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플러그드 보이 / 천계영
UNPLUGGED BOY 무공해 순수 사랑 / 천계영 / 서울문화사
[하이힐을 신은 소녀]를 읽고 천계영이 더 궁금해졌다.
사실 [오디션]을 보았을 때 그림이 워낙 강해서, 강한 것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기질 때문에 다른 작품을 손대지 못했다. 그러다 [하이힐을 신은 소녀]를 읽고 나서 작가의 시작에 관심이 갔다. 다행히 대여점에 낡은 빛깔의 [언플러그드 보이]가 있었다. 두 권 완결이라니! 쑤욱 빼들었다.
두 권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까.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고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호흡이 길면서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는 걸 좋아한 탓에 권수가 많은 작품을 선호한다.
10여 전에 히트쳤다는 [언플러그드보이]
UNPLUGGED BOY는 어떤 의미일까?
작가는 무공해 순수 사랑이라고 했다.
단어뜻 그대로라면 '플러그를 뽑은 소년?'
그렇다면 강현겸, 채지율, 이락과 반고호, 그리고 여명명.
멋진 이름을 지닌 이 아이들은 세상에 접속되지 않아서, 혹은 접속되지 못해서
그대로 순수성이 간직된 아이들인 셈이다.
담배 대신 풍선껌을 씹는 현겸이,
자신에게 다가왔던 순수남 현겸을 천사라 믿는 지율,
따뜻한 세상과 접속하고 싶어서 우는 락,
뒷문으로 들어오는 인연을 믿는 순수녀, 고호
밝고 밝아서 세상이 즐거운 명명이.
그들은 나름 나름 unplugged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꾸밈이 없고, 성장소설처럼 깨끗하고 도덕적이다.
만화이지만 생명력을 가진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작가 천계영.
생명력을 주기 위해서 '언플러그드 보이'에서 '동시대성'이라는 방법을 썼다고 한다.
이 방법은 지금 유행하는 것들을 요소마다 배치하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 익명의 어느 장소에서 이들이 살아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열광할 수 있다.
작가는 동시대성의 함정을 짧은 생명력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몇 년이 지나면 [언플러그드 보이]는 유행이 지난 촌스런 만화가 될 거라고 서문에 적어 놓고 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누군가가 이 만화를 읽게 된다면 1997년 당시의 작가의 의도를 기억해주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작가의 의도는 10년이 지난 뒤에야 읽어본 나에게 충분히 전달이 되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작품이 짧은 생명력으로 촌스런 만화가 될 거라고 했지만, 전혀 촌스럽지 않고 즐거웠다. 오래된 것이 촌스러운 것은 아니다. 좋은 작품은 촌스럽지 않게 고전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말은 겸손했던 것 같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작가는 동시대성 방법으로 이 시대가 원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이힐을 신은 소녀, 고경희와 악마 같은 소년, 양욱일이 펼칠 흥미로운 이야기. 삐삐가 아니라 휴대전화로 소통하는 그들의 사랑은 현겸이와 지율의 사랑처럼 순수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이 시대가 만들어내는 사랑법임에는 틀림없을 것이고, 그 사랑도 미치도록 순수할 지도 모른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내 남자 친구---
쟤네 좀 봐. 여자가 너무 딸린다--- 그런 말 들을까 겁이 나서.
내가 현겸이를 처음 만난 건, 작년 겨울, 연합고사가 끝난 바로 며칠 뒤의 일이다.
무슨 일 때문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한테 혼이 나서 울고 있었다.
새벽 1시의 빈 놀이터에서.
그리고 현겸이가 나타났다.
꼭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양으로---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가끔 현겸이를 천사라고 믿게 되는 것은---
난--- 슬플 땐 힙합을 춰.
이상한 아이. (힙합을 가르쳐주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아무도 내가 슬프다는 걸 눈치챌 수 없도록---
오늘로 내 나이는 만 열 여섯.
현겸아, 나, 네가 너무 좋아.
나도---너 좋아해. 당연하잖아. 봐! 지율아! 강아지야. 지율아, 나, 강아지도 너무 좋아.(쿡^^)
강아지도라구? 역시, 난 또 바보처럼 착각하고 말았어.
현겸이는 나를 전혀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현겸이는 16살이 된 지금까지도,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았다.
