인정받았다.

그것도 학교라는 엄격한 제도 안에서---

가슴이 가볍게 뛰었다. 하지만 다이는 달랐다.

말없이 미사 선생님을 바라보는 다이의 눈에서 어슴프레한 살의가 느껴졌다.

 

다이를 만나러 가겠다는 은형을 제희가 막아섰다.

자, 갈 테면 날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가라!

은형이는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날 쓰러뜨렸다.

난, 네가 지겨워!

그래, 알고 있다. 은형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잊고 싶은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역겨운 존재라는 걸.

그렇게 해서라도 떨굴 수 있다면--- 난 달갑게 받겠다. 너의 뜻이므로.

니가 꼭 그래야겠다면-- 함께 가자.

너, 아니? 다이는 내가 오길 바라고 있다는 걸---

 

은형을 뭉갰던 극진파 떨거지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다이.

모두들, 서로를 기억하길 바란다. 여기서 굿이나 한 판 벌여볼까 해서. 자, 이제 놀아봐라.

뜻밖이란 표현은 지금 이 당황스러움을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어이가 없다.

약간의 실랑이. 은형이 서글프게 절규하고, 제희가 분노했다.

다이가 일어섰다. 은형을 보며, 너. 지금부터 찍소리 말고 똑바로 봐!

아이들은 깨달았다. 다이의 목적은 극진파 애들을 하나하나 겨냥해 가는 것임을.

폭력의 공포가 장중하게 우리를 휘어잡았다.

어둠과 더위와 피와 섞인 땀방울. 다이의 폭력은 너무나 잔인했다.

 

잘 봐둬! 녀석들에 대한 분풀이는 실컷 해줄 테니까.

그래서, 이것 때문에 만나자고 한 거니?

서로의 악연을 끊어버리자는 얘기지!

이걸로 더 이상 제희를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게 하란 말야.

그렇다면 더 죽여줘!

네가, 네가 감히 어떻게 알아? 그렇게 간단하게 쉽게 상처를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공포보다 더욱 깊고 강한 그 치욕을 누가 알 수 있겠어.

 

다이.

내겐 사랑이 너무 무겁다.

사랑이 너무 아프다.

사랑이 너무 비장하다.

모든 것을 가로막으면서 전부를 빨아들이는 저 눈.

내 안에서 슬픔이란 전율이--- 4월의 노래처럼 끝나지 않는다.

 

축제의 피날레야! 이 드라마는 이제 나만 족치면 끝나는 거야.

그러니까 네게서 영원히 제희를 떠나보내!

두 번 다시 제희와 내 앞에 나타나지 말란 말야!

왜 그래야 하지?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

제희와 나 사이에는---

누구든 우리 사이에 들어오면 불행해질 뿐이야.

그건 아니야!

제희의 말을 막는다.

내게 어정쩡하게 머물려 하지 마!

그러니까, 자! 어서 저 계집애 보는 앞에서 날 때려! 어서 갈기라구! 저 계집애가 속시원하다고 할 때까지! 다시는 더이상 나와 널 탓할 수 없게.

 

모든 것이 여기서 멈췄으면 좋겠다.

여기가 절벽 끝이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모든 걸 끝낼 수 있잖아.

왜 자꾸--- 왜 자꾸 지쳤는데 길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걸까.

그래, 다이가 언젠가 나에게 말했었지. 어디론가 사라지는 다른 길이라고.

나는 그저, 저 작은 새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제대로 잡아주지도 못했어.

하지만, 아픔은 은형이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었어.

난 오랫동안 다이를--- 잃었다.

 

나는 두려워.

이 순간이 지나면 우리에겐 무엇이 남아 있는 걸까.

과연 은형에게 평화가 돌아올까!

너와 내가 사랑하는 한--- 평화는 없어.

나는, 다이를 내리쳤던 내 주먹이 못내 서글펐다.

언젠가 이 손으로 다이의 배를 찔렀었지.

차라리 내 배를 찔렀었다면 그렇게까지 서글펐을까---?

뜨거운 액체가 내 볼에 영원히 머물 것 같이 흘러내렸다.

우리가 사랑하는 한--- 평화가 없다니---우리에게--- 왜?

나는 우리의 사랑이 그렇게 고통스러움에 눈물이 솟구쳤다.

제희야, 울지 마라--- 제희야, 그만---

처음으로 나는 내 감정을 절제할 수 없었다.

 

다이가 제희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항상 가슴이 답답해!

왜지?

너로 꽉 차있거든---

어느 정도냐 하면, 난--- 너를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너의 머리카락부터, 너의 반듯한 이마, 그리고 큰 창 같은 눈,

밑으로 너의 동정과 단호한 복숭아뼈가 있는 발목까지---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먹다보면--- 아쉬울 거야.

생각만 해도 서글퍼져--- 널 마시고--- 널 삼킨다--- 

누구도

우리처럼 어린 나이에

그토록 절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못한다.

나는 꿈을 꾼다.

그래--- 편할 거야. 네 속에 내가 있다면---

 

휴식 같은 밤이다.

은형은 제희의 가슴 위에 머리를 대고,

제희는 다이의 허벅지에 머리를 두고,

마치 은은한 소리 울리는 트라이앵글의 안식처럼

그들은 누워 있다.

오늘 뿐이야. 오늘 뿐이야. 오늘--- 뿐.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다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