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이랑

하이힐을 신은 소녀

2008. 1. 22. 20:42

하이힐을 신은 소녀 / 천계영 / 서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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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한 소년과

한 소녀의

미친 듯한

사랑 이야기---

아마도

어른들은

이 얘기를

다 듣고도

믿지 못할 거야.

이제 겨우

열 몇 살인

우리들이---

이토록

지독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등학생이 되면 제일 먼저 하이힐을 사겠다고 마음먹었다.

디자이너 구두샵 '하이힐을 신은 소녀'

사람들은 내가 예쁘다고 쳐다본다.

모델인 줄 안다.

하이힐을 신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34세의 나이에 자살한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인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를 듣는다.

모든 것이 내겐 의미가 없어요.

모든 것이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고경희! 고경희가 누구야! 빨리 나와! 전국에서 제일 예쁘다는 고경희 그 계집애 어딨냔 말이다!

누가 나를 찾는다. 귀찮아.

가자. 욱일이가 너 데려오래. 이건 또 뭐야!

죽는 거 하나도 안 무섭습니다. 볼 일 있는 사람보고 직접 오라고 하세요!

양욱일은 진짜 무서운 놈이란 말야.

걔는 그냥 노는 애도, 날라리도 깡패도 아니야! 양욱일 그놈은 악마야!!

뭐? 무슨 악마가 토끼 인형을 안고 자고 있냐!

그런데 이게 누구지? 전철역에서 보았던 그다.

이녀석은 설마--- 그날 전철역에서 본,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메마르고 슬펐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우는.

그런 울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아껴야지만 살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우는 방법.

눈물을 흘리지 않고 우는 울음.

12살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주길 원했었다.

 

여기 찍어. 네 번호. 내 친구들이 너랑 놀고 싶어 해. 내가 부르면 재깍 나와라.

웃기는 놈.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그렇게 간절하면 네가 찍든가, 네 번호. 전화는 내가 내켜야 하는 거구.

그 녀석이 맞는지, 알아낼 수 있는 기회다.

시시하잖아, 아무 데나 앉아서 울기나 하고. 흔들렸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떠오른다. 그 발길질. 차가운 얼굴.

악마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자비한 놈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양욱일. 세상엔 네가 결코 꺾을 수 없는 상대가 있다는 걸 이제 곧 알게 될 거다.

바로 내일이면.

저 계집애, 꼭, 내 손으로 죽일 거야.

열받았군! 양욱일이 나를 창밖으로 밀어버리려 한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죽는 게 안 무섭다고? 그럼 죽는 동안 잘 생각해봐라. 정말로 죽는 게 안 무서운지.

어디, 놓을 수 있으면 놔봐.

그래, 잘가라! 재수 없는 년!

아, 이제 가는구나! 엘리엇 스미스가 있는 곳으로---

그런데 갑자기 뭐냐! 내 손을 붙잡아!

맙소사--- 양욱일, 너 정말---울보였구나! 그때 그 울보가 맞구나.

 

정말 대단하지 않냐? 양욱일이랑 맞짱 뜰 수 있는 애는 고경희밖에 없어.

또 시작이다. 칼로 머리칼을 무자비하게 잘라낸다. 성질껏.

이제 알았으니까, 그만 해. 너 이러는 거, 나한테 관심 끌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대단하군. 그래서--- 이제 나한테 관심이 좀 생겨?

잊었어? 너 같은 애 시시해서 싫댔잖아!

어이가 없네. 야, 고경희! 결국 이럴 거면서 왜 먼저 꼬리를 쳤어?

뭐? 당황스럽다. 설마 양욱일이 내 약점을---?

 

내가 12살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했다.

첼로 학원의 그다. 그의 첼로 소리.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곡--- 마스카니의 엘레지.

음대에서 첼로를 전공하는 스무 살의 남자.

그의 긴 손가락과 그의 연주가 너무 아름다워서 울기도 했었다.

그가 좋은 오디오를 보여주겠다고 해서 따라갔다.

내 얼굴을 만지는 그의 손을 깨물고는 놓지 않았다.

첼로를 켤 수 없게 되어서 나를 그토록 저주한다면,

이젠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나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된 나는

당신에게 어떤 저주를 내려야 할까!

 

난 쳐다 보기만 한 거였는데--- 양욱일 눈에도 내가 그렇게 보였다니---

 

너 고경희 좋아하지?

 

 

천계영 작가의 그림은 도발적이고 거침이 없어보여 부담스럽다.

이야기도 그런다.

사랑을 시작하는 아이들의 만남이 무척이나 어지럽고 장난이 아니다.

절대 꺾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 그들의 만남이 무섭다.

그들이 펼쳐갈 사랑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예감.

거침 없는 사랑.

너무 대담해서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그들만의 사랑이 기대된다.

마스카니의 엘레지를 들어보았다.

그들의 사랑 음감은 아닐 것 같다.