여드름 하나 나지 않았고, 변성기도 되지 않았다. 이유없는 반항을 한다거나 이성에 대해 특별한 호기심을 갖는 일도 없다. 사춘기가 오지 않는 것, 그것이 무슨 병인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정말 내 상상대로 현겸이가 천사이기 때문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단지 나 혼자 현겸이를 내 남자친구라고 주장할 뿐.
현겸이에겐 내가 그의 여러 친구들(강아지, 지율이, 풍선껌) 중의 하나일 뿐이다.
현겸아, 난 정말이야. 네가 너무 좋아. 하지만 가끔 너의 그 지나친 순수함이 너무 힘들어.
평범한 열여섯 살이라면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쓰지 않는단 말야.
그래--- 조금 느긋이 기다려 보는 거야.
현겸이에게도 언젠가는 사춘기가 오겠지. 그리고 그땐, 알게 될거야. 내가 왜 울었는지를.
너를 처음 만나던 날부터 난 앞머리를 길렀어. 내 이마엔 너한테는 없는 여드름이 있어.
넌 이렇게 순진하기만 한데, 난 네가 생각하지 않는 응큼한 생각을 한단 말이야.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껴안고 싶다거나, 키스하고 싶다거나---
내 이마의 여드름을 보이면 꼭 이런 생각들까지 들키는 것 같아서,
네 앞에서는 항상 앞머리를 내리고 있었던 거야.
커피도 못 마시고, 맥주도 못 마시고, 고교생 관람가에 키스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놀라는 현겸이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거리감이 없다. 믿는다. 다른 사람도 내 마음 같으려니, 하는 거다.
그래서 이락도 지율이처럼 현겸이를 보고 천사인줄 알았을 것이다.
이락.
이봐--- 나는 똑바로 서 있는데, 왜 세상은 전부 삐뚤어져 있는 거지?
널 처음 봤을 때, 너도 나처럼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서 있었어.
그래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희들처럼 순수해질 수 있다면
그땐 너희의 친구가 되기 위해 돌아올게.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일수록 더 솔직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반대로 말하나 봐.
세상이 싫다는 락이도, 어쩌면 누구보다도 세상을 사랑하는 건지도---
솔직해 진다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비가 오는 날 오토바이를 선물 받았다.
제일 먼저 지율이를 태우고 싶었다.
그런데 지율이가 보이지 않는다.
빗속에서 계속 지율이를 기다렸다.
바보야, 이 비를 다 맞고 있으면 어떻게 해? 화났어?
네가 너무 좋아.
바보야, 이제서야 알게 된 거야?
열 여섯살이 말하는 '좋아한다'의 뜻을---?
하지만 현겸이가 날 좋아하게 되면, 날개가 생기는 거 아니야?
때리지마! 등 아픈단 말야.
뭐? 등이 아프다고?
하하하! 난 또 뭐라고--- 네 등에 여드름이 난 거야. 등에 난 여드름은 원래 아픈거야.
정말 다행이야. 현겸이의 등에 드디어 날개가 생겼다.
하늘로 날아가 버리지 않아도 되는 사춘기라는 날개가.
하지만, 현겸아! 난 알아. 너, 천사 맞지? 네가 떠나면 내가 너무 슬퍼할까봐, 인간의 모습으로 살기로 한거지? 나를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수호천사가 되어서--- 맞지?
나의 천사가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진경이의 허상을 쫓는 여명명과 이락의 환상을 못 잊는 반고호,
그리고 지율과 현겸이는 오늘을 사랑한다.
그리고 함께 있는 시간을 사랑하기로 했다.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고 해서
애써 잊는다든가---
새로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때 그때의 솔직한 감정, 그게 바로 사랑일 테니---
그 감정이 변치 않는다면, 영원한 사랑이고
변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거겠지.
고호에게 락이는 영원한 사랑이 될까? 아니면, 추억이 될까?
지율과 현겸이는 변치 않는 사랑을 이어갈까!
아니면 새로운 사랑에 설레여 가슴앓이를 할까!
작가의 말처럼 그때 그때의 솔직한 감정이 사랑임에 틀림 없더라도,
그 감정이 사랑이라고 주장하기가 어려울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사랑마다 솔직해지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기 때문에.
캐릭터가 마구 섞이면 감동이 덜 한다.
DVD는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